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순례길을 향해서 (5)
* * *
"…세이사, 어째서 엘리가 수녀원에 있는 거죠?"
고개를 돌려 세이사를 돌아보니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이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네티 마을에 있어야 할 엘리가 어째서 수녀원에 와 있는가.
그 이유야 금방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마, 편지에서 수녀원에 새로 들어왔다던 자매가…."
수도 리아트에 있었을 때 세이사가 보냈던 편지.
사실, 거기에서 세이사가 언급했던 '새로 들어온 자매'라는 부분에서 복선은 이미 깔려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새로 들어온 자매'에 엘리가 포함되어 있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었기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평범한 마을 소녀였던 엘리가 수도녀가 되는 선택을 한단 말인가.
'대체 왜?'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평생을 기도와 노동의 무한한 순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수도녀의 생활은 어설픈 각오로는 버텨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다른 남성 사제처럼 교단에서 추기경이나 대주교 같은 높은 직위에 오를 기회가 있느냐 하면, 성녀라는 교황에 비견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외했을 때, 기껏해야 수녀원장의 자리에 올라 수녀원을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수도녀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그런데도 수도녀가 되기로 결심하는 경우는 보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말 그대로 신실한 신앙심의 발로로 평생을 길더스텐을 모시는 데 헌신하려는 경우.
'아니, 이건 아니지. 여전히 저렇게 성격이 개차반인 꼬마가 그럴 리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인 동시에 가장 보기 드문 경우다.
엘리가 갑자기 길더스텐 님의 계시라도 받은 것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경우니 이 경우는 당연히 제외였다.
둘째, 에일라처럼 정치적인 암투에 엮이거나 기타 여러 이유로 가문에서 강제로 출가시킨 경우.
'아니 이것도 아니야. 멀쩡히 시네티 마을에서 제유소 지기를 하는 엘리네 가족이 무슨 이유로 엘리를 고생 확정인 수녀원으로 보내겠어.'
애초에 엘리가 정치적 암투에 엮일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닌데다가, 저런 제멋대로인 성격이 아직도 교정되지 않았을 정도니, 엘리는 집에서 사랑을 넘치다 못해 과도하게 받았음이 분명했다.
그런 집에서 왜 귀하디귀한 딸을 수녀원으로 보내겠는가. 이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귀족이나 어지간히 부유한 상인이 아닌 이상 받기도 어렵고, 여성이라면 더더욱 받기 어려운 고급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방법으로 수녀원의 문을 스스로 두드리는 경우.
'그나마 이게 가능성이 큰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았다.
'엘리가 그럴 정도로 학구적인 인물이었나?' 하는 의문은 물론이고, 엘리가 시네티 마을에서의 생활에 딱히 불만을 품거나, 학문에 관심이 있었다는 조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에일라는 혹시 떠오르는 이유가 있어?'
결국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에일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 대충 짐작이 가지만 시후에게 알려주진 않을 거예요.]
'뭐? 잠깐만!'
하지만 어째서인지 비협조적인 에일라의 대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거예요. 그게 싫다면 세이사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겠죠.]
'아니, 어째서? 힌트라도 좀 줘!'
내게 대꾸하는 에일라의 말본새에서 엘리가 수녀원으로 출가할 이유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나는 에일라에게 매달렸고, 에일라는 묘하게 한심하다는 기색을 팍팍 풍기면서 한숨과 함께 힌트라도 달라는 내 말에 답했다.
[두 번째로 시네티 마을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잘 기억해 보세요.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예요.]
'…시네티 마을?'
나는 에일라가 마지못해 건네준 힌트를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레이첼 수녀님과 마을을 방문했고, 입구에서 엘리를 만났었지. 그리고 마르셀 이단심문관님을 만나서 신성력을 증명하기 위해 성수를 만들었고….'
아, 여기인가.
시네티 마을에 찾아왔던 이단심문관들은 물론이고, 구경거리 삼아 찾아왔던 시네티 마을 사람들도 경악했던 그 사건.
거기에서 엘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더라?
"에일라 언니!"
그래, 그렇게 에일라의 이름을 부르면서…어라?
정신을 차려보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엘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엘리."
또 사람을 앞에 두고 생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엘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에일라 언니는 무슨 인사 하나 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려요? 전 에일라 언니 보려고 수녀원까지 왔는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엘리는 마치 개구리처럼 볼에 바람을 잔뜩 넣어 부풀리는 것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미안해요."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나를 보러 수도녀가 되었다는 엘리의 말에 조목조목 논리를 따져서 반박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직 꼬맹이에 불과한 엘리와 내가 설전을 벌이는 것은 너무나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탓에 일단 사과부터 건넸다.
"드디어 에일라 언니가 온다고 이것저것 준비했는데…흥이에요!"
그러나 내 사과에도 여전히 삐진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던 엘리가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나는 비로소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 위에 차려진 조촐한 만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친 식감에 시큼한 맛이 도는 호밀빵이 아니라 밀가루를 사용해 구워낸 동그란 빵과 그래놀라, 거기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까지.
고작 그것에 만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거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겠지만, 거친 흑빵과 물, 건더기가 적고 묽은 수프 따위로 식사를 검소하게 해결하는 것이 일상인 수도녀의 한 끼 식사와 비교하면 참으로 사치스러운 구성이었다.
저런 만찬을 차리기 위해 드는 비용은 리피샤 수녀원장이 지원해줬겠지만,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면 저것을 준비한 것은 오롯이 세이사와 엘리의 힘으로 준비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거 내가 나쁜 놈인 거야?'
[정답이에요. 시후.]
갑자기 몰려오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고 패닉에 빠진 나와 얄밉게도 맞장구치며 끼어드는 에일라.
아마 에일라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면 쿡쿡거리며 웃는 무척이나 얄미운 웃음이 아니었을까.
"하하하…엘리, 에일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이제 용서해주자."
"흥…몰라요. 에일라 언니는 빵이나 먹고 목이나 콱 막혀버리라지."
아무튼,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려는 조짐을 감지한 세이사가 중재한 덕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어색한 공기는 빠르게 흩어졌다.
"…고마워요. 세이사. 엘리도 미안해요."
"아니야. 에일라도 수도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 엘리도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고."
역시 오랜만에 봐도 세이사는 세이사였다.
찾아가기만 하면 언제나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서 세이사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기왕 이렇게 만찬을 차린 김에, 같이 돌아온 다른 사람들도 같이…."
그렇게 긴장이 풀린 내가 세이사를 향해 웃으며 티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부를 것을 제안하려던 순간.
─달카닥
"으아악! 이렇게 밀면 문이 못 버티지 말임다!"
"꺄아악!"
"아악!"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세 명의 얼간이가 나란히 포개진 채로 방 안에 고꾸라졌다.
*
"…분명 숙소로 가 있으라고 했는데, 왜 여기까지 온 건가요."
"에일라 님, 저는 억울함다. 티아 자매가 에일라 님의 방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가 보자고 먼저 제안해서 따라온 검다."
내 추궁에 칼린은 연신 억울함을 피력하며 티아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루피아 사제님은?"
"아하하하…. 저도 칼린 기사님과 같은 이유로 호기심에…."
루피아 역시 칼린과 같은 이유를 대며 이번 사건의 원인이 티아에게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티아?"
"……."
그러나 정작 이번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티아는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하아, 좋아요. 말하기 싫으면 싫은 이유가 있겠죠. 어차피 부를 생각이었으니 어서 앉아요."
결국 나는 티아를 추궁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축하해. 에일라. 이제 진짜로 성녀 후보가 되었네."
여섯 명이나 되는 제법 많은 인원이 조그마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테이블 위에 차려진 빵을 하나씩 집어 들자, 세이사가 가장 먼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왔다.
"세이사 덕분이에요. 세이사가 없었으면 저도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겸양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시네티 마을에서 세이사를 지키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렇게 무리해서 기적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결국 마수를 조종하던 악마에게 시네티 마을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나든, 세이사든, 티아든, 엘리든, 지금 이렇게 테이블에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두 악마와 악마가 이끌던 마수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을 테니까.
"에일라 언니! 같이 고생했는데 왜 저는 쏙 빼는 건가요!"
그러자 엘리가 내 대답을 듣고 불쑥 손을 들며 자신의 지분을 주장했다.
"…그래요. 엘리도 사람들에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리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그러고 보니 엘리는 어쩌다가 수도녀라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하게 되었나요?"
간단히 무시해도 되는 엘리의 주장이었지만, 조금 전의 일로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엘리가 수녀원에 들어온 이유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엘리의 주장을 인정하고, 어째서 엘리가 수녀원에 들어오기로 결심했는지 물었다.
"그야 에일라 언니 때문이죠! 마을에 쳐들어온 아주 나쁜 악마를 반짝반짝 빛나는 창으로 꿰뚫어서 쓰러뜨리고, 이단심문관 언니나 아저씨들도 다 놀라게 할 만큼 대단한 에일라 언니 곁에 붙어 다니면 제 옆에도 떨어지는 게 있지 않겠어요?"
"……."
너무 영악한 대답이라, 나를 포함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우와…저보다 솔직하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사람은 처음 봄다."
"…역시 아이라 그런지 솔직하네요."
칼린이 기가 찬다는 듯이 한마디 했고, 루피아가 거기에 한마디를 더 얹었다.
"…농담이었어요. 농담! 사실은 에일라 언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런 거라구요!"
모두가 엘리의 대답을 듣고 정색하자, 엘리는 설마 그 말을 진지하게 믿었냐며 한심하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진짜 목적을 밝혔다.
"에일라 언니는 성녀 후보니까 순례길을 찾아갈 생각이죠? 그 길에 저도 같이 데려가 줘요."
그러나 엘리의 진짜 목적은 조금 전의 대답보다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엘리가 순례길은 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