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순례길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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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수도 리아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교단에서 지급한 목걸이를 장식하는 '칠요의 성석'을 빛내러 떠날 때가 되었다.
다시 말해, 호위기사들이 자신이 호위할 성녀 후보를 투표한 결과를 공개하는 날이 되었다는 말이다.
"허어,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교황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호위기사들의 투표 결과를 공개하는 모습을 뚱한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본 후, 나는 씨익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칼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예상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투표 결과는 예상과 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에리올 루펜은 안면이 있는 후배인 로나의 1표를, 클라우디아 앨러나흐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클라우디아에게 수상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아우룸의 1표를, 나는 당연하게도 칼린의 1표를, 마지막으로 에린 에드피드는 티롤프의 1표를 받아, 모든 성녀 후보들과 호위기사가 1대1로 매칭된 결과가 나왔으니까.
"이 또한 길더스텐 님의 안배일 것입니다."
수도 곳곳에 펼쳐놓은 교단의 감시망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교황이라면, 내가 이번 투표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티롤프를 설득하여 에린 에드피드에게 표를 던지게 했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 자매들은 성녀 후보로서 기나긴 순례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녀 후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자매들에게 부디 길더스텐 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묘하게 나를 향해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교황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탓에, 나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성녀 후보들의 여정을 축복하는 교황을 교단의 간부들과 수많은 신도가 모인 앞에서 우거지상을 지으며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의식이 치러지는 내내 내 표정이 찌푸려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다른 성녀 후보분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할애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도 이걸로 수도 리아트에서의 공식적인 일정이 모두 끝났으니, 빨리 숙소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마무리하고 수녀원으로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대성당에서의 의식이 끝나고 클라우디아 앨러나흐가 다른 성녀 후보들을 불러 모아 제안한 탓에 그 계획은 조금 뒤로 미뤄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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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제안에도 모두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입니다."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의 주도로 개최된 성녀 후보들의 모임에는 의외로 빠지는 사람 없이 성녀 후보 네 명이 모두 모였다.
"초대에 감사드려요. 클라우디아 자매. 에일라 넬런이에요."
"에린이에요! 반가워요! 클라우디아 언니!"
"반갑다. 에리올 루펜이다."
우선 클라우디아의 인사를 시작으로, 나와 에린 에드피드, 에리올 루펜의 인사가 이어졌다.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면, 잡담이나 나누려고 불러 모았을 것은 아닐 테지. 빨리 용건으로 들어갔으면 한다."
한 차례 서로의 이름을 밝히며 인사하는 것이 끝나자, 에리올 루펜은 이단심문관 특유의 딱딱한 성격답게 곧바로 용건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했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자매들의 시간은 금과도 같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클라우디아 역시 에리올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곁을 지키던 시종을 손짓해 불렀다.
"'그것'을 가져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시종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은 키니아 제국은 물론 주변의 다른 국가들의 영토까지 꼼꼼하게 표시된 카르실리안 대륙의 지도를 가져왔다.
"어째서 이런 귀한 물건을…."
클라우디아가 그렇게 나오자 놀란 것은 에리올 쪽이었다.
지도라는 것이 흔한 세계도 아니거니와, 한 장에 리벤 은화 한 닢 하고도 반이나 하는 고급 종이 위에 주요 도시의 위치와 각국의 경계를 여러 색의 물감까지 사용해 세밀하게 표현한 지도는 겉잡아 거의 켈돈 금화 한 닢에 준하는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제 제안을 이야기하려면 일단 지도로 설명하는 것이 편할 테니까요."
금화 한 닢이나 하는 지도를 거침없이 설득의 보조재로 활용하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에서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난 영애의 기운이 느껴졌다.
"자, 우선 이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지도는 카르실리안 대륙에 존재하셨던 여러 성인께서 깨달음을 얻거나 역경을 겪었던 성지를 표시한 지도에요."
그 말에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클라우디아의 말마따나 지도에는 성 라울의 수난지, 성 레이넨의 순례길 등의 표시가 지도 곳곳에 표기되어 있었다.
"이런 지도는 교단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지도일 텐데, 엄청나군."
"맞아요! 대단해요!"
"그야 제가 직접 만든 지도니까요."
에리올과 에린의 감탄에 클라우디아는 살짝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지도를 그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흠흠, 아무튼 자매분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정의 첫 목적지를 조율하고 싶어서예요."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무안했던지 클라우디아는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채로 헛기침을 하며 다른 성녀 후보를 불러 모은 이유를 밝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성녀 후보는 적어도 키니아 제국 내에서는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는 자리다만?"
"그렇지만 저는 목적지가 겹치는 것이 별로 효율적이진 않다고 생각해요. 괜한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서로 길이 겹치지 않게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정해서 출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나중에 길이 겹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요."
클라우디아의 제안은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교단에서 칠요의 성석을 빛내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성녀의 자격에 걸맞은 행동을 했음을 인정했을 때 칠요의 성석이 빛날 것이라는 힌트는 절로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길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했다.
설사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칠요의 성석을 빛내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성인으로 시성 받은 이들의 발자취에서 무언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딱히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저는 클라우디아 자매의 의견에 찬성이에요."
나는 우선 찬성한다는 의견을 표했다.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익이지만, 후보끼리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면 내가 에린 에드피드와 마주쳐서 에린 에드피드의 호위기사인 티롤프를 볼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흠, 나로서도 딱히 손해 볼 일은 없군. 나도 찬성이다."
"저도 좋아요! 찬성할래요!"
내가 첫 시작을 끊자, 잠시 고민하던 에리올도 고개를 끄덕이며 클라우디아의 제안에 찬성했고, 상황이 그렇게 되자 아직 어린아이인 에린 역시 분위기에 휩쓸리듯 찬성표를 던졌다.
"좋아요. 그럼 혹시 희망하는 지역이 따로 있으신 자매가 있나요? 있다면 겹치지 않도록 방위를 정하도록 하죠."
"그럼 내가 동쪽을 선택하도록 하지."
망설임 없이 에리올은 지도의 동쪽을 가리켰다.
"동쪽은 악마와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방향이라 위험할 텐데…. 괜찮으신가요?"
"걱정 마라. 이래 봬도 성기사를 했던 몸이니 튼튼함에는 자신이 있다. 거기에 동부는 악마 놈들과 맞서 싸우던 성기사 선배분들이 남긴 성지가 많지. 내게 맞는 곳은 동부다."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곳이라 할 수 있는 동부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에리올의 모습에 클라우디아가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에리올은 자신이 성기사 출신이었음을 어필하며 키니아 제국 동부를 선택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에리올 루펜 자매는 동부…. 혹시 다른 자매분들은 희망하는 곳이 있나요?"
"아뇨! 없어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에리올 루펜은 이미 이전부터 동부를 첫 여정의 시작지로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우선 수녀원으로 돌아가서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려 했던 나와, 아직 어린아이라서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인 에린 에드피드는 딱히 어디를 가야겠다고 정한 곳이 없었다.
"후후후. 좋아요. 그러면 이게 무용지물이 되진 않겠어요."
그러자 클라우디아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을 보이면서 주머니를 뒤져 '동부, 서부, 남부, 북부'라는 글자가 각각 적혀있는 제비를 꺼내 들었다.
"원래는 제비를 뽑아서 정하고 싶었지만, 제게 그걸 강요할 권한은 없어서 무용지물이 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잘 되었네요."
'…그냥 제비뽑기가 하고 싶었구나.'
[…의외로 소녀 감성이네요. 클라우디아 자매.]
클라우디아의 본심은 나와 에일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주었지만.
"좋아요! 내가 먼저 뽑을래요!"
…에린에게는 아주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자, 잠시만요. 이, 일단 에리올 자매가 선택한 동부가 적힌 제비는 버리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에린에 살짝 당황했는지, 클라우디아는 말을 살짝 더듬으며 '동부'라 적힌 제비를 제비 뭉치에서 제외했다.
"자, 여기서 제비 하나를 뽑아 주세요."
"이걸로 할래요!"
"…전 이걸로 하죠."
클라우디아가 길게 접어서 안의 내용을 감춘 제비를 쥔 손을 내미는 것과 동시에, 에린이 제비 한 장을 뽑아가고, 나 역시 제비 한 장을 뽑아서 펼쳤다.
"…북부군요."
"아, 저는 남부네요."
"저는 서부에요!"
동부의 에리올 루펜, 서부의 에린 에드피드, 남부의 클라우디아 앨러나흐, 북부의 에일라 넬런.
그렇게 각자의 목적지가 정해졌다.
'나쁘지 않네.'
제비를 뽑은 모든 이들이 나름대로 자신이 뽑은 지역에 만족했고, 나 역시 '북부'라 적힌 제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차피 수녀원이 북부에 있는 참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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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리아트 곳곳에 존재하는 인적이 드문 뒷골목. 그 안에서 로브를 후드까지 깊게 눌러쓰고, 얼굴에는 복면까지 둘러 완전히 정체를 감춘 두 명의 복면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는 …부로 목적지를 정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다음에도 부탁하지."
그들의 사이에선 반짝이는 은화가 담긴 주머니가 오갔고, 은화를 받은 검은색 복면을 쓴 복면인은 손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은화의 무게에 화들짝 놀라며 은화를 건넨 복면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님!"
"뭐, 괜찮아. 우리 사이에 님은 무슨. 다음에 또 보자고."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여대는 상대 복면인을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것으로 배웅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복면인은 입가에 진한 탐욕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내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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