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59화 (59/80)

〈 59화 〉 성 그라나의 길 (8)

* * *

"에일라, 어째서 카르고 수도원장을 그 자리에서 처벌하지 않은 거야?"

루베릭 수도원이 이제는 조그마한 점으로 보이게 될 때쯤, 세이사는 내게 물었다.

"제 권한으로 즉석에서 수도원장을 처벌하면 부담이 심하니까요."

아마도 세이사는 처음 만난 에일라가 곧바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일을 떠올리며, 어째서 비리를 저지른 수도원장을 즉석에서 처벌하지 않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그때의 일이든 지금 카르고 수도원장에게 취해놓은 조치든 맥락상 큰 차이는 없었다.

"루베릭 수도원에서 카르고 수도원장의 비리를 밝히고 곧바로 처벌하는 일에 착수했다면 카르고 수도원장이 곧바로 "예 알겠습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일 리가 없죠. 자기가 수족으로 부리는 수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입막음을 시도하지 않겠어요?"

과거에 세이사를 도왔을 때는 곧바로 밀턴 백작을 그 자리에서 몰락시킬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고, 카르고 수도원장의 비리를 폭로하여 그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은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그랬어도 제 실력이면 허약한 수사 정도는 다 쓰러뜨릴 수 있지 말임다."

칼린의 말마따나 카르고 수도원장이 우리 일행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를 펼쳐도 단순한 무력으로 보자면 우리 일행이 명백히 우위에 있었다.

루베릭 수도원은 어디까지나 북부에서 성지순례를 하는 순례객을 투숙객으로 받으며 수익을 내는 수도원이었지, 성기사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기사 수도원이 아니었으니까.

"칼린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에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카르고 수도원장을 처벌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나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아무리 성기사에 비해 전투 능력이 부족한 수사라고 해도 우리 일행보다는 많은 수예요. 그들이 조직적으로 기적을 사용하며 저항하면 아무래도 모두를 지켜가며 싸우기는 어려워졌겠죠."

질에서는 우리가 우위에 있지만 수에서는 우리가 밀린다.

게다가 제대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칼린과 비상시에 터뜨릴 수 있는 일회성 폭탄인 나뿐이었으니, 나는 차라리 카르고 수도원장의 처벌이 미루어지더라도 루밀이 넘겨준 증거와 증언을 이단심문소로 보내 루베릭 수도원을 감찰해 달라고 요청하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저는 아직 별다른 공을 세운 적도 없는 성녀 후보에 불과해요. 성직에 입문한 세월만 놓고 보면 비교조차 불가능한 카르고 수도원장을 정면에서 처벌하는 것은 교단의 다른 성직자분들에게 경계심을 살 위험이 있어요."

리피샤 수녀원장의 도움을 받아 교단에서 알력 다툼을 벌이는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중인 내가 벌써 천방지축 날뛰며 그들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은 좋은 수라 할 수 없었다.

"…모든 성직자가 다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구나."

"그것참 신랄한 말씀임다."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사와 교단의 '일부' 부패한 성직자를 비판하는 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내 말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린.

'뭐, 그거야 표면적인 이유고, 진짜 이유는 일행이 위험에 처할 상황을 아예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유는 내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나도 쑥스러워서 말하지 않으리라.

[시후는 솔직하지 못하네요.]

'시끄러워.'

에일라가 나를 놀리듯이 한마디 했지만, 나는 시끄럽다며 그 말을 일축했다.

*

"…그래서 엘리, 엘리를 따라다닌다는 그 '리나'라는 친구는 아무런 말이 없나요? 이래서야 소득이 있을지…."

우리가 루베릭 수도원을 떠난 지 일주일이 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다.

당연하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일행은 부지런히 성 그라나의 길을 달렸고, 순례길에 놓인 여러 성지와 수도원, 마을 등을 거친 우리는 성 그라나의 길에서 최대의 고비라고 불리는 라우리파 산을 넘어가는 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니에요. 에일라 언니! 리나는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어요! 리나는 엘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친구가 아니에요!"

그러나 순례길에 오르게 된 이유 중 하나인 엘리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나는 슬슬 엘리의 주장에 의문을 가지게 된 상황이었다.

'코니엘 신부님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코니엘 신부님은 편지에서 엘리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순례길에서 엘리가 보여준 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이 없었다.

'뭐, 엘리의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게 딱히 손해가 될 것은 없지만.'

엘리는 영악하게도 자신의 어린 나이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주변의 경계심을 허물며 주변의 정보를 수집해 오거나, 제법 감이 좋은지 이번 순례길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경보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엘리에 관한 것이든, 칠요의 성석을 빛내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그래도 엘리와 목걸이를 바라보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성녀 후보들은 뭘 하고 있으려나? 클라우디아 앨러나흐나 에리올 루펜은 이미 세워둔 계획이 있는 모양이었는데, 단서를 잡았으려나? 에린 에드피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을 생각하면 감도 안 잡히고.'

다른 성녀 후보들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과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모조리 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슬슬 밀려오고 있었기에 더더욱.

'게다가 저 산…라우리파 산이라고 했던가? 저기서 습격을 당한다면….'

더불어 지금 진입을 앞둔 라우리파 산에서 기습을 당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에 관한 고민까지 더해지니 내 얼굴은 자연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윽

그렇게 내가 고민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손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사?"

내가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세이사였다.

"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

"…그런가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세이사의 얼굴을 보고,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냈다.

"잠시 생각이 많아졌던 모양이에요. 굳이 지금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까지 걱정하고 있었으니 말이죠."

"참견쟁이답네. 가끔은 머리를 비울 필요가 있다고."

나와 세이사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는지, 가볍게 내게 핀잔을 주며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드는 티아.

"걱정할 필요 없슴다. 에일라 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제가 다 치워버리겠슴다!"

거기에 호응하여 제 가슴을 탕탕 치며 걱정 말라며 호언장담하는 칼린.

"걱정하지 마요! 에일라 언니! 엘리가 있으니 이번 순례길은 무조건 대성공이라고요!"

그에 자극받았는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마찬가지로 호언장담하는 엘리.

"저, 저도 잠깐의 동행이지만 에일라 성녀 후보님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거기에 굳이 나를 도울 필요도 없으면서도 내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루피아까지.

'그래,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자.'

그 얼굴들을 천천히 돌아보고 있자니 나 혼자 고민에 빠졌던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알았어요. 그럼 이번 순례길에서 제일 험난하다는 저 라우리파 산을 빠르게 넘어가도록 하죠."

그래서 나는 모두의 얼굴을 돌아보며 머릿속에 떠올렸던 고민을 한쪽으로 치워버리기로 했다.

'그래,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지금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

"찾았다."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는 이따금 사냥을 위해 찾아오는 사냥꾼이나 약초를 캐러 오는 약초꾼, 순례를 위해 찾아오는 순례객 말고는 거의 없는 라우리파 산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

온몸에 검은 로브를 두르고 얼굴에는 은색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듣는 사람이 있었다면 소름이 끼쳤을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느껴졌다.

"우선 저들을 흩어놓는다."

험한 산길을 부지런히 달리는 마차 한 대.

그 마차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남자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쿠르릉

남자의 발구름에 응답하듯 새카만 먹구름이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며 라우리파 산 위의 하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라우리파 산은 변화무쌍한 기상으로 조난자가 자주 발생하는 산. 따라서 목표를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수수께끼의 남자는 이번에는 라우리파 산 위에 몰려든 먹구름을 향해 손짓했다.

"몰아쳐라. 저들의 길을 가로막으며 새하얀 암흑 속에서 헤매게 만들어라."

남자가 먹구름에 명령을 내리듯 주문을 외우자, 먹구름은 새하얀 재앙을 라우리파 산 위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

"이거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시 마차를 세우고 버틸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마차를 몰던 피루스 씨는 갑자기 하늘 위로 몰려드는 먹구름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아요. 눈과 얼음의 땅에선 자주 있는 일이라 분명해요."

루피아 역시 하늘을 뒤덮은 심상치 않은 구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눈보라를 예견했고,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은 새하얀 눈송이를 지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루피아 씨의 기적으로 눈을 그치게 할 수는 없나요?"

군대에서 봤던 것 이상으로 반갑지 않은 눈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루피아에게 물었지만, 루피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아렌 신관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몰라도, 제게는 무리예요. 어설픈 실력으로 눈을 그치게 하면 오히려 아가드 님의 분노를 사서 더 심하게 눈이 쏟아질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꼼짝없이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며 야영을 하게 생겼다.

게다가 지금 우리 일행이 있는 곳은 난간조차 없이 낭떠러지를 바로 옆에 둔 험하디험한 산길 위.

절대 야영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일단 야영을 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마차를 몰겠습니다. 분명 조금만 더 가면 눈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이…이런!"

피루스 씨가 절벽 위를 바라보며 다급히 말을 채찍질하는 모습에 나를 비롯한 모두가 절벽 위로 시선을 옮겼다.

"눈사태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르

해빙기에도 미처 녹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있었던 라우리파 산의 눈은, 갑자기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에 균형을 잃으면서 우리가 있던 곳을 덮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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