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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50화 (50/80)

〈 50화 〉 순례길을 향해서 (6)

* * *

"하아."

결국, 엘리의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환영회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고, 나는 모두가 빠져나가 나 홀로 남은 방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엘리의 요구에 어이없어하며 할 말을 잃은 상황에서, 세이사가 에일라는 오래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테니 잠시 쉬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자고 하지 않았다면, 엘리의 성격상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며 난리를 피울 상황이었으니, 세이사의 제안은 더없이 적절한 대처였다고 할 수 있었다.

'순례길과 엘리. 도저히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조합인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가만히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어째서 엘리가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이것이라는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에일라, 어떻게 생각해? 정말 단순한 장난일까?'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에일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단 엘리가 시후에게 호감을 느껴서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아마 엘리라는 아이가 시후에게 호감이 없었다면 이런 황당한 부탁은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에일라는 우선, 엘리가 나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런 부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짚어주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 역시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엘리가 자신을 순례길에 데려가 달라며 부탁하던 때, 엘리의 눈동자와 말투에선 평소의 장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엘리는 대체 왜 내가 좋다고 달려드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엘리에게 품은 감정은 성가신 여동생을 돌보는 오빠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성가심, 딱 그 정도였는데, 대체 내 태도의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그만한 신뢰를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제가 봤을 때는 시후가 시네티 마을을 구하고 쓰러졌을 때부터라고 생각하는데요.]

'어차피 마을에 악마와 마수들이 들이닥치면 모두 죽을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고작 그런 일로?'

시네티 마을에서 악마를 쓰러뜨렸던 일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그나마도 세이사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이유가 없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마수에 맞서기보다는 시네티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불손한 마음가짐으로 행했던 일로 과분한 호의를 받는 것은 역시 낯부끄럽고 난감한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시후는 엄청 성가신 성격이네요.]

'남이사.'

내 생각을 읽은 에일라가 기가 찬다는 말투로 한마디 쏘아붙였지만, 나는 철면피를 쓰고 뻔뻔하게 받아넘겼다.

[그래서, 시후는 어쩔 생각인가요? 엘리의 부탁을 받아들일 건가요?]

'글쎄…아예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지만….'

엘리를 데리고 순례길로 떠나는 것은 리피샤 수녀원장의 허락만 받는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그래놀라'라는 새로이 돈이 될 수단과 영향력을 키울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빚을 지워둔 상태.

내가 직접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부탁한다면 리피샤 수녀원장은 이것에 가격을 매겨서 내가 지웠던 빚을 조금 덜어내기야 하겠지만,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순례길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굳이 내가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수도에서 클라우디아가 보여주었던 지도에 따르면 북부에 존재하는 순례길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성인 바데니드가 길더스텐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북부에 전파했을 때 이동했던 행적을 따라가는 '성 바데니드의 길'.

둘은 성녀 그라나가 거세게 몰아치는 북부의 눈보라 속에 고립되었던 수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한 달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눈보라에 희생당한 사람 하나 없이 무사히 귀환하는 이적을 일으킨 여정을 따라가는 '성 그라나의 길'.

마지막으로 키니아 제국의 북부가 악마들에게 침공당했을 때 용맹을 떨쳤던, 여러 성기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얼어붙은 수호자들의 길'까지.

거기에다 북부에 존재하는 여러 성지를 잇는 자잘한 순례길까지 더하면, 엘리가 찾아가려는 순례길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건 역시 엘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 역시 이건 엘리에게 나중에 물어보고 결정할까.'

엘리가 찾아가려는 순례길이 너무 멀거나 돌아보는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순례길이라면 곤란했다.

아가드의 사제들이 언제쯤 수도 리아트에서의 회담을 끝내고 수녀원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데다, 순례길을 방문하는 일정이 늘어져서 그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내 평판은 물론이고, 길더스텐 교단과 아가드 교단 사이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으니까.

─똑똑

그리고 그렇게 엘리에 관한 고민을 마음 한쪽에 접어두려는 순간.

"에일라,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어?"

세이사가 방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아왔다.

*

"코니엘 신부님의 편지…라고요?"

세이사가 가져온 것은 슬슬 그 이름을 잊어가던 시네티 마을의 신부, 코니엘 신부의 편지였다.

"응, 엘리가 우리 수녀원에 들어오는 것을 추천해 주신 분이 코니엘 신부님이시거든."

세이사가 밝힌 사실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를 수녀원으로 보낸 원흉이 드디어 밝혀졌지만, '어째서?'라는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코니엘 신부가 엘리를 수녀원에 출가시켜서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인지에 관한 해답은 분명, 이 편지에 담겨 있을 터.

"그…에일라.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엘리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줘."

"…세이사, 그게 무슨 말이죠?"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코니엘 신부가 보낸 편지를 뜯어보고 싶었지만, 세이사의 뜬금없는 당부에 나는 코니엘 신부가 보낸 편지의 봉인을 뜯으려던 손을 멈추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세이사를 바라보았다.

"아, 에일라는 몰랐던 모양이구나."

"그러니까 뭐가 말인가요?"

당연히 나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다는 세이사의 말투에,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놓친 게 있었던가?'

필사적으로 엘리와 관련된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이것이라고 할 기억은 없었다.

"사실, 엘리는 시네티 마을 사람들이 피해 다니던 아이야."

"네, 제유소지기의 딸이라 마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죠."

시네티 마을에서 엘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가 대답하자, 세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아니야. 시네티 마을 사람들이 엘리를 피해 다닌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시네티 마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며 '리나'라는 아이와 이야기한다는 엘리를 불길하게 여기고 피해 다녔거든."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시네티 마을에서 엘리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네티 마을을 두 번 방문하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 방문했던 때가 첫 번째는 축제가 한창이었던 때였고, 두 번째는 이단심문관의 조사가 있던 때라 평소와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도 있겠지만.

"…하지만 엘리는 분명 에단 촌장님의 딸인 리나와 친구라고…."

"에일라, 리나는 에단 촌장님이 오래전, 시네티 마을의 촌장이 되기 전에 잃어버린 딸의 이름이야."

'에일라, 이건….'

[…확신할 순 없지만,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요.]

이미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까지 나눈다는 엘리, 이미 목숨을 잃었던 에일라의 몸에 깃들어 깨어난 나.

무언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일라? 괜찮아?"

에일라와 의견을 교환하고 보니, 갑자기 표정을 굳힌 나를 세이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세이사. 계속해주세요."

"그래서 에단 촌장님이 코니엘 신부님에게 엘리를 맡겼었는데, 코니엘 신부님은 엘리가 악령이나 악마에 씌인 것은 아니라면서, 엘리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두둔해 주셨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어서, 엘리는 또래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데."

"다시 말해, 세이사의 말은 차라리 수녀원으로 온 것이 엘리에겐 더 나은 일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세이사에게 설명을 들은 나는 그렇게 답하며, 손에 쥔 코니엘 신부의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코니엘 신부는 엘리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알았어요. 나중에 엘리한테 수도에서 사 온 과자라도 조금 나눠주면 되겠죠."

"응, 에일라라면 그렇게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다행이라며 활짝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세이사.

그 너무나도 눈부신 모습을 행여 눈이라도 멀어버릴까 싶어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나는 조심스럽게 코니엘 신부가 보낸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에게

반갑습니다. 이렇게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도 오랜만이로군요.

성녀 후보로서의 일에 매진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은 알고 있지만, 에일라 성녀 후보님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이렇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세이사 자매에게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리는 시네티 마을에서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꺼림칙하게 여겨지던 아이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 혹시 '시커'라 불리는 힘을 알고 있습니까? 교단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극히 소수의 사제는 길더스텐 님의 은총인지, 신성력을 오감으로 느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시력, 다시 말해 눈으로 신성력을 느낄 수 있는 '시커'입니다. 덕분에 에일라 성녀 후보님이 절대 평범한 수녀로 일생을 마칠 분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에일라 성녀 후보님을 보고 바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엘리 양 역시 악령에 씌이거나 사특한 악마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성령 혹은 무언가 신성한 이끌림에 인도를 받은 아이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부디 에일라 성녀 후보님께선 엘리 양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고, 엘리 양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분명 에일라 성녀 후보님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덧 시네티 마을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군요. 그럼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의 여정에 길더스텐 님의 무한한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코니엘 신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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