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성 그라나의 길 (2)
* * *
'진짜 돌겠네.'
나는 마차가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커져만 가는 초조함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온천이라니, 하필이면 가장 피하고 싶은 장소 중 하나였던 온천이라니!
차라리 내가 남자의 몸이었다면, 남탕과 여탕이 갈려서 따로 온천을 이용하면 되니 이런 유별난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 나는 에일라의 몸에 들어와 있는 상태.
무언가 수를 쓰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세이사와 티아의 손에 이끌려 평생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여탕으로 끌려가게 생겼다.
[시후는 이상하네요. 보통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즐기려고 하는 게 보통 아닌가요?]
안 그래도 착잡한 기분이었는데 에일라마저 놀리듯이 물어보니, 내 기분은 한층 더 착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편견은 어디서…아니, 말하지 않아도 돼. 너한테 뭐라 하기에는 네가 겪었던 남자들이 하나같이 너무….'
그렇다고 에일라가 나를 약 올릴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으니 나로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매일매일 자신을 도구로 여기는 인간들 틈에서 살아온 에일라였으니, 에일라가 그런 왜곡된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다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남자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든 회피하려 노력할 의무가 있어.'
어쨌든,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아예 내가 온천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고,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온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매끼리 같은 욕탕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규칙상 금지된 일이 아니었던가요?"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반쯤은 유명무실해진 규칙이었던 탓에 말을 꺼낸 내가 엄청 꼰대 같아 보이는 부작용이 있는 말이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뭐래. 그렇게 치면 에일라 너는 매일 수녀원 안에서 세이사랑 손잡고 다녔잖아. 그건 규칙을 어긴 게 아니고?"
그러나 티아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는 투로 따져 묻자, 나로서는 변명이 궁했다.
"아니, 그건 제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세이사가 자꾸 손을 붙잡아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듯이, 변명은 또 다른 변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과연 그 말대로, 티아의 추궁에 변명을 주워섬기던 나는 얼떨결에 또 다른 지뢰를 밟고 말았음을 직감했다.
"에일라?"
아, 큰일 났다.
세이사가 정색하고 말았다.
"아, 아니에요. 세이사, 그게 싫었다는 게 아니라…."
당황한 탓에 말을 더듬기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내 얼굴은 굳이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뜨거웠고, 굳이 거울로 살펴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하하! 에일라 님도 이런 얼굴을 할 때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슴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잠자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칼린 씨는 잠시 조용히 있어 주세요."
"…알겠슴다."
그러나 나름대로 분위기를 환기하려던 칼린의 시도는 바깥에서 몰아치는 칼바람보다도 차갑고 서늘한 세이사의 요구에 너무나도 쉽게 진압되고 말았다.
"에일라는 그동안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게 불편했었어?"
…세이사의 눈이 반쯤 죽어있었다.
여기서 대답을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정말로 죽는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 세이사만큼 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에일라…!"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면서, 세이사를 치켜세워주는 내 대답에 감동이라도 했는지, 세이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걸로 큰 위기는 넘어갔….
"에일라, 말 돌리지 마. 그래서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러나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티아가 퉁명스럽게 던진 질문에 나는 내 발밑이 무너져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겪었던 사건들도 따지고 보면 다 티아가 원인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 느낌이….'
티아, 또 너야?
"티아 말이 맞네. 에일라, '예'랑 '아니오' 중에 하나로 대답해 줄래?"
'예'와 '아니오' 중 하나를 골라 답하라는 세이사의 요구.
그 요구에 논점을 흩트려놓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던 계획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아, 아니에요. 제가 세이사를 어떻게…."
"그러니까 에일라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게 좋다는 거지?"
거기에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이냐며 쏘아붙이고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비약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가는 조금 전의 정색한 세이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은 확정적이었고,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우와…에일라 님은 완전히 잡혀 사시는 모양임다."
그런 내 비굴한 모습에 칼린이 쓸데없는 사족을 달았고, 나는 말없이 칼린을 살짝 째려보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다.
*
"자, 수녀님들. 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북부의 명물로 유명한 온천 마을, 세브림입니다."
"고맙습니다. 피루스 씨."
온천 마을에 방문한 김에 자신도 온천욕을 즐길 생각에 잔뜩 들뜬 마부, 피루스 씨의 호들갑스러운 소개에 세이사는 우리 일행을 대표해서 감사인사를 전했다.
'저 능글맞은 마부 같으니….'
물론 내 의견은 거기에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
원치도 않았던 온천욕을 하게 생긴 탓에 나는 꽁한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버텼다.
"자, 이미 도착했으니까 에일라도 기분 풀고 기분 좋게 온천을 즐기자."
"뭘 그렇게 꽁하게 있어? 어서 내려."
당연하게도 세이사와 티아가 마차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고, 나는 결국 마지못해 마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에일라 몰래 이런 걸 준비해서 화났어?"
"……."
세이사가 내 안색을 살피며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화가 난 모습'을 연기했다.
'이미 마을까지 도착해버린 이상, 최후의 마지노선만큼은 지켜야 해!'
"나 참,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
이전에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티아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로 핀잔을 던지는 티아의 말에도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좋아. 이대로 계속 화난 연기를 계속해서 같이 온천욕을 하는 것만큼은 회피하는 거야.'
그렇게 굳은 각오를 다지며, 나는 피루스 씨의 안내에 따라 묵묵히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순례길에 오르신 수녀님들이십니까?"
온천이 딸린 여관을 운영하는 중년의 남성은 빠르게 우리 일행을 훑어보더니 곧바로 손을 비비며 환영 인사를 건넸다.
북부의 순례길은 추위가 몰려오는 겨울철이나 길이 진흙밭이 되어 교통이 불편해지는 봄철을 피해 대개 여름이나 초가을 정도가 성수기인데, 손님이 별로 없을 이 시기에 이만한 인원이 자기 여관을 찾아왔으니, 입이 귀에 걸릴만한 횡재라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어디 보자…수녀님들이 모두 다 해서 여섯 명에 마부가 한 명. 모두 합해서 숙박이 일곱 명. 맞습니까?"
"네. 맞아요. 그리고 이왕이면 치료 효과가 가장 좋은 온천이 딸린 숙소를 이용하고 싶어요."
세이사가 이번에도 우리 일행을 대표해서 여관주인의 질문에 대답하자 여관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을 띠었다.
"그런 것이라면 저희 여관을 이길 곳이 없습니다! 저희 '하얀 증기' 여관은 순례길에 오른 성직자분들이 여정의 처음에 몸을 보하는 목적으로, 여정의 마지막에 그동안 쌓인 피로를 싹 씻어내리려는 목적으로 자주 방문하시는 곳이니 말입니다."
근처에 여럿 존재하는 다른 여관들을 생각하면 여관주인의 소개는 다소 허풍이 섞인 소개였지만, 굳이 내 연기를 깨면서 지적할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럼 비용은 어떻게 되나요?"
"어디 보자…. 순례객이 별로 없을 때기도 하고 이렇게 많은 인원이 방문하셨으니 싸게 해서 이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식사와 온천 모두 제공하는 가격입니다."
여관주인이 손가락을 접어 만든 것은 왼손으로 4, 오른손으로 0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분명 일박에 리벤 은화로 마흔 닢이라는 의미일 터인 손동작이었다.
지금이 성수기인 여름이나 초가을 무렵이었다면 여관주인이 제시한 숙박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숙박비였으나, 비수기인 지금 숙박비로 받아 챙기기에는 폭리나 다름없는 바가지요금이었다.
"일박에 리벤 은화로 열다섯 닢으로 하죠."
아무리 수중에 가진 돈이 많다지만 순순히 바가지를 쓰는 것은 스스로 호구임을 인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서고 말았다.
"에일라?!"
갑작스러운 내 개입에 놀란 세이사의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나는 여관주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하하. 수녀님, 다른 여관을 찾아가도 다 이 가격은 받습니다. 게다가 저희 여관은 이 세브림에서도 치료 효과라면 둘째라면 서러울…."
"스무 닢."
내가 여관주인의 말을 끊으며 슬쩍 흥정을 시도하자, 여관주인은 '이놈 봐라?' 싶은 시선을 내게 보냈다.
"하하하. 스무 닢이라니. 절반은 너무 적지 않습니까. 가장 좋은 온천을 내어줄 테니 조금 더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스무 닢."
다시 스무 닢을 부르는 나를 여관주인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탐색하듯 살폈고, 나는 그 기색에서 여관주인이 생각하는 적정가가 리벤 은화 스무 닢 내외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에이, 기분입니다. 제가 다른 것까지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리벤 은화로 서른 닢은…."
"스물다섯 닢."
이미 리벤 은화 스무 닢 내외가 적정가라고 파악한 이상, 굳이 불필요한 줄다리기를 이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내가 다섯 닢을 올려서 부르자, 비로소 여관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일박에 리벤 은화로 스물다섯 닢. 이렇게 흥정을 하실 줄 아는 수녀님은 이거 처음입니다. 하하하!"
리벤 은화 마흔 닢을 뜯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약간의 뒤끝이 섞인 푸념을 내뱉은 여관주인이었지만, 고작 그런 싸구려 도발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세이사. 여기서 며칠 동안 묵을 생각이죠?"
"어…일단 이틀?"
세이사에게 일정에 관해 물은 뒤, 나는 리벤 은화 쉰 닢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여관주인 앞으로 내밀었다.
"하하하. 이거야 원. 재미있는 수녀님이십니다."
이곳에서 여관을 허투루 운영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여관주인은 내가 내민 주머니의 크기와 무게로 리벤 은화 쉰 닢이 들어있음을 곧바로 간파하고는 곧바로 내가 내민 손바닥 위에 열쇠를 떨어뜨려 주었다.
"가죠."
"……."
개인실 열쇠는 혼자 방을 사용할 피루스 씨에게 건네고, 세이사를 비롯한 모두가 사용할 단체실 열쇠는 내가 쥔 채로 앞장서자, 모두가 말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어떡하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는데 이래서야 스스로 목을 조른 꼴밖에 안 되잖아.'
한창 화난 모습을 연기하다 갑자기 숙박비를 흥정하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긴장하며, 우리가 이틀간 머무를 숙소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다른 일행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에일라 님?"
루피아가 당황한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지만, 화가 났다는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나는 계속 묵묵히 발걸음을─
"에일라 언니! 그쪽은 남탕이에요! 숙소는 반대쪽이에요!"
─옮기려다가 엘리의 외침을 듣고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정작 가야 할 길을 잘못 본 모양이었다.
'…그냥 죽을까.'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누가 보더라도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피곤하니 잠부터 자야겠어요."
그 자리에서 수치심에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입을 떼 숙소로 도망치듯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