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성 그라나의 길 (9)
* * *
"두려워 마라. 내가 너를 나의 사도로 삼을 것인즉, 그 어떠한 것도 너를 위협할 수 없을…크읏!"
나는 눈사태가 쏟아지는 것을 보자마자 급히 기적을 사용해 보호막을 치려고 했으나, 성난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눈사태는 기적을 발동하는 데 필요한 경전의 암송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우리 일행을 덮쳤다.
─히이잉! 콰직!
눈사태에 직격당한 말들이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와 압도적인 눈의 질량에 직격당한 마차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며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세이사! 티아!"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라면 아직 완성되지 못한 보호막이라도 최소한의 방호성능은 있었고, 마차가 눈사태가 직격당하며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가려던 세이사와 티아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 살았다…."
"티아, 지금 안심할 때가 아니에요! 어서 몸을 웅크리세요!"
티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았다는 말을 꺼냈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뭐? 아아아아악! 떨어진다!"
내 지적을 듣고 발밑을 바라본 티아는 우리가 지금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일단 가까이 붙으세요! 보호막이 완전하지 못해서 범위가 좁아요!"
제대로 완성되었다면 눈사태에서 마차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겠지만, 미완성인 보호막이었던 탓에 그 영향력은 내 주변으로 한정되었고, 낙하의 충격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에일라, 낙하가 가까워지면 보호막에 사용하는 신성력의 출력을 높여줘!'
[시후, 괜찮겠어요? 지금은 기적의 불완전한 발동으로 탈진하지 않았지만, 신성력의 출력을 높였다가는 이전처럼 탈진해서 정신을 잃고 말 거예요.]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지금은 세이사와 티아를 지켜야 해!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눈사태로 마차가 박살 나며 흩어지게 되었지만, 칼린은 괜히 성녀 후보의 호위기사로 뽑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허공에서 몸을 허우적거리는 마부, 피루스 씨를 붙잡아 눈사태가 쏟아지지 않은 비탈길에 착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거기에 루피아 글라체스 역시 얼음과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가드의 사제답게 재빠르게 얼음으로 만든 방벽을 주변에 세우는 것으로 엘리를 보호하며 눈사태를 버텨냈다.
요컨대, 일행 중에서 지금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나와 세이사, 티아뿐이었다.
물론 '천사의 날개'라는 이름의 기적을 사용해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미 나는 '신성한 보호막'을 쓰느라 '천사의 날개'를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괜히 도박수를 던졌다가 내가 도중에 탈진해서 쓰러진다면 나는 물론이고, 세이사와 티아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결국, 내게는 지금 있는 보호막이나마 강화해서 낙하의 충격을 버텨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모두 가까이 붙으세요!"
서로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세이사와 티아를 끌어당긴 탓에, 졸지에 셋 중에서도 가장 체구가 작은 에일라가 다른 두 명 사이에 끼어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내 몸 위로 무언가 부드러운 것들이 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가까이 다가온 바닥을 앞에 두고 그런 팔자 좋은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를 믿고 행하여라."
미처 외우지 못했던 경전의 나머지 구절을 영창하자, 미약하게 빛나던 보호막이 밝게 빛나며 그 부피를 늘렸다.
─콰창!
낙하의 충격을 최대한 줄여보고자 바닥에 부딪히는 보호막의 면적을 최대한 늘렸던 내 시도가 마냥 헛되진 않았는지, 보호막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 버렸어도 나든, 세이사든, 티아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기는 했어도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살았네요."
보호막이 낙하의 충격을 충분히 상쇄해 줄 것이라 믿긴 했지만, 막상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 맥이 탁 풀리면서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급히 기적을 사용하기도 했거니와, 보호막이 채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눈사태에 1차 충격을 받아 불안정했던 보호막에 낙하의 충격을 버틸만한 내구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소 무리하게 신성력을 쥐어 짜낸 탓이었다.
'아, 여기서 뻗어버리면 곤란한데….'
나는 밀려오는 탈력감으로 자꾸만 감겨오는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주며 옆에 나란히 떨어진 세이사와 티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세이사?"
세이사 쪽을 바라보니 세이사는 의식을 잃고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설마…아니에요. 그럴 리가…."
그 모습에 피곤한 것조차 잊어버리고 급히 세이사의 손목을 붙잡아 맥을 짚어보니, 정상적으로 뛰는 세이사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기절한 거였군요. 다행이에요."
지금은 단순히 기절했을 뿐, 세이사는 무사하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사사사사, 살았나?"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눈을 질끈 감은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았으니 어서 일어나세요. 티아."
"어, 어어, 정말로?"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믿을 수 없었는지 티아는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며 벌떡 일어섰다.
"저, 정말이네. 으으, 옷이 완전 눈투성이가 되어버렸잖아."
놀란 토끼 눈을 한 티아가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자, 티아의 까만 수녀복에서 하얀 눈이 후두두 떨어졌다.
"티아, 그것보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 안전한 곳을 찾아…."
나는 투덜거리며 옷에서 눈을 털어내는 티아를 향해 입을 열었지만,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피로감에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뭐? 아, 그렇지. 또 눈사태가 쏟아지면…잠깐만? 야! 에일라! 네가 쓰러지면 어떡하라고!"
티아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것으로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 세이사! 아악! 세이사까지 기절했잖아?! 어, 어떡하지?"
'세이사도 기절한 이상, 부탁할 사람이라고는 티아 말고는 없으니 확실히 전달해야 하는데….'
급히 세이사를 찾았으나 세이사마저 기절한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진 티아가 절규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결국 내 의식은 밀려오는 수마에 굴복하고 말았다.
*
"으아, 진짜!"
티아 이글라스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산길을 지나가는데 다짜고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눈보라가 몰아쳤고, 눈사태가 일어나 마차를 덮쳤다.
마차에서 튕겨 나가 이젠 정말 끝인가 싶은 상황에서 에일라가 재빠르게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티아 이글라스라는 인간의 생은 정말로 끝장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나더러 어떻게 두 명을 옮기라고!"
눈사태에서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라우리파 산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실에 안주하며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다가는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움직여야 했지만, 기절한 두 사람이라는 짐까지 떠안고서 무사히 눈보라를 피할 곳을 찾을 자신이 티아에겐 없었다.
"끄으으응…. 알았어! 하면 되잖아! 이걸로 빚은 없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 한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말하듯이 피부로 파고드는 추위는 티아에게 선택을 강요했고, 티아는 고민 끝에 두 사람을 데리고 눈보라를 피할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뭐라도 긁어모아야겠어. 뼈 빠지게 일만 하던 수녀원 생활에 감사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결론을 내린 티아는 우선 눈사태에 휩쓸려 같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마차의 잔해를 긁어모았다.
물리적으로 두 사람을 업어서 이동할 수는 없었으니, 티아는 수녀원에서 이것저것 일을 하며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어설프게나마 판자와 밧줄을 이어붙여 배 같기도, 썰매 같기도 한 형태의 기물을 만들어냈다.
물론 임시변통으로 만든 물건에 불과해 그 외양은 투박하고 볼품없었지만, 티아는 기절한 에일라와 세이사, 두 사람을 그 위에 태우고, 거기에 연결한 밧줄을 손으로 끌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끄응!"
두 사람분의 무게가 실린 탓에 티아가 급조한 썰매는 티아의 생각보다 앞으로 잘 나아가지 않았지만, 티아는 이를 악물고 밧줄을 잡아당겼다.
"두고 봐! 반드시 살려서 이 은혜를 두고두고 갚게 해줄 테니까!"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며 티아는 썰매를 끌며 계속 걸음을 옮겼고, 얼마 안 가 티아는 절벽이 천장이 되어주며 눈보라를 잠시나마 피할 수 있을 법한 장소를 발견했다.
"불, 불이 필요해."
간신히 눈보라를 피할 장소를 찾았지만, 티아는 쉴 틈이 없었다.
아무리 눈보라를 피할 장소를 찾았지만, 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체온을 유지해줄 화톳불을 피우지 않으면 금방 체온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제발…붙어라, 붙어!"
부서진 마차의 잔해 속에서 챙긴 부시와 부싯돌을 손에 쥐고 티아는 간절함을 담아 소리쳤다.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썰매를 끌고 온 탓에 티아의 손은 이미 빨갛게 부어오르고, 입술은 추위에 파랗게 질린 상황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지금 티아의 머릿속엔 없었다.
지금 불을 피우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기껏 힘들여 끌고 온 두 사람마저 목숨을 잃는다.
그 사실이 부시와 부싯돌을 양손에 쥔 티아의 손에 힘을 주었다.
"됐다!"
부시와 부싯돌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는 것을 확인한 티아는 재빠르게 부싯깃을 꺼내 불씨를 옮겨붙였고, 부싯돌과 부시 사이에서 튀어 오른 불똥을 받아들인 부싯깃은 이내 붉은 불꽃을 만들어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긁어모으긴 했는데…. 이래서야 얼마나 버티지?"
티아는 땔감으로 쓸 생각으로 썰매에 실었던 나무토막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암담한 표정이 되었다.
불을 피우려면 땔감이 필요한데, 티아가 급조한 썰매를 해체해서 땔감으로 전용하더라도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양이었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지."
티아는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생각을 치워버리고, 일단 썰매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에일라와 세이사를 썰매에서 내려 불가에 눕혀놓았다.
"휴우…."
거기까지 일을 마치고 바닥에 추욱 늘어진 티아의 몸으로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졸지에 에일라와 세이사 두 명과 잡다한 물건들이 실린 썰매를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티아는 이대로 쓰러져 팔자 좋게 잠들 수 없었다.
적어도 한 명은 깨어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산짐승의 접근을 막고 불씨를 지켜야 했으니까.
"제발 아무나 일어나…."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로 정신 차리라며 세이사와 에일라의 몸을 붙잡고 흔들어보는 티아.
"으음…."
그런 티아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세이사의 눈꺼풀을 잘게 떨리더니 이내 눈이 떠졌다.
"세이사, 다음을 부탁해…."
마침내 세이사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티아는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이게 도대체?"
하지만 세이사로서는 눈을 뜨자마자 두 사람의 간호와 불씨 관리, 불침번까지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당황하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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