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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54화 (54/80)

〈 54화 〉 성 그라나의 길 (3)

* * *

'내가 미쳤지! 그깟 은화 몇 닢만 더 내면 되는 걸 못 참아서는!'

몰려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던 나는 숙소 침대에 몸을 내던진 뒤, 이불을 머리까지 완전히 뒤집어썼다.

손해를 보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불편하던 버릇이 도진 탓에, 여관주인과 숙박비를 흥정하게 되면서 내가 화난 척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연기는 끝장나고 말았다.

차라리 그것만이었다면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참으로 멍청하게도 뻔뻔하게 연기를 이어나가려다 길을 잘못 들어서 남탕으로 돌격할 뻔하기까지 했다.

전생에서 쌓아왔던 흑역사를 모조리 합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전의 행동으로 쌓인 흑역사만큼 부끄럽지는 않을 정도였다.

"에일라."

"……."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 너머로 나를 부르는 세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짐짓 자는척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래, 나는 여행길에 지쳐서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잠든 거다.

그래서 정말 유감스럽게도 모두와 같이 온천욕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플랜으로 가자.

"고마워. 에일라."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잠든 척을 하고 있는데, 세이사는 뜬금없이 내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

뭐가 그렇게 고맙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여기서 내가 입을 열면 기껏 세워둔 계획이 우르르 무너지고 말 테니 나는 침묵을 고수했다.

"여관주인 아저씨가 숙박비를 조금 부풀린 건 알고 있었는데, 먼저 에일라가 나서서 따져줘서 고마워."

다행히도, 세이사가 곧바로 이유를 말해주어서 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이불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하아, 에일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씩씩해서 언제나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지."

세이사의 푸념과도 같은 말과 함께 침대 위로 느껴지는 가벼운 진동.

아마 세이사가 침대 위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있잖아. 나는 에일라가 무척 부러웠어. 그 망할 주정뱅이가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던 내가 싫었거든."

그리고 세이사가 꺼내든 화제는 과거의 이야기였다.

"기억해? 그날도 바보같이 집을 뛰쳐나와 울고 있었는데 에일라가 나를 발견하고 처음 했던 말."

알고 있다.

에일라의 의식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해금된 에일라가 내게 숨겼던 일부 기억들.

그 기억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히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뭘 그렇게 한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건가요.'라니, 너무한 첫인사였어. 하지만, 그 인사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 그런 퉁명스러운 인사도 지금은 고맙게 느껴져."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진짜' 에일라 넬런이 세이사 밀턴이라는 소녀에게 내려준 구원에 내가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에일라.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난 에일라가 좋아. 에일라가 힘든 일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고, 에일라가 기쁜 일이 있다면 함께 축하해주며 웃고 싶어."

그렇기에 내게는 세이사의 끝없는 호의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었다.

그것은 비겁한 일이니까.

나는 '진짜' 에일라가 아니라, '윤시후'라는 이방인에 불과하니까.

세이사는 내게 반한 것이 아니라 에일라 넬런이라는 소녀에게 반한 것이니까.

"……."

내가 세이사에게 반했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내세워서 세이사의 순수한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까.

"…아, 드디어 말했다. 수녀원으로 쫓기듯이 나올 때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어."

세이사는 홀가분하다는 듯이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에일라, 안 자고 있다는 거 다 알아."

그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을 장난스럽게 건넸다.

"……."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계속 침묵을 지켰지만, 내가 뒤집어쓴 이불을 향해 세이사가 손을 뻗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장난이야."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 연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내가 재미있었는지, 세이사는 이불에 손을 톡 건드리기만 하고 쿡쿡 웃었다.

"에일라. 푹 쉬어. 에일라는 쉴 시간이 필요하잖아?"

세이사의 그 말에는 신비로운 기적이라도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세이사가 그 말을 남기고 숙소를 나서는 것과 동시에, 나는 둑이 무너지듯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졸음에 몸을 맡겼다.

*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네요."

다시 눈을 뜨니 어느덧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온천, 가 볼까요."

청소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한밤중이라도 얼마든지 온천을 이용할 수 있다는 여관주인의 설명을 떠올린 나는 조용히 목욕 도구를 챙겨 행여 누군가 깰세라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전생에선 언감생심 꿈도 못 꿨었던 온천 여행이었다.

비록 다른 동료들과 같이 온천욕을 즐길 수는 없지만, 나 홀로 몰래 온천욕을 즐기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와…굉장하네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찾아간 온천은 어째서 온천이 북부의 명물이라 불리는지를 증명하듯 따스한 김을 뿜어내며 밤하늘의 달과 별자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물 위에 펼쳐진 플라네타리움.

그 위로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니 파문이 일렁이며 별빛이 흔들흔들 빛났다.

"…좋아요."

혹여 누군가 있을까 봐 몸에 둘렀던 수건을 조심스럽게 벗어 내려놓은 뒤, 나는 몸을 온천에 담갔다.

"아…."

따스하게 몸을 감싸는 온천물에 피로가 저절로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에일라의 몸으로 눈을 뜨고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쉴 틈 없이 달려오기만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티아의 얼굴이….

"……."

"……."

뭐야, 진짜 티아였잖아.

"……."

"……."

좋아, 도망가자.

"도망가지 마!"

침착하게 수건을 다시 몸에 두르고 숙소로 도망가려던 내 어깨를 붙잡으며 티아가 소리쳤다.

"나 참, 진짜로 같은 탕에 몸을 담그는 게 싫었던 거야? 얼마나 꼰대인 거야."

"…돌아갈게요."

"아니, 방금 들어가 놓고 무슨 말이야! 당장 다시 들어가!"

티아는 내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나를 기어코 온천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내가 저항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일라 특유의 허약한 체력 때문에 결국 티아와의 힘 싸움에서 져 버렸다.

"아, 달빛이 참 밝네요."

"뭐라는 거야."

혹여나 티아의 알몸을 보기라도 할까 싶어 멍하니 시선을 하늘로 올리며 아무 말이나 던져보았는데, 티아는 칼같이 태클을 걸었다.

"…밤하늘의 멋짐을 모르는 티아가 불쌍해요."

"에일라 너, 일부러 헛소리하는 거 다 알고 있거든?"

티아는 그렇게 대꾸하며 찰박찰박 물 튀기는 소리를 내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요."

헛소리로도, 억지로도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나는 결국 티아에게 무슨 용건인지 물었다.

"에일라,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티아의 대답은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이야기부터 들어보고요."

솔직히 말해서, 티아가 내게 무엇을 물어볼 것인지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에일라, 너는 포티아족을 얼마나 알고 있어?"

"네?"

그렇기에 포티아족에 관해 물어보는 티아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포티아족이 어떤 종족인지, 에일라는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음…카르실리안 대륙 남동쪽의 '포르테'라 불리는 초원과 고원이 뒤섞인 땅에서 '플레온'이라 불리는 불과 전쟁의 신을 모시며 살아가는 호전적인 유목민족이라는 것까지일까요. 아, '하칸'이라 불리는 왕과 비슷한 지도자가 있다고도 들었어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실 몇 가지를 추려 티아의 질문에 대답하니, 티아는 낯빛을 어둡게 하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자세히 알고 있는 모양이네."

"네? 티아는 포티아 족의 피를 가졌는데, 그 사실조차 몰랐다고요?"

남부 출신에, 포티아의 피까지 이은 티아라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래. 애초에 나는 내가 포티아 족의 피가 섞였는지도 몰랐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시기에 나를 저택으로 보낸 부모님의 얼굴도 몰라. 내가 알던 세상은 항상 저택 안과 그 주변이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티아는 자신의 어두운 적갈색 머리카락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어렸을 때는 저 밤하늘처럼 새카만 흑발이었어. 흑발은 남부에선 흔한 색이니 할아버지도 의심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는 티아의 눈.

그 눈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좋은 때였어. 저택에선 언제나 시중을 들어주고 고개를 숙이는 하인과 고용인들로 가득하고, 할아버지는 내가 뭘 하든 허허 웃으시면서 잘했다며 칭찬하곤 하셨지."

어딘가 달관한 표정으로 말하는 티아의 말투에선 짙은 체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붉은 머리칼이 나면서 내가 알았던 세상은 무너져 버렸지. 포티아족이라는 말도 그때 처음 알았어. 그것도 더럽고 난폭한 야만인의 피를 이었다며 하인이나 고용인이 저들끼리 쑥덕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 사실이지만."

"…너무한 처사네요."

아무리 그래도 티아가 자기 손녀딸이고, 자기들이 모시는 아가씨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를 바꾸다니.

적어도 피가 이어진 가족으로서 할아버지는 그런 티아를 두둔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은 말이지, 수도에서 내가 악마가 되는 저주에 걸렸을 때 그 기억을 봤어. 아마 악마 놈이 나를 속여넘기려고 보여준 환상이었겠지만, 갑자기 내게 성을 내는 가짜 할아버지를 죽이면 이전의 인자하던 할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반쯤 넘어갈 뻔했어."

얼마나 정신적으로 트라우마가 되었으면 그런 환상을 보았을까.

내가 안타깝다는 시선을 티아에게 보내자, 티아는 피식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내 손을 붙잡아 준 게 어째선지 에일라 너였어."

"…그런가요."

"우습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 나 같은 머저리가 너한테 의지하다니. 언제나 발목만 잡는 멍청이인 내가 뭐가 잘났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티아의 말에는 짙은 자기혐오가 기저에 깔려있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머저리, 다른 사람의 발목이나 잡는 멍청이.

하나같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단어들이었다.

"티아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거짓말. 이제는 반쯤 악마화도 되다 만, 인간도 악마도 아닌 놈이 되었잖아."

애처롭게 웃으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돋아난 조그마한 뿔을 톡톡 두드리는 티아.

티아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이제야 눈치챈 사실이었지만, 얼굴이 붉어진 티아의 몸에선 알코올 특유의 냄새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몰래 구해다 마셨나 보네.'

뭐, '뤼네의 꿈'이라는 마약에 손을 댈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했던 티아였으니, '뤼네의 꿈'을 더는 피울 수 없는 지금, 뭔가 다른 것에 손을 댔을 개연성은 충분했다.

뭐, 지금 티아가 부리는 것이 술주정이라면 적당히 맞장구쳐 주는 게 정답이었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이 티아를 버렸어도, 저는 티아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어느새 티아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 티아가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의지해 주세요. 티아는 제 친구잖아요?"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술주정을 부리는 사람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면 알아서 조용해지는 경우가 있는 반면.

"우아앙! 에일라!"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알코올에 취해 이성의 통제가 느슨해진 뜸을 타 무턱대고 육탄돌격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티, 티아! 떨어져 주세요!"

무턱대고 나를 껴안으며 머리를 내 뺨에 부벼대는 티아.

그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몽글몽글한 감각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기겁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에일라는 이제 항상 나랑 같이 있는 거야…."

"그, 그러니까 이거 놓으…."

원래부터 체력과 근력이 밀리는 데다, 알코올까지 들어가며 리미터가 풀린 티아의 힘을 나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에일라? 티아?"

"…살려주세요. 세이사…."

결국 나는 새벽이 밝을 때까지 티아라는 덫에 붙잡힌 채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었고, 너무 오래 온천에 들어가 있었던 탓에 꼬박 하루를 침대에 누운 채로 보내야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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