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56화 (56/80)

〈 56화 〉 성 그라나의 길 (5)

* * *

"드디어 루베릭 수도원이네요."

"으으, 이틀이나 마차 안에서만 있었더니 좀이 쑤심다.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슴다."

세브림 마을에서의 휴식을 마치고, 마차를 달려서 도착한 루베릭 수도원은 순례객을 한두 번 상대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수도원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곳부터 무척이나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보기에는 좋지만, 저걸 관리해야 하는 수사와 수녀들의 수고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도 없는 일이네.'

수도원이나 수녀원의 생활은 따지고 보면, 정신이나 신체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대한민국의 남아라면­최근 들어 조금 결격사유가 있어도 모조리 잡아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일생에 한 번은 무조건 방문하게 되어있는 '군대'라는 조직과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조금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자면, 수도원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수도원장, 혹은 수녀원장은 매사에 실망할 일이 많고, 저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손가락으로 산을 치워버리는 기적을 행할 수도 있는 분대장…아니, 중대장 정도의 위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업무를 보조하는 동시에 수습 수도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 정식 수사나 수녀들은 부사관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수도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수도원의 온갖 잡무를 담당하는 수습 수도자들, 이들은 병사에 해당했다.

즉, 봄이 찾아와 해빙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눈이 쌓여있는 길을 순례객이 쾌적하게 다닐 수 있도록 쓸고 닦은 사람은 루베릭 수도원 소속의 수습 수사와 수습 수녀들일 것이 분명했다.

'혹한기…제설 작업…윽…머리가….'

머리를 따끔따끔 찔러오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해, 나는 머리를 황급히 좌우로 흔들었다.

"에일라,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잠시 피곤해서 졸음이 몰려온 모양이에요."

세이사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괜찮은지 물어왔고, 나는 잠시 졸음이 몰려와 잠을 쫓으려 한 것이라며 둘러댔다.

'아냐, 여긴 대한민국 군대가 아니라고. 정신 차리자.'

트라우마를 머릿속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치워놓고, 나는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에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반갑습니다. 무슨 일로 루베릭 수도원을 찾으셨습니까?"

"성 그라나 님의 순례길을 순례하고 있습죠. 뒤의 객실에 타고 계신 수녀님들 말입니다."

내가 그러는 사이, 마차를 몰던 피루스 씨는 마차를 수도원 앞에 세우고, 루베릭 수도원을 찾는 순례객을 상대하는 당직을 서고 있던 수습 수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 순례 중인 자매님들이시군요. 그렇다면 잠시 마차 안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피루스 씨와 수습 수사가 나누는 이야기는 마차 안에 있던 우리의 귀에도 잘 들렸고, 피루스 씨가 객실을 돌아보며 어떻게 하겠느냐는 시선을 보내오자, 나는 승낙의 의미로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로 순례길에 오른 자매님들이시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자매님들의 순례길에 길더스텐 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마차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한 수습 수사는 수도복에 베일을 걸친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순례 중인 순례자를 축복하는 의례적인 말을 덧붙였다.

"어…그런데 저 여기사님은…?"

그러나 뒤늦게 우리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갑옷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칼까지 찬 칼린의 모습을 확인하고 수습 수사는 표정을 굳혔다.

"만나서 반갑슴다. 형제님. 성녀 후보이신 에일라 넬런 님을 호위하는 호위기사 칼린이라고 함다."

"에, 에에에에…에일라 넬런이라고요?"

눈치 빠른 칼린답게, 칼린은 수습 수사가 괜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재빠르게 대답하며 악수를 청했지만, 칼린의 말을 들은 수습 수사의 안색은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의 안색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 수도원장님께 위험…아니, 자매님들이 왔음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말까지 더듬어대며 황급히 수도원 안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가는 수습 수사.

그 모습에 나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길래, 제 이름을 듣고 저 수습 수사가 놀란 걸까요?"

"에일라가 성녀 후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 아닐까? 성녀 후보면 주교님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잖아. 수습 수사면 놀랄 수도 있지."

세이사의 대답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위병소 근무를 서는데 갑자기 별에 준하는 방문객이 찾아온 상황이 아닌가.

등에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오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에일라 네 이름을 계속 언급하면서 덜덜 떨던데?"

그러나 티아의 지적대로, 수습 수사가 보인 행동은 단순히 놀랐다기에는 과도한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에일라'라는 이름을 계속 언급하던 수습 수사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죠."

그러나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봐야, 굳게 닫혀있는 루베릭 수도원의 문을 열 방법은 없었다.

조금 전에 수도원 안으로 뛰어간 그 수습 수사가 수도원장에게 우리의 방문을 알리고 허락을 얻은 뒤에야 우리의 출입이 허가될 테니 말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루베릭 수도원의 장, 카르고라고 합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얼굴과 배를 비롯한 온몸에 살집이 두둑하게 잡힌 중년의 남성이 루베릭 수도원의 문을 열고 나왔다.

"반갑습니다. 카르고 수도원장님. 성 그라나 님의 여정을 따라가는 순례길을 따라가는 중인데, 루베릭 수도원에서 잠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루베릭 수도원은 성녀 그라나 님의 길을 순례하는 순례객들을 상대로 편안히 쉬어갈 잠자리를 제공하던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말을 더듬었던 첫인사와는 달리, 이번에는 청산유수처럼 대답하는 카르고 수도원장이었지만,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이마와 등의 식은땀, 거기에 묘하게 허세가 잔뜩 들어간 카르고 수도원장의 말투는 내가 눈을 가늘게 뜨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루베릭 수도원에 잠시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건네며 마차에서 내리자, 카르고 수도원장은 몸을 움찔하며 짧게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마치 고양이를 앞에 두고 벌벌 떨고 있는 쥐나 다름없…아니, 카르고 수도원장의 체형을 고려하면 해바라기 씨를 너무 많이 먹어 살이 뒤룩뒤룩 찐 햄스터가 적절하겠다.

'…일단 지켜보도록 할까.'

아무튼, 첫 순례지인 루베릭 수도원을 담당하는 수도원장이 저런 수상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내 신경은 절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에일라, 혹시 수상한 기운 같은 것은 없었어?'

[아뇨. 악마나 그들이 풍기는 지독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혹시나 해서 에일라에게 수상한 기운이 있지는 않았나 물어보았지만, 에일라의 대답은 '없다'였다.

'그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나를 향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경계심과 두려움.

아무래도 루베릭 수도원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이 의문점을 파헤치는 데 시간을 써야 할 것 같았다.

*

"­♬"

카르고 수도원장은 자기 집무실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허억…카르고 수도원장님! 카르고 수도원장님! 허억…."

"음? 무슨 일인가요? 루밀 형제? 형제는 지금 수도원 입구 경비를 설 시간이 아니던가요?"

카르고 수도원장은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갑작스럽게 깨트리며 찾아온 수습 수사, 루밀의 행동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 그게…허억…."

"…으음, 루밀 형제. 일단 이걸 마셔서 숨을 가라앉히고 말해주세요."

"네. 가, 감사합니다."

루밀은 경비를 서던 수도원 입구와는 제법 거리가 되는 수도원장실까지 쉬지도 않고 뛰어왔는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쉽사리 열지 못했고, 그런 루밀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카르고 수도원장은 책상 위에 있던 물컵을 들어 루밀에게 권했다.

"카르고 수도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카르고 수도원장이 권한 물컵을 게 눈 감추듯 단숨에 비워낸 루밀이 꺼낸 말에 카르고 수도원장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루밀 형제, 다짜고짜 그렇게 말해서야 아무도 루밀 형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천천히, 차분하게 이야기하세요."

시답잖은 일로 자신의 여유로운 시간을 방해한 것이었다면 루밀에게 '적절한 징계'를 내리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카르고 수도원장은 루밀에게 차분하게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 그게, 에일라 넬런!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가 우리 수도원에 찾아왔습니다!"

"뭐라고? 이, 이런!"

그러나 루밀에게 '적절한 징계'를 내리겠다는 카르고 수도원장의 생각은 루밀에 꺼낸 말을 듣자마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넬런 백작가의 광견이? 크게 사고를 저지른 뒤로 백작가에서도 제명되어 수녀원으로 쫓겨났지만 뭔지는 몰라도 뭔가 수를 써서 성녀 후보의 자리까지 차지한 무시무시한 영애가 어째서 여기로?'

카르고 수도원장이 떠올린 '에일라 넬런'에 관한 소문은 여기저기 퍼져나가면서 여러 번의 첨삭이 더해진 탓에 사실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지만, 순례길을 찾는 목적이 아니라면 찾아오는 이도 없는 북부의 외진 곳에 있는 탓에, 카르고 수도원장을 비롯한 루베릭 수도원의 사람들은 이 과장된 소문의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재앙이다. 재앙이야! 빨리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융숭하게 대접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 결과, 카르고 수도원장의 머릿속에서는 위험을 경고하는 경종이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잠깐, 루밀 형제. 그럼 그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은 지금 어디에…?"

"아, 그, 그게 빨리 수도원장님께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곧바로…."

"……."

망했다.

이 멍청한 수습 수사 녀석 때문에 완전히 망해버렸다.

카르고 수도원장의 속에서는 당장이라도 루밀의 멱살을 붙잡아 분이 풀릴 때까지 짤짤 흔들어대고 싶다는 충동이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당장 수도원의 문을 열게! 아니, 내가 직접 나가겠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런 사적인 감정을 터뜨릴 수도 없는 위기 상황이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카르고 수도원장은 악마들의 대륙, 칼라탄으로 떠나는 성전에 나서는 성기사의 각오처럼 마음을 굳게 먹으며 황급히 수도원장실을 나섰다.

'제발, 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런 카르고 수도원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기 보신'에 철저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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