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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46화 (46/80)

〈 46화 〉 순례길을 향해서 (2)

* * *

─기우뚱

"제기랄! 또 바퀴가 뻘밭에 빠졌어!"

"히이이잉!"

갑자기 마차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었고, 짜증 가득한 마부의 욕설 섞인 외침과 말들의 울음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하아."

제비뽑기에서 북부를 뽑은 것에 만족했던 나는 머저리임이 분명했다.

"…또 진흙밭인가요."

춥고 얼어붙은 땅이 해빙기가 도래하면 정말로 끔찍한 뻘밭으로 변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수도 리아트 근교의 도로는 돌을 이용하여 길을 닦아놓은 덕에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수도를 벗어나 북부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난, 흙으로 닦인 도로는 마차를 이용하든 두 발을 이용해 걸어가든, 바퀴와 발이 진흙에 푹푹 빠지는 통행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늪지대나 다름없었다.

당연하게도 마차를 이용하여 이동하는 일정은 점점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조금 전처럼 마차가 뻘밭에 빠지는 사고가 벌어지면 더더욱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아직 마차가 완전히 뒤집히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뻘밭 때문에 마차가 뒤집혀 사망한 성녀 후보라니.

악마도 그 소식을 들으면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 분명했다.

"나무 쓰러진다! 조심해!"

"여기도 쓰러진다! 피해라!"

며칠간 이동하며 마차가 뻘밭에 빠지는 일 정도는 이제 모두가 익숙해져서, 마차를 일단 뻘밭에서 빼낸 마부와 짐꾼, 성녀 후보인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붙은 호위병 등의 사람들은 빠르게 길 주변에 자라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질척질척한 이 뻘밭을 통나무로 메워 돌파하는 방법.

큼지막한 나무를 베고, 대충 잔가지를 쳐내 통나무를 만들고, 그 통나무로 뻘밭을 메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노동력이 소모되는 일이었지만, 이 끔찍한 진흙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그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티아. 아무래도 전 멍청한 모양이에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차라리 리아트에서 더 시간을 보내다가 출발했다면 이런 끔찍한 길을 지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답답한 마음에 나는 결국 옆자리에 앉은 티아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북부의 도로 사정이 이러한 것을 미리 알았다면 출발을 좀 더 늦추고 땅이 굳는 시기를 골라서 출발했을 텐데, 괜히 마음만 급해 출발을 앞당긴 탓에, 힘들기는 더 힘들면서 도착은 도착대로

계속 미뤄지는 최악의 결과가 나와버렸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뻘밭이 문제라면 진흙이 머금고 있는 물기만 날려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었으면 저렇게 나무를 베어 뻘밭을 메우는 작업을 할 필요도 없었겠죠."

다른 흔한 판타지 소설의 마법사처럼 불과 냉기 같은 기운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면 모를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길더스텐의 기적 중에 그런 능력은 없었다.

혹여나 가능하더라도 기적을 사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탈진해 쓰러져 버릴 테니 효율성도 나쁘고.

"…그것도 그렇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티아.

지금 상황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영양가라곤 전혀 없는 대화였지만, 딱히 티아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하소연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딱히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티아, 그러면 잠시…."

이대로 멍하니 마차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 것도 지겨운 일이었다.

"에일라 님? 잠시 바깥으로 나와주실 수 있으심까?"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잠시 마차 밖으로 나갈 것을 티아에게 권유하려던 참에 칼린이 마차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그게…일단 저기를 보십쇼. 뭔가 보이지 않슴까?"

밖에는 진흙이 튀고 먼지가 날린다며 닫아놓았던 마차 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니, 칼린의 말마따나 여전히 나무를 베느라 여념이 없었던 이들이 손을 멈추고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뻘밭을 통나무로 메운 뒤에 마차가 향하려던 방향에서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싸늘한 공기.

시간을 되돌려 다시 겨울이라도 찾아오게 한 것인지, 길가에 무성하게 자라난 침엽수의 가지에는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고, 진흙밭이 되어 물컹거리던 대지는 해빙기가 언제 찾아왔냐는 듯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런 추위를 이끌고 서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눈처럼 새하얀 법의를 걸친 이들의 무리.

"저런 냉기라면…."

틀림없었다.

저건 '아가드'라는 이름을 지닌, 냉기와 기억의 신을 모시는 사제가 기적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는 분명 길더스텐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키니아 제국의 영내일 텐데 어째서 저들을 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아가드의 사제들은 특유의 폐쇄적인 성격 탓에 키니아 제국의 최북단과 국경을 마주한 눈과 얼음의 땅을 넘어오는 일이 극히 드문 편이었다.

그런 그들이 키니아 제국의 영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서, 저만한 냉기를 내뿜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까지 대동하여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지금 북부가 해빙기에 접어든 탓에 교통이 마비되어 소문이 퍼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북부에 자기 영지를 지닌 영주들이라면, 저들이 제국과의 국경을 넘어 키니아 제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사실상 저들의 월경을 묵인했음이 분명했다.

'어째서? 그러고 보니 무리 중에 북부 병사들의 모습이…설마?'

내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반란'이라는 단어였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길이 뻘밭으로 변하는 지금은 북부의 영주들이 아가드의 사제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기에 무척이나 적합한 시기였다.

북부가 중앙을 칠 때면 아가드의 사제들과 손을 잡고 뻘밭을 얼려버리며 쾌속으로 진격하는 것이 가능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부로 향하는 다른 지역의 군대는 해빙기의 지독한 뻘밭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북부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아니야. 일행 중에 무장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 데다, 공격할 목적이었다면 진작에 공격을 시작했겠지.'

그러나 아가드의 사제들의 소지품 중에서 무기라고 할만한 것은 제의용으로 사용하는 도구나 호신용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전부였고, 멀리서 멈춰 서 있는 우리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다가오는 것을 보아하니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오, 이거 오랜만이로군. 이제는 정식으로 성녀 후보가 된 것인가?"

게다가 반란을 꾸미는 이가 나를 보고 저렇게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 리가 없지 않은가.

"…오랜만입니다. 솔름 백작님."

시네티 마을의 일이 끝난 이후로 볼 일이 없었던 솔름 백작이 건넨 인사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지금은 수도에서의 일과 점점 늘어져만 가는 일정 탓에 무척 피곤해서, 골치 아픈 일과 마주하는 것은 사양이었으니까.

"그런데 솔름 백작님은 아가드의 사제분들과 함께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내가 그런 상태라고 해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아가드의 사제들과 어떤 목적으로 동행하고 있는지 알아둘 필요는 있었다.

이 야심 넘치는 백작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나중에 벌어질 일의 여파를 영문도 모르고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다.

"아, 이 친구들 말인가? 뭐, 자네도 이제는 성녀 후보라는 자리에 있으니 사실을 알려도 상관 없겠지. 그렇지 않소? 신관?"

"길더스텐의 성녀 후보라…. 알겠소."

솔름 백작이 새하얀 법의를 걸친 아가드의 사제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묻자, 그 신관은 잠시 생각에 잠기며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들은 자네도 알아보았듯이 아가드의 사제들이라네. 그리고 지금 이 친구들이 수도 리아트로 향하는 이유는 교단과 황실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지."

"지원요청 말입니까? 대체 어떤 일이길래?"

"눈과 얼음의 땅에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 때문이라네."

내가 솔름 백작의 설명을 듣고, 어째서 아가드의 사제들이 길더스텐 교단과 키니아 제국의 황실에 도움을 요청하려 하는 것인지 의문을 표하자, 조금 전의 신관이 부연 설명에 들어갔다.

"우리 아가드 님을 모시는 사제들은 눈과 얼음의 땅에 몰아치는 눈보라가 너무 심해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조절해야 하는 사명이 있지.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눈과 얼음의 땅 일부를 뒤덮는 수준이지만, 그 영향력이 넓어지면 카르실리안 대륙 북부는 완전히 그 눈보라의 영향권에 들어간다고 하더군. 아름다운 내 영지가 눈보라에 파묻히는 꼴을 영주로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안 그런가?"

신관의 설명을 가로채서 자신이 마무리하는 솔름 백작의 모습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냉기의 신을 모시는 사제는 화조차 어지간해서는 내지 않는지, 신관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솔름 백작의 말을 긍정했다.

"그건…큰일이로군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청나게 큰 문제였다.

아가드의 사제들도 열두 주신 중의 하나를 모시는 사제들인데,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도움을 청할 일이라니.

'뭔가 냄새가 나긴 하는데….'

[지금까지의 일로 미루어 보면, 악마가 관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해요.]

수도에서 있었던 일이라던가, 시네티 마을에서 있었던 일 모두,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악마의 농간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르실리안 대륙 북부에 자리 잡은 종족들을 위기에 빠트릴 위협이라니.

악마가 이 일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하지 않았는지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법했다.

'칠요의 성석을 빛내는 조건은 성녀에 적합한 업적을 이루었을 때라고 했었지?'

막연히 성인의 발자취를 좇아 성지를 돌아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카르실리안 대륙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게 칠요의 성석을 빛내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불어 이 진흙으로 질척거리는 수녀원까지의 여정을 빠르게 끝낼 방법도.

"솔름 백작님."

"음? 무슨 일인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이 일에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흠…."

아가드의 사제들을 돕겠다는 내 제안을 들은 솔름 백작은 신관을 돌아보며 어쩌겠냐는 시선을 던졌다.

"길더스텐의 성녀 후보인 자네가 도와준다면, 우리야 환영이라네. 하지만 교단이 그걸 허락하겠나?"

교단이 귀하디귀한 성녀 후보가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과연 허락해 주겠냐는 신관의 질문.

하지만 회의적인 의문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던 나는 이미 그에 대한 대답도 준비해 두었다.

"아마 허락할 것입니다. 길더스텐 님의 가르침은 이웃의 고난을 방관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알겠네. 수도로 간다면 이에 대해서도 교섭해 보도록 하겠네. 그 마음만이라도 고맙군. 혹시 필요한 것이 있나?"

내 긍정적인 답변에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냐며 내게 묻는 신관.

조금 전의 문답으로 내게 호의적인 인상을 가지게 되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사제 한 분을 동행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지금은 해빙기라 길이 질척거려서 목적지까지 마차가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그거야 귀환하며 데려가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 없지. 알겠네."

선선히 사제 한 명을 내어 주겠다고 약속한 신관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이제 수녀원까지 가는 길이 지체되지는 않겠네. 이게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어?'

[…저는 시후가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악독한 인간인지 가끔 헷갈려요.]

'그야 착한 사람이지. 첫 만남에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어디있어?'

나는 에일라의 핀잔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대충 내 속내를 눈치챘는지, 제법이라는 시선을 보내는 솔름 백작에게 슬쩍 웃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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