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44화 (44/80)

〈 44화 〉 전조(8)

* * *

"백작님…. 부탁드립니다. 부디 재고를…."

"더 할 말은 없다! 당장 나가거라!"

─짜악

뜨거웠다.

얻어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뺨도, 자신이 머무를 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택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머리까지 전부.

"알겠…습니다."

바닥에 쓰러졌던 몸을 추스르고,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째서 이렇게 먼 것인지.

"티아 아가씨…?"

"쉬잇! 티아 아가씨는 무슨. 저 남쪽 강도 놈들의 피가 섞인 잡종이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야."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소곤거리는 대화는 어째서 이렇게 크게 들려오며 심장을 사정없이 푹푹 찔러오는 것인지.

"어째서?"

그 기나긴 욕됨의 길을 지나 목적지인 방에 도착하자, 부들부들 떨리는 티아의 입은 저절로 움직여 의문을 토해냈다.

"타, 타는 듯이 붉은 머리…!"

시작은 머리를 손질해주던 하녀의 비명이었다.

키니아 제국의 남부에선 제법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머리카락 색깔인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조금씩 돋아나오기 시작한 붉은 머리카락.

그날 이후로 티아의 삶은 바뀌어 버렸다.

무척이나 자애롭고, 티아를 향한 애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할아버지였던 이글라스 백작은 그날 이후로 티아를 귀여운 손녀로 여기면서 살갑게 대해주던 것을 그만두었다.

매일 찾아오던 발걸음을 끊고, 가끔 저택 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혐오와 분노가 섞인 차가운 시선을 티아에게 보내올 뿐.

"저기, 소문 들었어?"

"그 소문 말이지? 티아 아가씨가 사실은…어휴, 망측해라!"

자신을 '티아 아가씨'라 부르며 시선 하나, 숨 쉬는 것 하나하나까지 살뜰히 살피던 사용인들은 그날 이후, 티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티아를 비웃으며 뒷담화를 늘어놓기 바빴다.

그리고 오늘, 이글라스 백작은 티아를 외진 변방의 수녀원으로 쫓아내는 것을 자기 멋대로 결정하여 티아에게 통보했다.

'이럴 리가 없어.'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도중에 갑자기 테라스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급작스러운 변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티아 이글라스는 그 낙차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하는 생각과 동시에, 티아의 마음 한쪽에서는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은 생각이, 마치 불꽃이 종이를 불사르듯 티아의 마음을 불태우며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했다.

[억울하지 않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처분을 내린 이글라스 백작의 머리통을 부지깽이로 내려쳐 부숴버린다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을 텐데…!]

"아, 아니야. 나는…."

자신이 그런 격렬하고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린 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티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이글라스 백작에게 무슨 피해를 주기라도 했어? 아니잖아! 그런데 저 망할 늙은이는 고작 의심 하나 때문에 널 내친 거야!]

[자, 당장 그 추한 늙은이를 찾아가는 거야. 찾아가서 역정을 내는 그 재수 없는 주둥이를 바닥에 처박게 하자고!]

[그 늙은이를 처리하고, 다음은 뒤에서 너를 신나게 씹어대던 그 머저리들을 끌어내 혀를 뽑아버려!]

"그만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분노와 피에 굶주린 누군가의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티아는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아니! 나는 너 그 자체야! 자신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지! 내가 이렇게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네가 마음속으로는 이러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단 말이라고!]

"아니야!"

악을 쓰듯 소리를 치는 것으로 속삭임을 떨쳐내며, 티아는 방을 박차고 나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오, 불쌍한 티아! 문제에서 눈을 돌린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네가 이런다고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니?]

계속해서 귓가를 간지럽히는 이 끔찍한 유혹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한 티아의 발버둥이었다.

[오, 그래! 계속 그렇게 도망쳐 보렴! 어차피 티아 네가 할 일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

그러나 목소리는 티아의 선택을 무의미한 짓이라며 비웃을 뿐이었고, 그 비웃음은 머지않아 사실로 밝혀졌다.

"아…."

티아 자신은 저택을 벗어나 바깥으로 달렸건만, 사악한 악마의 마법이라도 작용한 것인지, 그녀가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뛰어다녀도 그녀가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장소는 이글라스 백작의 집무실이었다.

"뭐냐? 당장 돌아가서 짐을 싸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당장 돌아가거라!"

[자, 어서 움직여! 저 늙은이는 목소리만 컸지, 다 늙어빠진 퇴물이라고! 티아, 네 힘이라면 충분히 때려눕힐 수 있다고!]

"나, 나는…."

티아를 모질게 냉대하는 이글라스 백작의 태도와 당장 이글라스 백작을 때려눕히라고 종용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티아는 천천히 입을 열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만 사라지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그래! 물론이지! 당장 저 영감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널 비웃은 놈들의 목을 매달아 버리자고! 그러면 아무도 널 비웃을 수 없어,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라고!]

"정말…이지…?"

어느새 티아의 손에는 언제부터 손에 쥐고 있었는지도 모를 부지깽이가 쥐여져 있었다.

"할아버지…."

조금 전에 벽난로를 헤집었는지,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부지깽이였다.

"저…는…."

─다시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공허해진 눈동자로 이글라스 백작을 응시하며, 티아는 천천히 손에 쥔 부지깽이를 들어 올렸다.

[그래! 저질러 버리는 거야! 어서!]

다시금 티아를 재촉하는 목소리의 지시를 따라 티아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갑자기 손목을 붙잡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며, 티아의 걸음은 거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너는…."

갑작스럽게 손목을 붙잡은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티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히 밉살맞은 말투로 티아를 책망하듯 바라보는 에일라 넬런이 있었다.

"아…."

그 모습에 놀란 티아는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의 힘이 풀려 부지깽이를 떨어뜨렸다.

─까앙

떨어진 부지깽이가 바닥을 구르며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도 잠시.

"티아, 같이 돌아가죠."

티아 이글라스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

"…어?"

가벼운 두통과 미열을 느끼며 티아 이글라스는 정신을 차렸다.

"오, 드디어 깨어나셨지 말임다."

막 정신을 차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대책 없이 밝은 성격이 드러나는 말투와 함께 시야 한구석에서 불쑥 붉은 머리가 튀어나왔다.

"에일라 님은 기적으로 악마 놈을 마무리하시고 탈진해 쓰러지셨고, 티아 자매도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저만 완전 고생했지 말임다."

"……."

제 등을 툭툭 두드리며 너스레를 떠는 칼린의 말을 흘려들으며, 티아는 자신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뭐, 뭐야! 어째서 에일라가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건데!"

그리고 얼마 안 가 티아의 입에서는 기겁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에일라의 모습을 꿈에서 보는 바람에 심란한 마음이었는데, 본인이 바로 옆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야 어쩔 수 없지 않슴까. 이 숙소에 침대는 하나밖에 없지 말임다. 그리고 이 침대는 두 명이 누워도 충분한 크기지 말임다."

"어, 어?"

'그랬었던가?' 하는 생각에 기억을 되살려 보는 티아의 머릿속에 매일 밤늦도록 숙소 책상에 앉아 서류와 씨름하던 에일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책상에 그대로 쓰러져서 잠들거나, 방에 비치된 소파에서 불편하게 잠들었던 걸까?

"아무튼 에일라 님도, 티아 자매도 정말 큰일 날 뻔했슴다. 에일라 님이야 전에도 기적을 쓰다 탈진해서 쓰러진 적이 있다고 들었슴다만, 티아 자매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널 뻔했슴다."

"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고 놀란 티아가 진정되기도 전에, 칼린은 또다시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엘리어드 저택에서 바보 남작이 웬 이단자의 술수에 걸려 악마화하지 않았슴까. 그때 티아 자매도 어째선지 그 술수에 당해서 괴롭다고 완전 난리였슴다."

"그, 그랬던 것 같기도…."

솔직히 말해서 티아는 그때의 기억이 흐릿했다.

몸속을 불태우는 것 같은 작열감과 지독한 졸음이 몰려오면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하여 그 당시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결과를 낳았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길더스텐 님의 가호가 있었는지 티아 자매는 운이 좋았슴다. 바보 남작과 그 졸개들은 순식간에 악마화했지만, 티아 자매는 악마화에 저항하며 버틴 덕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악마화를 저지할 시간이 있었슴다.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뿔은 잘 숨기고 다녀야 함다. 이단심문관 분들에게 걸리면 무척 골치 아프지 말임다."

"어, 어째서? 당신은 성기사잖아."

대부분의 이단심문관이 대개 성기사로 성직에 입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기사는 교단의 가르침에 굳건한 믿음과 신념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기사인 칼린이 어째서 조금이나마 악마화가 진행된 자신을 처단하지 않고 악마화를 저지하는 선에서 멈췄는지, 티아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에일라 님이 티아 자매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기절해버려서 아님까. 티아 자매를 구하려고 교단에서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는 일을 망설임 없이 지시한 에일라 님의 우정에 저는 감동했지 말임다."

"…대체…."

─어째서 도움도 되지 않는 자신을 이렇게 챙기는 것인지.

여전히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에일라를 바라보며, 티아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

"…익숙한 천장이네요."

눈을 뜨니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해진 숙소의 천장이 보였다.

기적을 사용했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것도 이걸로 어느덧 세 차례.

이 정도쯤 되면 서브컬쳐에서 흔히 나오기 마련인, 강력한 마법 한 발을 가졌지만, 그 마법을 쓰면 곧바로 리타이어하는 마법사 캐릭터와 다를 게 없었다.

'뭐 이 정도면 그래도 잘 풀린 편이지. 게다가 이걸로 셀린 영애에 위해를 가했다는 오해도 풀렸을 테니 이제 난 자유다!'

그래도 가장 골치 아픈 문제 하나를 치웠다는 생각에 해방감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에, 에일라. 깼어?"

"…네?"

순간 누구인가 싶었다.

칼린이라면 특유의 슴다체로 말을 할 테고, 티아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피기만 할 뿐, 이렇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티아, 몸은 괜찮은가요?"

"너는 대체…. 응. 칼린 자매의 도움 덕에."

혹시나 악마화의 여파로 성격이 바뀌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몸 상태를 물어보았지만, 티아는 순간 울컥한 것처럼 말을 삼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네요. 이제 며칠 뒤면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갈 텐데, 몸에 이상이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아, 그, 그랬지. 그런데 그, 그게 있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고개를 갸웃하며 티아에게 묻자, 티아는 무언가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성녀 후보는 호위기사를 제외하고 최대 3명까지 호종할 사람을 지정할 수 있다고 들었어. 나를 같이 데려가 줄 수 없을까?"

"…티아를요?"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기를 쓰고 피하던 모습을 보였던 티아였고, 나 역시 수도에서의 일만 끝나면 티아를 다시 수녀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깔끔하게 이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대의 성녀가 확정되기 전까지 성녀 후보를 호종하는 역할을 티아가 자청하다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뭐, 티아라면 믿을만한 사람이죠. 좋아요."

그렇지만 딱히 티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호위로 칼린이 있고, 다른 일을 보조해줄 사람으로 세이사에 티아 정도면 나쁘지 않은 구성이지.'

[…시후는 여자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게 티아라는 요소가 추가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도중, 무언가 한심한 것을 보았다는 말투로 건네는 에일라의 충고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됐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보조자에 불과하니,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아니, 말을 왜 하다가 마는 건데! 원래 남자인 내가 도대체 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는 건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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