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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58화 (58/80)

〈 58화 〉 성 그라나의 길 (7)

* * *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루밀은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엘리라는 이름의 꼬마를 숙소로 데려다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리 쪽에서 무거운 충격을 느끼는 동시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읍, 으븝! 으브븝!"

다시 눈을 뜨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

거기다 입에는 재갈을 물려놓았는지, 아무리 목이 터져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신음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좋아요. 계획대로 되었네요."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던 루밀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는 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읍! 으읍!"

루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정말로 큰일 났다는 생각이 루밀의 머릿속을 빠르게 잠식했다.

'에일라 넬런! 젠장!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인 거야?!'

모략으로 무너뜨린 수도의 귀족 가문의 수만 다섯이 넘는 수도 리아트의 광견이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박살 내고 마는 잔혹한 여자.

에일라 넬런과 연관된 소문들이 루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루밀은 그 사실을 떠올리면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빠르게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돌아보는 루밀.

'…저녁 식사 때 내가 수도원장님에게 먼저 접시를 건네려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아니면 수도원 문을 바로 열어주지 않고 수도원장님에게 달려가서 수도원 입구에 덩그러니 내버려 두었던 일? 아니면 다른 일?'

빠르게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반추해 보는 루밀이었지만, 대체 무엇이 에일라 넬런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확신이 오는 것은 없었다.

'그 괴팍한 귀족 영애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루밀이 자포자기하려던 때, 루밀의 눈에 씌워졌던 안대가 벗겨지며 루밀은 자신이 어디로 끌려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반가워요. 루밀 바르텐 형제님. 형제님께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답니다."

"읍, 으읍!"

루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에일라 넬런.

그 말투는 무척이나 공손하기 그지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루밀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아, 재갈을 풀어주는 것을 깜빡했네요. 칼린, 어서 풀어주세요."

"알겠슴다."

에일라는 자기 옆을 지키던 붉은 머리의 포티아족 성기사에게 루밀의 재갈을 풀어줄 것을 명했고, 성기사는 그대로 에일라의 지시를 따랐다.

"푸하!"

무척 당황하는 동시에 극도의 공포심에 호흡하는 것조차 잠시 잊고 있었던 루밀은 재갈이 풀리자 황급히 숨을 토해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최대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정말인가요?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던데요."

"그, 그게…."

그러나 에일라 넬런은 고작 그런 연기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젠장, 어쩌지? 대체 뭘 물어보려고 이런 일을 벌인 거야?'

사실 루밀의 부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에일라는 루밀이 깨어나기 전에 엘리로부터 루밀과 대화했던 내용을 전해듣는 것으로 카르고 수도원장과 루밀의 관계를 대략 파악한 뒤였으므로.

"이상하네요. 루밀 형제는 카르고 수도원장에 불만이 많은 것 아니었나요? 엘리가 말하기론 수도원을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하던데요."

루밀은 그제야 자신이 엘리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영악한 꼬마 수녀님에게 당했군요."

그와 동시에 루밀은 에일라 넬런의 바로 뒤쪽에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던 엘리를 향해 눈총을 주었지만, 엘리는 오히려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태연하게 루밀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차라리 이건 기회야. 빌어먹을 카르고 수도원장과 그 패거리가 쫓겨나면 그놈들보다는 나은 수도원장과 수사들이 파견 나오겠지.'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몰려오자 루밀은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감정을 진정시킨 루밀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을 원하냐고 묻자, 에일라 넬런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자세한 내막까진 파악하지 못했지만, 카르고 수도원장은 무언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그 사실에 관해서 증언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루밀 형제님."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루밀의 질문에 에일라 넬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고, 루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은 카르고 수도원장님을 몰아내실 생각이십니까?"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루밀은 에일라의 대답을 기다렸고, 에일라의 입이 열리며 이내 대답을 내놓았다.

"그야, 잘못을 저지른 성직자가 있다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에일라가 루밀의 질문에 내놓은 답은 정론 중의 정론.

그렇기에 루밀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진심이다. 에일라 넬런은 진짜로 카르고 수도원장을 박살 낼 생각이야!'

일이 흐지부지되어 카르고 수도원장과 그 일파에게 괜한 보복을 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던 루밀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대답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루밀은 카르고 수도원장의 비리를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

"융숭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카르고 수도원장님."

"아이고, 아닙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같은 귀빈을 모실 수 있어 오히려 우리 수도원이 더 영광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에일라 넬런 일행이 루베릭 수도원을 떠나는 날.

카르고 수도원장은 연신 굽실거리며 루베릭 수도원을 떠나는 에일라 넬런 일행을 배웅했다.

"후아! 드디어 떠났군. 다행이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군!"

카르고 수도원장은 저 멀리 사라져가는 마차를 보며 희희낙락하며 손뼉을 쳤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카르고 수도원장님."

루밀은 저절로 비웃는 웃음이 지어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최대한 무표정한 표정으로 카르고 수도원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잘 가라. 망할 돼지 수도원장. 지금을 마음껏 즐겨 두라고.'

앞으로 한동안은 저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수도원장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겠지만, 끝이 이미 정해져 있는 고통과 끝조차 알 수 없는 고통은 애초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이미 그 끝이 예정된 고통 정도야 그 고통 뒤에 찾아올 달콤한 과실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 정도야 아주 우스운 일이었다.

"카르고 자르덴! 지금부터 그대의 루베릭 수도원장직을 정지하며, 조사를 위해 루베릭 수도원의 모든 재산을 임시로 압류한다!"

─이 주일 뒤.

루베릭 수도원에는 한 무리의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쳤다.

"아이고! 심문관님! 저는 억울합니다!"

카르고 수도원장은 그 두꺼운 볼살을 푸들푸들 떨면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그 행동은 이미 확실한 증인과 증언을 확보한 이단심문관들에겐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일 뿐이었다.

"길더스텐 님을 위해 사용해야 할 성금을 착복하고 교단을 속인 죄, 고행을 한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모르는 수습 수사들을 학대한 죄. 이미 이 두 가지 죄만으로도 그대의 죄는 무겁다."

"어, 억울합니다! 길더스텐 님에 맹세코 저는 절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자 입을 연 카르고 '전' 수도원장이었지만, 이단심문관이 뽑아 든 날카로운 칼날이 자기 목을 향해 겨눠지자 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더러운 입으로 길더스텐 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올리지 마라."

"……."

어떻게든 말로 이단심문관을 구슬리고, 뇌물을 바쳐 은근슬쩍 넘어가 보려던 카르고 자르덴의 시도는 그렇게 좌절되었다.

"아악! 저는 카르고 자르덴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이단심문관들의 조사 결과, 카르고 자르덴이 저지른 비리는 상당한 규모로 밝혀졌고, 이에 가담했던 루베릭 수도원의 수사들 역시 카르고 자르덴과 마찬가지로 수도 리아트의 이단심문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형제의 협조 덕에 길더스텐 님의 뜻을 흐리는 망령된 무리를 붙잡을 수 있었군. 감사를 표하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단심문관의 감사를 받는 루밀은 다소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카르고 자르덴과 그 일파가 모조리 쓸려나간 것은 무척이나 고소한 일이었지만, 그 일로 루베릭 수도원에서 수습 수사들을 관리할 수사들이 없어졌다.

따라서 교단이 새로이 수도원장과 수사를 파견할 때까지 루베릭 수도원은 한동안 수습 수사들의 손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을 생각하자니 막막함이 밀려온 것이었다.

"걱정할 것 없네. 새로 수도원장이 임명될 때까지는 심문관 몇몇이 남아 업무를 도울 것이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 그보다 루밀 형제. 형제에겐 따로 전해줄 소식이 있네."

이단심문관 몇몇이 남아 수도원 운영에 도움을 준다는 말에 한결 안색이 편해진 루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이단심문관이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를 한 통 건넸다.

"이, 이건…."

편지에 찍힌 인장을 확인한 루밀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길더스텐을 모시는 사제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교황의 인장.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곧바로 알아차린 모양이군. 남아서 수도원 일을 도울 심문관들을 잘 부탁하네. 루밀 바르텐 '수사'."

"…어째서입니까. 저는 그저 수습 수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직접 저를 정식 수사로 인정하시는 것은…."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루밀이 이단심문관에게 묻자, 이단심문관은 피식 웃으며 루밀의 질문에 답했다.

"수습 수사가 수도원장을 고발하는 일일세. 그만한 용기를 냈으니 이런 보상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의 추천도 있었으니 교황 성하께서도 그대의 정식 서품을 인정하신 것이지. 성사는 내가 수도원을 떠나기 전에 집전해 주겠네."

"…예?"

이것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지, 루밀은 그대로 우뚝 굳어버렸다.

"뭘 그렇게 놀라나?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은 자신을 아끼지 않고 길더스텐 님의 뜻을 사방에 펼치시는 분이시라네. 그런 분의 추천이니 교황 성하께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그, 그렇군요. 그런 분이신지는 몰랐습니다."

'내가 오해한 건가? 하지만 카르고 그 인간이 말한 소문은….'

루밀은 의외의 사실에 얼떨떨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서 자신을 납치까지 했던 인간이 루밀을 위해서 추천서까지 써 주었다니.

'무슨 병 주고 약 주기도 아니고….'

"그래, 항간에는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의 과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몰지각한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 이단심문소 소속의 이단심문관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은인이라네. 이 이야기는 내가 수도 리아트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말일세…."

혼란스러워하는 루밀에게 쐐기를 박듯, 이단심문관의 기나긴 에일라 찬양이 시작되었고, 루밀은 그 찬양의 대부분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에일라 넬런…진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런 성녀가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그 딱딱한 이단심문관이 그렇다면 그런 모양이지.'

*

"…큰일이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보라가 흉포하게 몰아치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세이사."

세이사는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새하얀 입김을 입으로 연신 뱉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사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붉게 상기된 뺨에 손을 대면 그 뜨거움에 금방 손을 떼게 되는 이마, 호흡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까지.

영락없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세이사도 말라 죽고 말 거야. 악랄한 놈들.'

나와 세이사가 지금 머무르는 장소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산길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조그마한 동굴이었다.

동굴 안에 불을 피워서 바깥의 추위를 막아내고 있지만, 땔감을 따로 구하러 나갈 수도 없는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저체온증으로 숨이 끊어지는 미래가 확정적이었다.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을 쥐게 되었다.

내 잘못이다.

내 안일한 판단이 지금의 상황을 불러왔다.

나는 그렇게 자책하며, 신경질적으로 동굴 벽을 두들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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