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순례길을 향해서 (4)
* * *
"성녀 후보님, 수녀원에 다 도착했습니다!"
마차를 몰던 마부가 마부석에서 마차 벽을 손으로 두드리며 수녀원에 다 도착했음을 알리자, 마차에 타고 있던 일행들의 얼굴이 밝게 피었다.
"드, 드디어 도착이군요…."
"오, 여기가 에일라 님이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녀원임까?"
수녀원으로 향하는 길이 질척거리는 늪지대가 되지 않도록, 대지가 머금은 물기를 단단하게 얼리는데 신성력을 매일 사용했던 루피아가 가장 밝은 표정으로 도착을 기뻐했고, 칼린 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녀원을 둘러싼 석벽을 살펴보았다.
"다시 돌아왔네…."
다만, 모두가 도착을 기뻐하는 와중에 티아는 혼자서 영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녀원을 둘러싼 석벽 너머로도 보이는 성당의 첨탑을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수고가 많으셨어요. 이건 감사의 뜻으로 받아 두세요."
그런 모습을 곁눈질하며, 나는 주머니를 뒤져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루아 은화 다섯 닢을 꺼내 마부에게 건넸다.
루아 은화 한 닢의 가치는 리벤 은화로 환산하면 열두 닢에 대응하는 가치를 가진다.
다시 말해, 내가 건넨 것은 리벤 은화로 육십 닢에 달한다는 뜻.
보통, 말 두 마리가 끄는 쌍두마차를 하루 대여하여 이동하는데 드는 삯이 1루아였으니, 편도로 보름에서 조금 모자라는 거리를 왕복하는 마차 삯으로 30루아를 미리 교단으로부터 받은 마부에게 내가 건넨 5루아는 횡재나 다름없을 터였다.
"아이고, 성녀 후보님께 이런 걸 받으면 다른 데서 경을 치십니다. 이미 마차 삯을 수도에서 치르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부는 손사래를 치며 내가 건넨 은화를 한사코 거절했다.
성녀 후보를 목적지까지 모시는 비용을 미리 교단에서 지불받았는데, 성녀 후보가 건네는 돈까지 받으면 경을 친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빙기라 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게 험난할 텐데, 이 정도의 가외 수입은 있으셔야 계산이 서지 않겠어요? 같이 고생한 다른 동료분들과 나누어 쓰세요."
"그, 그렇습니까? 그럼 감사히…."
그러나 내가 은근히 마부의 노고를 높게 쳐주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나누어 쓰라며 마부의 감성을 자극하자, 마부는 곧바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다 결국엔 내가 건넨 은화를 황송하다는 태도로 받아들고서는 재빠르게 은화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자, 그럼 들어가도록 하죠."
그렇게 마부와 짐꾼들이 내가 건넨 팁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기세로 공손한 인사를 올리며 물러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우리는 미리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열어둔 수녀원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반갑습니다. 리피샤 수녀원장님."
"환영합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
우리가 도착한 수녀원은 한창 일과에 힘쓸 시간이었던 탓에 비교적 한산했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향한 곳은 수녀원장이 머무르는 수녀원장실이었다.
"반갑습니다. 리피샤 수녀원장님. 저는 아가드 님을 모시는 사제, 루피아 글라체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루피아 사제. 비록 모시는 신은 다르지만, 길더스텐 님의 가호는 모든 이에게 평등한 법이니, 루피아 사제 역시 편안하게 지내다 가세요."
내가 리피샤 수녀원장과 인사를 마치자, 루피아는 곧바로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자신을 소개했고, 리피샤 수녀원장도 루피아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리피샤 수녀원장님."
"천만에요. 루피아 사제. 자, 그럼 티아 자매는 루피아 사제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으면 하는군요."
루피아가 리피샤 수녀원장의 환대에 감사를 표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서자, 리피샤 수녀원장은 내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던 티아를 향해 루피아를 안내해 주라며 간접적인 축객령을 내렸다.
"…칼린도 티아와 같이 가 주세요."
그것이 나와의 독대를 위한 사전작업임을 눈치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나는 이에 맞춰 칼린에게도 티아를 따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슴다. 에일라 님."
친화력이 좋은 만큼 눈치 역시 좋은 편인 칼린은 내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수녀원장실을 나선 티아의 뒤를 따라갔다.
"…우선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야겠습니다. 에일라 후보님. 에일라 님 덕분에 다른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에서 우리 수녀원의 입지가 올라갔으니 말입니다."
루피아와 티아, 칼린이 완전히 수녀원장실을 떠난 것을 확인한 리피샤 수녀원장은 이전에 내가 수녀원장실을 찾았을 때와는 달리, 내게 공대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리피샤 수녀원장님. 제게 말을 그렇게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아직 이 수녀원에 첫 발을 들였던 때에서 발전한 것이 없는 일개 수도녀에 불과합니다."
이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공대를 그만둬 줄 것을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요청했다.
어디까지나 내 역량과 활약은 여러 우연과 부족한 정보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어 상당히 과장된 채로 알려진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분수를 넘어서는 과도한 칭찬은 오히려 상대를 당황스럽고 어색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래요. 에일라 자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하죠."
그렇게 내 말에 곧바로 공대하던 것을 그만두고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리피샤 수녀원장의 모습에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이게 리피샤 수녀원장이지.
"에일라 자매가 주도한 신상품…그래놀라의 제조와 납품은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오히려 그래놀라를 독점적으로 납품받는 오스라드 상단에서 생산량을 늘려달라며 아우성이죠."
수도로 떠나기 전, 나는 나와 세이사가 이리저리 합작해서 만들어낸 그래놀라를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선보이며, 그 판매처까지 구해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수도에서 아이셀과 거래를 하면서 그래놀라를 납품받아 판매해 줄 판로를 뚫는 것에 성공했다.
수녀원을 운영하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입장에서 수녀원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수녀원을 운영하는 데 사용할 자금이 늘어난다는 말과 같았으니, 절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럼 이 사업을 더 크게 확장해보자.
"그렇다면 잘된 일입니다. 다른 수도원이나 수녀원과 제조법을 공유해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이라 하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생활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의외로 수도원과 수녀원은 근처의 다른 수도원이나 수녀원과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뭐, 지금 길더스텐 교단은 이런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세워진 여러 수도회가 서로 대립하며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것이 마냥 긍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인적 네트워크를 내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에일라 자매는 생각해둔 수도원이나 수녀원이 있나요?"
최근 수도를 중심으로 한 귀족 사회에서 고급 다과 및 디저트로 인정받으며 인기를 끌기 시작한 그래놀라의 독점 납품권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말이다.
"하얀 장미 수도회나 푸른 십자 수도회에 소속되지 않은 가급적 영세한 규모의 수도회 소속인 곳이 좋겠습니다. 거의 폐쇄 직전이라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려면, 영세한 수도회의 규모로 인해 재정적 위기를 겪으며 수도원을 폐쇄할 위기에 처한 곳을 돕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에일라 자매는 두 수도회와는 맞지 않았나 보군요? 하지만 에일라 자매가 언급한 두 수도회는 교단의 실세라고 할 수 있어요. 괜찮겠나요?"
리피샤 수녀원장은 거대한 규모를 지닌 두 수도회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결집하려는 내 시도가 두 수도회의 경계심을 자극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그래도 괜찮겠냐고 질문했지만, 이미 나는 그 질문에 답할 말도 준비해 둔 상태였다.
"길더스텐 님을 경건하게 모시지만, 재정난으로 길더스텐 님을 모시는 성스러운 집을 잃어버릴 위기를 겪고 있는 형제자매를 돕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숨을 쉬듯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일인데, 어찌 같은 형제자매가 이를 비난하고 불만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원 사이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하물며 그것이 다 망해가기 직전인 수도원에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것이라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라 생각하지, 굳이 견제할 이유까지 찾아가며 집요하게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내 대답에 리피샤 수녀원장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에일라 자매의 말처럼 우리가 다 무너져가는 수도원 하나를 돕는다고 두 수도회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은 적죠."
"예. 길더스텐 님도 그 누구도 가장 필요한 때에 도움을 주는 이는 이를 잊지 못하니 배고픈 이에게는 빵을, 목마른 이에게는 물을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길더스텐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형제자매를 도우려는 에일라 자매의 마음에 길더스텐 님도 흡족해하시겠죠."
능청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나와 리피샤 수녀원장이었지만, 그 대화에 담긴 내막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수도에 가 있었던 동안, 리피샤 수녀원장은 문제를 일으킨 수습 수녀들을 다른 수녀원으로 내보내면서, 그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휘하의 정식 수녀들 역시 딸려 보냈다.
문제를 일으킨 수습 수녀들이 가는 곳이다 보니, 문제아들이 보내진 수녀원의 형편은 모자라다 못해 폐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리피샤 수녀원장은 군식구가 는다며 난감해하는 수녀원에 지원금까지 건네주며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았다.
거기에 수도에서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그래놀라의 독점 납품권이라는 당근까지 눈앞에 흔든다면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릎을 꿇고 자신들에게도 기회를 나눠달라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들은 이미 그물에 걸린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역시 난 리피샤 수녀원장을 따라가려면 멀었어.'
[동감이에요. 역시 리피샤 수녀원장님은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에요.]
나와 에일라는 그 악랄한 수법에 혀를 내둘렀지만, 리피샤 수녀원장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한 잔 홀짝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까먹을 뻔했군요. 에일라 자매의 금의환향을 축하하려고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준비했어요."
"파티…말입니까?"
찬 바람이 쌩쌩 불었던 탓에 잔뜩 위축되었던 첫 만남에서, 지금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리피샤 수녀원장은 쉽사리 간파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놀라라는 선물을 안겨줬다지만, 고작 그걸로 리피샤 수녀원장의 마음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인데 나를 위해 '파티'를 준비했다니.
그 '파티'라는 것에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요. 파티. 게다가 에일라 자매를 무척이나 '존경'하는 귀여운 후배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세요. 모두 에일라 자매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괜히 불안감만 주는 정보를 하나 던져줬으면서, 어서 나가 보라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축객령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로 내가 수녀원에서 사용하던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세이사가 있으니까 내게 마냥 나쁜 일은 아니겠지.
*
[시후, 천적을 만나 버렸네요.]
"……."
방에 도착한 나는 에일라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서 와요! 성격도 눈매도 나쁜 에일라 언니! 늦었네요!"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