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순례길을 향해서 (7)
* * *
"에일라, 수녀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겠어?"
코니엘 신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엘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이후, 순례길로 떠날 준비를 서두르는 나를 향해 세이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이사, 걱정하는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전 괜찮아요."
나를 걱정해주는 세이사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지금 내게는 잠깐의 여유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수도에서 나와 셀린 엘리어드 영애, 티아를 노리고 모습을 드러낸,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인물.
그 사건이 끝나고 이단심문소에서 성녀 후보를 습격한 이의 배후를 필사적으로 추적했지만, 안타깝게도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인물에 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마치 새벽에 짙게 안개가 피어올랐다가 해가 뜨면 그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어디서 들고 어디서 난 것인지 조그마한 단서조차 남기지 않은 그 인물의 정체에 관해서는 악마일 것이라느니, 악마의 힘을 받은 이단자일 것이라느니 하는 여러 의견이 나오며 교단 내에서 시끄럽게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논쟁은 교단 내부에 깊게 뿌리를 내린 알력 다툼을 보여주듯, 이게 과연 성직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맞는지 의심이 들 만큼 상스럽고 거친 말다툼만 벌어졌을 뿐, 실질적인 대책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채 성녀 후보들을 호위할 인원을 더 늘리겠다는 고식지계에 그치고 말았다.
그 덕분에 나는 교단에만 의지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존재함을 절실하게 체감했다.
─달칵
"에, 에일라? 이건…."
세이사는 내가 조그마한 나무상자 안에서 꺼내든 물건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맞아요. 권총이에요. 세이사. 저나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면 이런 물건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세이사의 말마따나 내가 나무상자에서 꺼낸 것은 권총이었다.
교단이나 다른 세력에 온전히 의지해서는 자신과 주변의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수도 리아트에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뭐, 권총이라고 해도 현대의 권총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전장식에 치륜식으로 작동하는 권총에 불과했지만, 사수가 불씨를 소지해야 하는 등 여러모로 사용과 휴대가 불편한 화승식 권총이 아닌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물론 치륜식 총의 단점인 복잡한 구조에서 비롯되는 비싼 단가와 잦은 고장은 어쩔 수 없었지만,그래도 그 문제는 달콤함과 바삭함을 겸비하며, 건강에도 좋다고 수도의 귀족들에게 어필한 '그래놀라'라는 신상품의 성공으로 오스라드 상단의 후계자로 당당히 복귀한 아이셀에게서 받아낸 두둑한 금화와 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잡설이 길었다.
요컨대, 나는 내 몸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지킬 호신용 무기로 권총을 선택했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기적은 조금만 신성력 소모가 심한 기적을 사용해도 기절해 버리는 단점 때문에 이것으로 상황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하기 어렵고, 검이니 메이스니, 활이니 하는 냉병기는 기사나 성기사를 지망하는 이들처럼 매일 같이 수련을 해도 숙련되는데 몇 년이 넘게 걸리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도에서 한 번 상대했던 악마 같은 존재에도 납탄이 먹힐지는 의문이었지만, 총기라는 무기를 다뤄보기도 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한 번 쓰면 탈진해 버리는 결함투성이의 기적보다는 이런 권총이나마 있는 것이 마음이 든든했다.
"…세이사?"
꽂을대로 총구를 찔러 총열에 탄환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격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톱니바퀴를 스패너로 감아서 시범적으로 방아쇠를 당겨보는 등, 권총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행여나 기능 고장이라도 발생할세라 권총을 조심스럽게 나무상자 안에 다시 집어넣고 세이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괜찮은 거 맞지? 아무리 그래도 순례길에 권총을 휴대하는 건…."
세이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아마도 내가 따로 무기를 휴대해야 할 만큼 위험한 길에 나선다며 걱정하는 마음에서 지은 표정이리라.
"걱정할 것 없어요. 저는 절대 섣부르게 위험에 머리를 들이밀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건 그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보험이라고 할까요."
이대로 두면 세이사의 성격상 계속 걱정할 것이 분명했고, 나 역시 굳이 세이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걱정할 것 없다며 웃어 보였다.
"…알았어. 에일라. 나도 힘낼 테니까!"
그런 내 모습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무언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사.
"…그럼 대충 짐도 다 정리가 끝났으니 다른 분들을 데리러 가죠."
뭐 세이사가 티아도 아니고, 괜히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 순례길에 동행한다고 큰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나중에 후회할 안일한 생각을 하며, 나는 세이사와 함께 짐 정리를 마친 뒤, 순례길에 동행할 동료들을 찾아갔다.
*
"성 그라나의 길로 성지순례를 떠나신다고요? 아이고 수녀님들,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괜히 그랬다가 몸만 상하십니다."
리피샤 수녀원장이 비용을 대서 새로이 고용한 북부 출신의 마부는 성 그라나의 길을 방문한다는 내 대답에 난색을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기는 춥기로 유명해서, 해빙기에도 땅이 안 녹습니다. 덕분에 마차가 다니는 데 문제는 없지만, 워낙 사람이 적은 북부라지만 그 일대는 사람도 마을도 드물어서 드문드문 있는 수도원 말고는 쉴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심지어 먹을 게 없어 굶주린 짐승들이 심심치 않게 들판을 어슬렁거리기까지 하죠. 그런데도 꼭 거기로 성지순례를 떠나셔야 하겠습니까?"
길이 험난하다는 사실을 사실보다 더 부풀려서 안전비 명목으로 품삯을 더 받아내려는 마부의 속셈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마부가 언급한 '성 그라나의 길'에 붙은 악명만큼은 사실이었다.
다른 순례길에 비하면 거리는 확연히 짧지만, 그에 반비례하는 혹독함으로 인해 미리 준비를 단단히 해두거나, 그나마 매서운 북부의 추위가 누그러지는 여름을 택해 방문하는 것을 추천할 정도였으니까.
"정말 그 순례길이 아니면 안 되는 검까?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는 검까?"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일행 중에서 체력이라면 가장 자신이 있을 사람인 칼린조차 왜 일부러 가장 험난한 순례길을 골랐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이미 제 마음은 정해졌어요. 인제 와서 무를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다른 순례길이 여럿 있음에도 내가 굳이 '성 그라나의 길'을 택한 이유야말로 그런 험한 환경과 다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환경 때문이었다.
어차피 보는 눈이 많았던 수도 리아트에서도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사건을 일으키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어차피 나와 티아가 그들의 목표로 노려지고 있는 이상, 그들과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고 괜히 안전을 기한답시고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서 다니다 영문도 모르고 사건에 휘말리는 희생자를 양산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불어, 놈들이 손을 쓰더라도 군중이라는 가림막 뒤에 숨어서 은밀하게 암수를 뻗치는 것보다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당당히(?) 습격을 감행하는 쪽이 이쪽에서 알아차리고 대응하기 쉽다는 이유도 있었다.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눈과 얼음의 땅으로 갈 예정이기도 하니까요. 미리 적응 기간을 가진다고 생각해 주세요."
거기에다 수도 리아트에서의 회담 결과가 나와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우리 길더스텐 교단이 아가드 교단의 지원요청을 수락할 경우, 수녀원에 오기 전에 신관과 약속했던 대로 나는 이보다 더 춥고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눈과 얼음의 땅'으로 떠나야 할 테니, 이참에 미리 추위에 적응하는 셈 치기로 했다.
"알았어. 에일라. 힘내자!"
"알겠슴다! 호위는 제가 책임지겠슴다!"
"알았어. 후우…역시 이번에도 고생길이 열렸네…."
차례대로 세이사, 칼린, 티아의 대답이 들려왔고, 길더스텐을 모시는 이들의 순례길에 대한 호기심에 우리와 동행하기로 한 루피아 사제 역시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마지막 확인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엘리,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정말 제가 정한 순례길을 그대로 따라올 생각인가요? 생각이 바뀌었다면 다른 순례길을 골라도 좋아요."
"네! 저는 에일라 언니가 고른 길을 따라갈 거예요!"
내가 마지막 기회라며 물은 질문에 엘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이번 순례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 할 수 있는 엘리는 어떤 순례길을 택해도 좋다며 내게 공을 넘겼고, 나는 이것저것 비교해 보면서 고민한 끝에 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성 그라나의 길'을 택했다.
일부러 심술을 부려 힘든 길을 골랐다고 불평할 법도 한데,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의 행동에는 무언가 확신이 담겨 있었다.
'…부담스러워.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엘리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지만, 엘리가 이 비밀을 내게 스스로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이상, 이는 차차 시간을 들여서 풀어나갈 문제였다.
'성녀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칠요의 성석'을 빛내는 것에, 나와 티아 등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비밀결사가 품은 목적과 정체를 밝혀내는 것만 해도 벅찬데 또 과제가 늘어나는구나.'
줄어들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만 하는 과제에 두통이 밀려올 지경이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엘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출발하죠. 이건 위험하니 추가로 드리는 품삯이라 생각하고 받아두세요."
그리고 여전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부에게 적당히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하나 건넸다.
"이, 이건…! 하아…알겠습니다. '성 그라나의 길'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내가 건넨 주머니를 슬쩍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마부는 언제 자신이 부정적인 의견을 냈냐는 듯, '어서 오십쇼! 손님!'의 상태가 되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닌가 생각해보라고 했었던가…. 여기도 다를 건 없었네.'
마부의 재빠른 태세 전환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나는 한국에서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었던 격언(?)을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 수녀님들! 어서 타시지요! 어떤 마부보다도 편안하고 신속하게 순례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부디."
이제는 허세까지 부려가며 마부가 우리를 재촉했고, 나는 그 허세에 짧게 대답하며 마차에 올랐다.
─부디, 이 순례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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