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성 그라나의 길 (6)
* * *
"음…."
루베릭 수도원에서 우리 일행에게 제공한 대접은 검소함과 청빈함을 강조하는 수도자들이 머무는 수도원에서 정말 이래도 되는지 고민이 될 정도로 융숭했다.
"우와…."
"수도의 귀족가에서 시종들이 쓰는 숙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우선은 숙소.
일행 모두가 나누어 쓸 수 있도록 푹신한 침대가 여럿 있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한 크기의 방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것은 물론, 향초라도 피웠는지 방 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것에 우리 일행 모두가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쯤 되면 부담스러워서 오히려 편하게 잠을 못 잘 것 같슴다."
하지만 칼린의 말마따나 그런 정성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잠이 오히려 달아날 것 같은 숙소이기도 했다.
"…수도원에서 이렇게 음식이 많이 나오는 건 처음 봐."
"티아 언니는 좀 더 대범해질 필요가 있어요! 이럴 때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식사를 즐기는 거예요!"
다음은 식사.
부유한 지역을 영지로 삼아 다스리는 영주의 한 끼 식사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요리가 차례차례 테이블 위에 놓여졌고, 그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입에는 새끼돼지의 입에 사과를 물려놓은 채로 통째로 구워내어 고소한 냄새를 잔뜩 풍기는 통구이 요리였다.
"처음 보는 산해진미네요. 길더스텐 님을 모시는 사제분들은 이런 식사를 자주 하시나요?"
"아니에요. 본래 수도자나 사제라면 응당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니까요. 아마 오늘 이후로 한동안은 육식을 금하는 날이니 다소 많은 음식이 나오는 날이기는 하지만…."
루피아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수많은 요리들을 향해 신기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길더스텐을 믿는 사제들은 이런 식사를 매일 하는 것이냐고 물었고, 세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루피아의 오해를 정정해주면서 뒷말을 흐렸다.
'맛있어 보이기는 한다만…먹다가 체하겠어."
세이사가 루피아의 질문에 대답하며 뒷말을 흐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에서 이런 음식이 나오는 경우는 그날이 대축일이거나 무언가 큰 경사가 있을 때 말고는 없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차려진 이 산해진미는 틀림없이 우리를 위해 억지를 부려가면서까지 차린 음식임이 분명했다.
"…괜히 저희 일행 탓에 무리하신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군요."
"하하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하지만 그라나 성녀님의 여정을 따라가는 순례길은 험난하기로 유명한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원에서 머무르는 동안 잘 먹고 푹 쉬시면서 체력을 온존하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찜찜한 느낌이 들어 마찬가지로 테이블에 앉아 어색한 웃음을 짓는 카르고 수도원장을 슬쩍 찔러보았지만, 카르고 수도원장은 넉살 좋은 말로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며 우리에게 이 호화로운 식사를 연신 권할 뿐이었다.
"…그럼 사양치 않고."
계속 카르고 수도원장과 신경전을 벌여봐야 음식이 식는 것 말고는 더 얻을 결과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나는 처음 보는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다소 경직되어 있던 일행들을 향해 이제 음식을 들어도 좋다고 눈짓했다.
"길더스텐 님 감사합니다. 이 양식으로 우리의 몸을 살찌우고, 당신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가드 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우리의 삶을 연명케 해 주시는 자비를 알고 있습니다. 이 자비가 영원히 기억되기를."
그렇게 길더스텐을 믿는 루피아를 제외한 우리 일행들은 길더스텐 교단의 방식대로, 아가드를 믿는 루피아는 아가드 교단의 방식대로 감사 기도를 올린 뒤,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내가 성녀 후보라지만 너무 지나쳐. 뭔가 구린 일이라도 감추고 있는 건가?'
나는 식사를 시작한 일행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성녀 후보가 주교급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다지만, 카르고 수도원장의 거의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과 다름없는 저자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고, 오히려 내 의심을 부채질했다.
─꿀꺽
그렇게 마뜩잖은 시선으로 카르고 수도원장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식사를 이어나가던 중, 내 귀에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어왔다.
'저 수습 수사는….'
누가 낸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방구석에 서서 이쪽을 향해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입맛을 다시는 수습 수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루베릭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서 번을 서고 있었던 수습 수사였다.
이름은…모른다.
나랑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무슨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히익!'소리를 내며 도망치는데 통성명을 할 기회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수도원장을 데려온 것을 보면 카르고 수도원장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 법도 한데….'
뭐, 나만 보면 도망갈 정도로 경계심이 강한 상황이니 역시 무리겠지.
그렇게 내가 단념하고 하루빨리 이 수사한 수도원을 떠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루밀 형제, 이리 와서 살코기를 발라내는 걸 좀 도와주게."
카르고 수도원장이 그 수습 수사의 이름을 부르며 식사 시중을 들 것을 요구했다.
"네, 알겠습니다! 카르고 수도원장님!"
그러자 마치 잘 훈련된 애완동물처럼 쪼르르 달려와 테이블 중앙에 놓인 큼직한 새끼돼지 통구이의 살을 발라내기 시작하는 루밀이라는 이름의 수습 수사.
'카르고 수도원장이 시종처럼 가까이 두고 부리는 수습 수사인가?'
그 충직한 모습에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진 루밀과 카르고 수도원장의 행동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그러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잘 발라낸 살코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카르고 수도원장에게 건네려다가 나와 카르고 수도원장을 번갈아 바라보는 루밀.
"에,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여기 있습니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카르고 수도원장은 루밀에게 멍청하게 뭐 하고 있냐는 시선을 보내며 내 쪽으로 접시를 건네라고 손짓했다.
"…감사합니다. 루밀 형제님."
"가, 감사합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는 루밀.
'…채찍 자국?'
그 덕분에 나는 루밀의 목 어림에 희미하지만 붉은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하아…부럽다. 새끼돼지를 통으로 구운 요리라니…."
식사 시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루밀은 연신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문지르며 한숨을 쏟아냈다.
평소에도 혼자서, 혹은 측근으로 둔 수사들과 온갖 진미를 즐기던 카르고 수도원장이었지만, 특히 이번 만찬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루밀의 위장을 자극했다.
"아…그 부드럽고 고소한 살점을 한 점이라도 입에 넣어 봤으면…."
그러나 그의 처지는 카르고 수도원장의 잔심부름이나 도맡아 처리하는,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아니, 어쩌면 노예보다 못한 걸지도 몰랐다.
노예가 주인이 먹고 남긴 부스러기를 챙기는 것 정도는 너그럽게 눈감아주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그는 부스러기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당장 몇 주 전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랬다.
"네가 저지른 죄를 길더스텐 님께 고하고 용서를 빌어라!"
"으, 음식을 탐하여 다른 이들에게 갈 음식을 훔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악!"
도저히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카르고 수도원장이 남긴 음식을 몰래 챙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카르고 수도원장은 루밀이 남의 음식을 탐하는 죄를 지었다며 채찍으로 자신을 때려가며 밤이 새도록 참회의 기도를 올리게 시켰다.
"하아…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아니, 돌아가도 이런 꼴로는…."
그러다 보니 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번듯한 사제가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오빠는 왜 그렇게 한숨을 자꾸 쉬어요?"
"그야 인생이 힘들어서…응? 너는…."
갑작스럽게 말을 건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루밀이었지만, 이내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식사 시간 때 살코기를 발라준 오빠, 맞죠?"
"마, 맞긴 한데…."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루밀은 긴장했던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반가워요! 전 엘리라고 해요! 오빠 이름은 뭐예요?"
그야 루밀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를 정도로 순수한 꼬마 수녀님이었으니 말이다.
"루밀, 내 이름은 루밀 바르텐이야."
이 엘리라는 이름의 꼬마 수녀가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와 연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루밀의 머리를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루밀은 이내 그 생각을 부정하며 엘리의 질문에 선선히 답했다.
'고작 이런 꼬마가 뭘 하겠어. 그것보다 거참 특이한 취향이네. 이런 꼬마를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는데.'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 가문만 수십 개를 박살 낸 광견과도 같은 여자다, 대접이 소홀하면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 보복할지도 모르니 철저히 준비해서 책잡힐 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카르고 수도원장의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루밀이었다.
'차라리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가 카르고 수도원장을 박살 내 주면 좋겠는데…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카르고 수도원장은 이 루베릭 수도원의 담당자로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제아무리 성격이 더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박살을 내고야 마는 에일라 넬런이라고 해도 카르고 수도원장의 수족으로 가득한 루베릭 수도원 안에서 카르고 수도원장을 상대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괜히 내가 끼어들어 봐야 내 등만 터져 나가겠지.'
그렇게 지레짐작하며 결론을 내리자, 루밀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수도원 나가고 싶다."
"루밀 오빠는 수도원을 나가고 싶어요? 이상하네요. 여기는 맛있는 음식도 나오고 침대도 푹신푹신하잖아요?"
엘리의 천진난만한 의문에 루밀은 심사가 뒤틀리며 '그거야 성격 더러운 에일라 넬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고작 이런 꼬마에게 제 울분을 풀어내는 짓은 도저히 못 할 짓이라는 생각에 자제했다.
"하아, 됐으니까 이만 돌아가라. 아니, 데려다줄게."
시끄러운 꼬마를 숙소로 데려다주는 괜한 일거리가 하나 더 생긴 꼴이라는 생각에 루밀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엘리를 데리고 에일라 넬런 일행이 머무르는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흐음…역시 뭔가 뒤가 구린 게 분명함다."
저녁놀이 지며 드리워진 짙은 황혼 속에 자신을 미행하는 발걸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