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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52화 (52/80)

〈 52화 〉 성 그라나의 길

* * *

─타앙!

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총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여전히 갈 길이 멀군요."

흑색화약 특유의 짙고 새하얀 연기가 걷히기를 기다린 이후, 목표물을 확인한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표적지로 삼아 바위 위에 세워놓았던 나무판자는 총알에 관통되어 구멍이 나기는커녕, 조그만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로 바위 위에 당당히 서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팔힘이 너무 약해서 쏠 때 반동 제어도 제대로 되지 않는 데다, 거리가 벌어지니 총알이 제멋대로 날아가네.'

욕심을 부려 10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시험 사격을 해 봤지만, 역시 어림도 없었다.

현대에서도 권총을 10m 거리에서 조밀한 탄착군을 형성할 정도로 쏠 수 있으면 명사수로 취급할 정도인데, 그보다 기술력과 명중률이 떨어지는 치륜식 권총으로 그만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전생에서 국가대표 사격 선수가 되었지,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 거리를 줄이는 게 좋겠어요."

처음이라 욕심을 부려봤지만, 어림도 없는 모습에 쓸데없는 자존심은 버리기로 한 나는 이번에는 거리를 아예 반으로 줄여 5m쯤 되는 거리에서 사격해 보기로 했다.

"……."

앞으로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아까 전보다 가까워진 표적을 노려보았다.

어림도 없다는 듯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던 나무판자가 마치 나를 약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자.'

그렇지만 성질대로 막 쏠 수는 없는 일.

아까운 화약과 탄환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준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잠시 호흡을 멈췄다.

조금 전 사격에선 에일라의 팔힘이 약해 한 손으로는 반동을 충분히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양손으로 권총을 꽉 붙잡아 쏘는 것으로 파지법도 바꾼 상태니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타앙!

그런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탄환이 나무판자의 정중앙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에일라 님! 명중임다! 완전 명사수지 말임다!"

"역시 에일라 언니에요! 대단해요!"

표적으로 삼은 나무판자로 빠르게 달려간 칼린이 정중앙에 동그란 구멍이 생긴 나무판자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고, 이에 질세라 엘리 역시 호들갑을 떨어댔다.

"천둥소리를 내면서 벼락처럼 목표를 관통하는 무기…. 대단하네요."

한편, 루피아는 권총을 처음 보는 것인지 강렬한 격발음과 단단한 나무판자를 간단히 관통한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모습이었다.

"괜찮아? 팔이 아프지는 않고?"

"…괜찮은 거지? 허약해서 팔힘도 별로 없으면서 무리하기는."

그리고 세이사와 티아.

이 둘은 처음 사격에서 반동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총을 떨어뜨릴 뻔했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는 걱정스럽게 괜찮은지 물어왔다.

'티아는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세이사야 원래부터 에일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지극정성으로 살피던 것이 익숙해져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티아는 아니었다.

내 기준에서 티아와의 첫 만남은 내 뺨을 후려쳐서 균형을 잃고 두엄더미에 처박히게 만든 것이었고, 이후로도 나를 경계하면 경계했지, 내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수도에 다녀온 이후부터 성격이 좀 바뀐 것 같은데.'

그나마 짚이는 것이라면 수도 리아트에서 티아가 납치당한 것을 이단심문관들의 도움을 받아 구출한 것과 엘리어드 저택에서 수수께끼의 가면을 쓴 인물이 '뤼네의 꿈'에 노출된 사람의 악마화를 유발하는 사술을 사용해서 티아가 악마화할뻔한 것을 구해준 것이었다.

'그래도 그 일들은 내가 직접 도와준 건 아니지 않나?'

이단심문관들이 납치된 티아를 구출해 올 때까지 나는 시험 삼아 치유의 기적을 사용한 대가로 신성력이 떨어져 탈진해 있었고, 엘리어드 저택에서 저주로 인해 악마화가 진행되고 있던 티아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악마화를 억제해준 것은 칼린이 한 일이었다.

[하아….]

좀처럼 해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내가 답답했는지, 에일라가 짧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정답을 알려줄 것도 아니면서.'

매번 답답하다며 내게 쓴소리를 하는 에일라였지만, 정작 내가 왜 그러는 거냐며 물어봐도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한숨만 쉬어대니 나로서도 답답함을 풀 길이 없었다.

"괜찮아요. 고작 이런 일로 쓰러질 만큼 허약하진 않아요."

아무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내 반응은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

"……."

그러나 내 대답에 침묵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세이사와 티아의 행동에서는 '대체 무슨 허세를 부리는 거냐?'는 생각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런가. 이미 이 둘에게 내 이미지는 개복치인 건가.

내가 아무리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 몸을 좀 험하게 굴리기는 했다지만, 너무한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래도 고작해야 권총을 두 발 사격한 것뿐인데, 세이사와 티아가 보내오는 걱정은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에일라는 언제나 픽픽 쓰러지니까."

내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티아가 불쑥 한마디를 꺼냈다.

"아하하…에일라는 몸이 허약해서 그런 일이 자주 있었지."

그러자 이에 질세라 세이사 역시 티아의 말을 거들며 티아와 눈빛을 교환했다.

"아니, 저는 그 정도로 허약하진…."

나는 세이사와 티아가 교환한 눈빛에서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고 항변했지만, 이미 둘은 내 항변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허약한 체질을 개선하는 데에는."

"북부의 온천이 제격이라고 들었어."

길더스텐 님 맙소사, 이제 세이사와 티아는 서로 합을 맞추기까지 하며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나는 저 둘에 의해서 어디로 끌려가는 거지?

"피루스 씨, 다음 행선지가 어디라고 하셨죠?"

"아, 그야 당연히 수녀님들이 부탁하셨던 대로 온천으로 유명한 세브림 마을입죠!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루, 루베릭 수도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세이사의 질문에 무척이나 능청스럽게 답하는 마부의 모습에, 나는 당했다는 생각에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출발할 때 팁까지 얹어줬는데, 감히 주인을 배신한 마부, 피루스에 대한 배신감은 둘째치고, 언제부터 세이사와 티아가 이 일을 꾸몄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뭐 내막이야 어찌 되었건, 이번에 세이사와 티아가 계획한 음모(?)는 나를 위한 배려가 담긴 것이 맞았다.

옆에서 기적만 썼다 하면 매달린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픽픽 쓰러지고, 근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여자의 몸이어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을 낑낑대며 따라가는 에일라가 영 미덥지 않았겠지.

"그, 그래도 온천은 좀…."

그래도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것과 내가 곤란한 것은 별개였다.

그…일단 온천이면 몸을 씻고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는 곳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정신적으로는 남자일지언정, 몸은 에일라의 것이니 생물학적으로는 여자인 상태였다

'여태껏 잘 피해왔는데!'

나 혼자 온천에 들어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칼린에 루피아, 엘린까지, 이렇게 일행을 여럿 데리고 가는데 혼자 온천에 들어갈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완전히 당했네요. 시후.]

아무래도 전생에서부터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다른 여성의 알몸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목욕은 혼자서 고양이 세수하듯 해치우거나, 아무도 없을 시간만 골라 도둑질하듯 해왔던 나로서는 진퇴양난, 그야말로 외통수였다.

"에일라는 수녀원에서도 여유롭게 쉬질 못했잖아? 이참에 푹 쉬었다 가자."

그러나 은근슬쩍 내 팔을 붙잡으며 활짝 웃어 보이는 세이사의 모습에 내 입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대답을 내놓는 대신, 최악의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네."

그 대답은 세이사와 티아에게 하는 항복 선언과 다를바 없었다.

*

시간을 되돌려서, 성 그라나의 길로 출발하기 이전의 수녀원.

"세이사 밀턴."

"티아? 무슨 일이야?"

티아 이글라스가 홀로 세이사 밀턴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세이사는 놀란 표정으로 티아를 맞이했다.

따지고 보면 접점이라고는 둘 모두 같은 수녀원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도 비슷한 점이 없었다.

우선 수녀원 생활부터, 세이사는 처음 수녀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모범적인 수도생활로 리피샤 수녀원장을 비롯하여 수습 수녀들을 관리하는 정식 수녀들의 예쁨을 받는 아이였다.

반면, 티아는 원치도 않았던 수도생활을 제대로 할 생각이 없었던 탓에 비슷한 처지였던 다른 귀족 영애 출신 수습 수녀들과 어울려 다니며, 미꾸라지처럼 수녀원의 일과를 땡땡이치면서 수녀원을 벗어날 계획을 세우는 등, 불량 수녀라는 말에 부합하는 생활을 해 왔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이셀의 꾐에 넘어가 에일라에게 위해를 가했던 티아와 언제나 헌신적으로 에일라를 옆에서 돌보았던 세이사의 사이에는 서로 친해지기에는 너무나도 큰 골이 있었다.

"그, 그게…."

티아 역시 이런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 티아는 세이사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하며 한동안 입을 우물거렸다.

"에, 에일라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

"에일라에 관해서? 티아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간신히 티아가 꺼낸 말에 세이사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수도에서 원치 않게 들은 이야기긴 하지만, 에일라가 너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아…."

세이사는 티아의 설명에 상황을 이해했다는듯 짧게 신음을 흘렸다.

딱히 숨기고 싶다거나 숨겨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밝히자니 자연스럽게 에일라가 얼마나 대단하고 착한 사람인지 이야기하게 되는 쑥스러운 이야기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주정뱅이는 결국 작위를 몰수당하고 나는 그 주정뱅이에게서 해방되어 여기 수녀원으로 오게 된 거야."

반가움이 지나쳤던 탓일까.

세이사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여태껏 참아왔던 에일라에 관한 이야기를 모조리 티아에게 쏟아냈다.

"…길어!"

그렇게 세이사의 이야기가 끝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대략 2시간.

티아의 태클은 정당한 것이었다.

"하아, 이제야 알겠어. 네가 어째서 에일라를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옆에 붙어 다녔는지. 역시 에일라는 대단하네."

"그렇지? 에일라가 얼마나…."

지금 세이사는 에일라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친절하고 착한 아이인지 말하지 못해 안달이 난 열성팬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끼리는 쉽게 친해지는 법.

티아의 이야기에 세이사가 느낀 감정은 에일라라는 같은 취미(?)를 공유할 사람이 늘어난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보다 사실은 내가 에일라와 수도에 갔을 때…."

이대로 두었다간 다시 2시간이 넘도록 에일라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티아는 수도에서 에일라와 있었던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꿈속에서 나를 붙잡았던 건 에일라였어. 어째서 나를 붙잡은 것이 에일라였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역시 에일라다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에일라가 수도에서 벌인 활약(?)에 감탄하는 세이사의 모습을 저렇게 에일라를 좋아하다니 참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슬쩍 바라본 티아는 마침내 세이사에게 말하고 싶었던 용건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어. 에일라는 분명 허약한데, 뭔가 도움이 될 것이 없을까."

강력한 신성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약한 에일라의 육체.

위험한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어,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한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에일라를 더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느낌.

"으음…티아의 말이 맞아. 나도 에일라에게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에일라의 체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거든."

세이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티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표했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내용인데, 이번에 에일라가 목적지로 정한 성 그라나의 길에는 온천이 많다고 들었어. 거기로 에일라를 데려가는 건 어떨까?"

세이사의 긍정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은 티아가일명 '에일라 온천 치료시키기' 계획을 제안한 것을 세이사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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