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성 그라나의 길 (4)
* * *
"이건 전부 압수에요."
꼬박 하루에 걸친 요양 끝에 마침내 정신을 차린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티아가 숙소와 마차 이곳저곳에 숨겨두었던 술을 모조리 찾아내 압수하는 것이었다.
"……."
티아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는지, 이번 처분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내게 무릎을 꿇고 앉으며 고개를 아래로 푹 떨구었다.
"대체 어느 틈에 술을 구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재주는 참 좋네요…."
"으…대체 어떻게 다 찾은 거야…안 들키도록 꼭꼭 숨겨뒀는데…."
지금 내 등 뒤로 조그마한 언덕을 이루고 있는 술들에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티아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티아가 숨겨봐야 숨길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기상천외한 은닉처를 떠올린다고 한들 그런 공간을 만들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보육원 생활을 하면서 다소 엇나가는 동생들이 일탈을 위해 은밀히 숨겨놓은 물건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에는 이골이 났었던 내가 겨우 티아가 숨겨놓은 술을 찾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진 싸움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티아는 어쩔 생각인가요. 이번 일에 대한 책임 말이죠."
"아…으…죄송…합니다."
내가 '책임'을 거론하며 티아를 몰아붙이자, 티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설마 사과 하나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죠?"
"그, 뭐, 뭐든 할 테니까…!"
내가 사과 하나로 넘어갈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티아는 비굴한 말을 주워섬기며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이래야 티아답지.
최근에는 까칠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조금 낯설었는데, 이제야 수도에서 봤던 티아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참 반가웠다.
"'뭐든 하겠다.'라고요. 좋아요. 그 말 확실히 들었어요."
"아…!"
건수를 잡았다며 씨익 웃는 내 모습에 티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럼 티아는 오늘부터 칼린에게 수련을 받으세요. 그러면 이번 일은 너그럽게 용서해 드리겠어요."
"…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티아의 표정이 의문으로 뒤덮였다.
"티아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죠? 그런 의미에서 하는 제안이에요."
"그, 그건…!"
내가 꺼낸 말에 자신이 저지른 추태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티아.
아마 내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진지한 고민을 거쳐서 티아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포티아족은 그들이 불과 전쟁의 신인 '플레온'을 숭배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듯 일시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가능한 괴력과 다른 카르실리안 대륙의 종족보다도 뛰어난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칼린이 절대 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력이 늘어나서 나쁜 것은 없지. 하물며 언제 습격받을지도 모르는 지금 상황에선.'
거기에 성격이 단순한 편이고, 괜히 머리를 굴렸다가는 머리에 열이 올라 스스로 자폭하기 일쑤인 티아에게 굳이 머리 쓰는 일을 맡길 필요는 없으니, 차라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포티아족의 특성을 살려 일행의 전력을 보강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같은 포티아족인 칼린 역시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췄지. 칼린이라면 티아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거야.'
더불어 호위기사로 동행하는 칼린 역시 티아와 같은 포티아족이었으니, 티아를 감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손에 검을 쥐어본 적도 없어. 금방 나가떨어지고 말 거야."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티아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역시 자존감이 낮은 건가?'
취중 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티아가 술에 취한 채로 온천에서 꺼냈던 말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비관적인 말이었다.
즉, 티아는 지금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너무나도 커져 버린 상태였다.
"티아, 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건가요?"
그래도 나는 티아의 말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다.
뭐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닌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열망을 말이다.
"나중에 티아를 내친 할아버님의 뺨을 한 대 갈겨주셔야죠? 그걸 위한 수련이에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잖아요?"
"에일라, 너…."
나를 바라보는 티아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 불길이 의미하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다 꺼져버린 재 속에 숨어 다시 불타오를 때를 기다리는 은은한 불길과도 같은 의지.
"그리고 실패하면 어때서요? 저는 그런 티아라도 괜찮은걸요."
복수불반분이라, 이미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꺼낸 말 역시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비록 취중에 들은 말이라 티아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이미 나는 티아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니 그 말에 책임을 져야겠지.
티아는 내 '친구'이니 말이다.
[하아…다 좋은데 결론이 틀렸어요.]
'뭐?'
"…할게."
에일라의 갑작스러운 태클에 나는 속으로 반문하려 했지만, 티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꺼낸 대답에 나는 에일라를 더 추궁할 수 없었다.
"에일라, 네가 말한 수련, 오늘부터 시작할게."
그야, 굳게 결심한 친구의 각오를 다른 생각을 하며 들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아…중증이에요. 시후.]
그리고 그런 내 생각에 에일라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어 외부의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
"유감이로군. 단 한 명도 회수하지 못할 줄이야."
그런 어두컴컴한 방의 한가운데에서 고요히 서 있던, 새까만 로브에 우는 얼굴을 형상화한 은색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는 다소 심기가 불편한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정면에 선 남자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저들의 능력을 너무 얕보았습니다."
색은 은색으로 같았지만, 웃는 얼굴을 형상화했다는 차이점이 있는 가면을 얼굴에 쓴 남자는 자신을 질책한 남자를 '스승님'이라 부르며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렇다면 그 책임을 져야겠지."
"스, 스승님. 부디 자, 자비를…아악!"
'스승'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의 머리 위에 두 손을 뻗어 안수기도하듯 올려놓자, 남자는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자, 자비를! 아아아아아아악!"
단말마의 고통에 남자가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방 안에 메아리쳤다.
"네게 자격이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비명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승'은 차갑게 대꾸하며 남자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남자의 눈은 극심한 고통에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혔고, 그와 동시에 남자의 얼굴에 존재하는 모든 구멍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읍! 우웨에에엑!"
피를 토해내는 남자의 몸이 기묘하게 뒤틀리고, 부풀어 오르고, 심하면 풍선처럼 터져나가기도 하며 끔찍한 형상을 취하게 되었을 즈음.
"여기까지다. 너는 자격을 얻었다."
"하악…하악…감사…합니다…."
비로소 '스승'이 남자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두자, 남자는 고통스럽게 내지르던 비명을 그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가라. 기억을 잃고 둥지를 떠도는 새는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새장을 벗어났던 새와 새로이 새장에 집어넣을 새를 잡아 와라."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자세로 처참한 몰골이 된 남자였지만, '스승'은 그가 멀쩡한 상태라도 되는 양 태연하게 명령을 내렸다.
"진실의…탐구를 위해…."
그러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남자의 몸이 밝게 빛나며, 빠른 속도로 이전의 형태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스승님의…명령을…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이전의 모습을 되찾은 남자는 은색 가면 아래에서 불길한 금빛 안광을 흩뿌리며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감사합니다. 수녀님들! 살펴 가십쇼!"
여관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여관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세브림 마을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생각해보면 첫날엔 그저 잠들어버렸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온천에 갔기 때문에 별로 한 게 없었고, 그다음 날은 티아에게 붙잡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온천에 들어가 있었던 탓에 열기를 식히느라 온종일 누워 있었으니, 뭔가 일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나 의문이 들긴 하지만, 아무튼 오랫동안 잠까지 줄여가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누워있는 시간을 가진 덕분인지 세브림 마을을 떠나는 지금, 내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된 편이었다.
"엘리, 그러니까 엘리의 말은 우리가 이 순례길에서 어떤 물건을 찾아야 한다는 건가요?"
"네! 에일라 언니의 말이 맞아요!"
그러나 그런 요양조차 무색하게, 내가 던진 질문에 해맑게 대답하는 엘리의 말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도 아니고. 아니, 차라리 그건 찾는 물건이 '바늘'이라는 사실이라도 알지, 찾아야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몰라서야….'
이번 순례길의 목적은 내가 목에 건 목걸이에 박힌 칠요의 성석을 빛나게 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있었지만, 코니엘 신부의 조언에 따라 엘리의 요구를 들어주러 간다는 목적이 더 컸다.
하지만 정작 주요 목표인 엘리의 요구가 너무나도 모호했고,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애매했으니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진정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아…부디 찾아야 한다는 물건이 성물은 아니기를 바라죠. 피루스 씨, 루베릭 수도원으로 마차를 몰아주세요."
결국, 나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루베릭 수도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 알겠습니다! 루베릭 수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피루스 씨는 세브림 마을에서 머무는 동안 온천욕을 상당히 즐겼는지, 무척이나 반들반들해진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녀님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루베릭 수도원으로 방향을 잡고 마차를 달리기를 잠시, 어째서인지 우리 일행을 다급히 뒤쫓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허억, 헉.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신은…."
우리 일행을 뒤쫓아오던 사람의 정체는 의외로 여관주인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숙박비라면 이미 지불했을 텐데요."
"아, 숙박비 때문에 수녀님들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이 물을 봐주십시오."
대체 무슨 용건으로 우리 일행을 다급히 뒤쫓아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여관주인은 주머니를 뒤져 아직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투명한 병을 내게 내밀었다.
"온천수를 담은 병인가요? 이걸 왜 제게…아."
처음에는 다짜고짜 온천수가 담긴 병을 왜 내게 내미는 것인지 의아해하던 나였지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생각이 닿는 부분이 있었다.
시네티 마을에서 나는 단순히 피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커다란 그릇에 담긴 물을 고순도의 성수로 만들었다.
그런 내가 한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도록 온천 안에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매하신 성녀님을 진작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디 성녀님이 저희 '하얀 증기'에 머무셔서 저희 온천수를 성수로 바꿔주셨다는 증명서를 써 주시면…."
"…피루스 씨. 당장 마차를 최대로 모세요."
정답에 도달한 나는 끼기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리며 피루스 씨에게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 것을 주문했다.
"예, 알겠습니다!"
흔쾌히 내 주문을 받아들인 피루스 씨는 여관주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잠시 멈춰 섰던 마차에 다시 속도를 붙였고, 나를 향해 무어라 말을 쏟아내던 여관주인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우리가 탄 마차를 끈질기게 쫓아왔지만, 이미 먼 거리를 달려왔던 여관주인의 말이 지쳐 거리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자 단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 어쩐지 두 번째 날에 들어간 온천이 뭔가 느낌이 다르더니 그런 일이 있었슴까?"
"역시 에일라 성녀 후보님은 대단하네요. 단순히 물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물이 모두 성수로 변할 정도라니…."
칼린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어오고, 루피아는 단순히 온천에 몸을 담갔을 뿐인데 온천수를 모조리 성수로 바꿔버린 내 신성력에 감탄했다.
"…읏."
"아하하…."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티아는 찔리는 것이 많은지 필사적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세이사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시끄러워요! 다들 조용히 하세요!"
결국 나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폭발하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