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순례길을 향해서 (3)
* * *
"자, 그러면 수도에서의 일이 끝나면 다시 보도록 하지."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 그대의 길에 아가드 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빌겠네."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솔름 백작과 신관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으로 그들을 일별한 뒤, 나는 홀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새하얀 법의를 걸친 소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만나서 반가워요. 수녀원까지 신세를 지게 되었어요. 에일라 넬런이라고 해요."
그녀는 조금 전 일별했던 신관이 우리에게 흔쾌히 제공해준, 우리 일행이 수녀원으로 향하는 여정을 쾌적하게 만들어 줄 도우미였기에, 인사를 건네는 내 말투는 평소보다 사근사근하게 변해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저는 아가드 님을 모시는 사제, 루피아 글라체스라고 합니다."
새하얀 법의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백금발에 회색빛 눈동자를 지녀, 말 그대로 눈이 소녀의 형태를 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소녀는 내 인사를 받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슴다. 에일라 님의 호위를 맡은 호위기사 칼린이라고 함다."
"…티아 이글라스야. 나는 그러니까…에일라의…."
루피아의 인사에 우리 일행 역시 인사로 답했다.
다만, 칼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티아는 수도 리아트에서도 가끔 보여주었던 낯을 가리는 버릇 때문인지, 인사를 건네던 도중에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티아는 제 친구예요."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당황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티아의 말을 받아 대신 대답했고, 루피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 마침 잘 되었슴다. 제가 기사로 일하면서 북쪽에 대해선 이것저것 들은 게 있지 말임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슴까?"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첫 만남 특유의 어색한 공기가 흐르려던 순간,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친화력이 뛰어난 칼린은 재빠르게 대화 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어색한 공기를 멀리 몰아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 권한과 지식이 허락하는 대로 성실히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북부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칼린의 질문이 루피아의 마음에 들었는지, 루피아는 칼린의 말에 밝게 웃으면서 무엇이든 질문해 달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어…북부에는 가끔 비가 내리자마자 얼어붙는 일이 벌어진다고 들었슴다. 그런데 보통 추울 때는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눈이나 얼음덩어리가 내리는 거 아니었슴까? 왜 그런 검까?"
"칼린 기사님은 '아가드의 자비'에 대해 들으신 모양이군요. 저희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소나기처럼 내리는 그 차가운 비는 땅이나 무언가에 닿는 순간 그 형태 그대로 빠르게 얼어버립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런 비가 내린 뒤에는 지독한 추위가 그나마 누그러진다는 점이지요."
'캐나다나 미국에서 가끔 내린다는 아이스 스톰이네.'
칼린과 루피아의 대화를 옆에서 들으며 나는 칼린이 루피아에게 물어본 기상 현상이 무엇인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스 스톰, 여기서는 '아가드의 자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비가 완전히 얼어 우박이나 눈이 되지 못하고 과냉각된 상태에서 쏟아져 내리는 탓에, 과냉각된 빗방울이 작은 충격에도 곧바로 얼어버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기상현상이라고 했었나?'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관련된 영상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뭐, 내가 설명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이 세계가 중세에서 근세 사이의 어디 즈음에 있는 발전도에 머무르고 있다 보니, 과냉각 현상이네 뭐니 내가 말해봐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여긴 기적이라는 마법 같은 능력도 존재하는 세상인데, 내가 아는 게 무조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지.'
아니면 내 지식이 이 세상의 법칙과는 맞물리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으니,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오, 완전 신기함다! 아, 그러면 그건 진짜임까? 저 북쪽에서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얼음으로 배를 만들어서 바다를 돌아다닌다고 들었슴다."
"예. 우리 아가드의 사제 중 일부는 기적을 사용해서 얼음으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분들이 몇몇 계십니다."
"…정말인가요?"
그러나 그런 결정이 무색하게도, 칼린의 다음 질문에 대답하는 루피아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답변에 나는 가만히 닫기로 했던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가드의 기적, 엄청나잖아.
얼음으로 만든 배를 바다에 띄운다는 비현실적인 공상을 현실화하는 힘이라니.
악마 퇴치와 치유 능력만 놓고 보면 그 어떤 기적도 따라올 수 없는 길더스텐의 기적이지만, 아가드의 기적 역시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특성을 활용하는 방법에 따라 무궁무진한 활용도를 지닌 기적이었다.
'에일라, 혹시 다른 신의 기적을 동시에 사용할 수도 있어?'
[아뇨. 여태까지 그런 사제는 존재했던 적도 없어요. 더군다나 그랬다간 다른 신을 모시는 교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말 거예요.]
그렇기에 탐이 나서 에일라에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런가….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뭔가 아쉬운걸.'
뭐, 아가드를 모시는 사제들이 내게 자기네들이 사용하는 기적의 사용법을 알려줄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에 불과했지만.
"예.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도 눈과 얼음의 땅에 오셔서 기회가 되신다면 타 보실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내가 속으로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루피아는 자신들이 다루는 기적의 힘에 자부심을 느꼈는지, 어깨를 당당하게 펴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가드의 사제는 그런 것도 가능하다니 완전 손해 본 느낌임다. 얼음으로 된 배라니 완전 멋지지 않슴까."
거기에 칼린의 다소 과장 섞인 칭찬까지 더해지니, 루피아의 어깨에서는 한동안 힘이 빠질 것 같지 않았다.
"에, 엣헴."
루피아가 쑥스러움에 짐짓 헛기침하는 것에도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칼린과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만 더 띄워주면 쓸개까지 다 빼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알겠슴다. 그럼 조금만 더 띄워줘서 완전히 우리 편으로 만들어 버리겠슴다.'
우리가 불온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눈치채고, 티아가 무척이나 딱한 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루피아를 바라보았지만, 루피아는 아직 세상의 풍파에 찌든 어른의 시선을 눈치채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한 소녀였다.
*
─다가닥 다가닥
마차는 해빙기에 접어든 땅을 달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쾌하게 길을 내달렸다.
"더…더는…. 이제 한…계에요."
"음,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서 쉬어가도록 하죠."
루피아가 피로에 절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한계임을 밝히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이틀.
루피아를 한계까지 쥐어 짜낸(?) 덕분에 이틀이라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마부왈, 마차가 뻘밭에 푹푹 빠지기 일쑤인 해빙기의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일정이 두 배 이상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을 아가드의 사제 하나가 동행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었으니, 진작에 이런 방법을 알았다면 해빙기마다 고생할 일은 없었을 거라나.
"루피아 사제님, 여기 물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기진맥진한 루피아는 갈증과 허기가 심했는지, 내가 건넨 물통을 받아들자마자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기 육포도 있으니 천천히 먹어요. 오늘도 고생이 많았어요."
물통에 이어, 내가 육포를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찢은 것을 내밀자, 루피아는 오히려 황송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육포를 받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에잉라 후오잉도 고생 망으셩승니다.(에일라 후보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피아가 급히 육포를 씹으면서 대답한 탓에 당연하게도 발음이 잔뜩 뭉개져서 나왔고, 이는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마차가 뻘밭에 빠지지 않도록 기적을 사용해서 마차가 달리는 길을 꽁꽁 얼어붙게 해준 루피아의 공로를 참작하면 그런 무례 정도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볍게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루피아 사제님 덕분에 수녀원까지 가는 길이 무척 쾌적해졌어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덕분에 아가드 님의 기적을 다루는 실력이 좀 더 향상되었으니 제가 더 감사할 일입니다."
'역시 제대로 기적을 배워서 사용하는 사제는 저렇게 한계까지 신성력을 사용해도 탈진하지 않는 모양이네.'
몇 시간이나 질척거리는 대지를 얼어붙도록 하는 기적을 사용했음에도 루피아는 기진맥진한 기색을 보이기만 할 뿐, 나처럼 탈진하여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루는 기적이 다르니 제가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요. 게다가 성녀님이 말씀하신 그 '성흔'이라는 것도 원인인 것 같고요.]
'으음….'
에일라의 지적에 나는 오른손을 들어 손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수도에서 악마를 기적으로 퇴치한 이후 어김없이 상처가 터져버리는 바람에 새로 붕대를 감은 손목이었다.
"……."
슬쩍 손가락을 들어 붕대 위를 찔러보았지만, 딱히 느껴지는 고통은 없었다.
'신성력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나면 아무는 성흔이라니.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성녀님은 이 상처를 보자마자 성흔이라고 확신했지만,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교단이 도서관에 비치한 문헌을 이것저것 뒤져본 결과, 에일라의 오른팔에 난 상처는 교단의 문헌에 기록된 성흔이라기에는 특이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원래는 그들이 만들어낸 가짜 성흔이었지만, 제가 자해하면서 낸 상처와 맞물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르죠.]
'아마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크긴 할 텐데….'
에일라가 말하기를, 원래는 신성력을 제어하는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새겨졌던 가짜 성흔을 스스로 망가뜨리기 위해 상처를 냈던 것이라고 했던가.
그 과정에서 무언가 가짜 성흔에 변화가 생겼거나, 어쩌면 정말로 길더스텐이라는 신이 개입한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에일라의 몸과 파장이 맞았던 내가 에일라의 몸으로 들어온 것도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시간이 길었는지, 티아가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람을 순식간에 악마로 바꾸어 버리는 능력은 여태 목격된 적이 없었는데, 북쪽에서는 여태껏 없었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죠.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읏."
내가 '악마화'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티아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 위에 두른 베일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티아의 머리 옆으로 돋아난, 아주 작아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뿔.
칼린의 말로는 이미 변해버린 부분까지는 아무리 신성력을 들이부어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던가.
"…미안해요."
어떻게 보면 내 잘못으로 생겨난 것이니 내가 책임져야 할 짐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지. 교단에서도 방법을 모색하는 중인 모양이니.'
교단의 문헌에 적혀있던 정보에 따르면, 교단 역시 제국과 악마들의 땅인 '칼라탄' 사이의 완충지대인 '라우프'에 거주하는 극소수의 종족들에게서 나타나는 악마화의 징후를 감지하고, 그 치료법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 연구에 진전이 있다면 비교적 경미한 증상인 티아 역시 치료할 수 있으리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드디어 세이사를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내 사과에 티아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세이사가 걱정할 것 아냐. 웃으라고."
"네. 그럴게요."
나름대로 자신은 괜찮다고 어필하고 싶었는지 내게 그렇게 말한 티아였지만,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는지 티아는 고개를 홱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두 분은 무척 사이가 좋으시군요."
루피아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짧은 평을 남겼고, 칼린은 씨익 웃으며 '힘내십쇼'라며 장난스럽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마부와 인부들이 밤을 대비하려고 주변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주는 온기처럼 마음이 절로 따스해지는 분위기.
"…이제 이야기는 이만하고, 슬슬 잠자리를 준비하도록 하죠."
타인이 나를 향해 호의보다는 적의와 악의를 보내는 것이 더 익숙했던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가 어색해서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