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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61화 (61/80)

〈 61화 〉 성 그라나의 길 (10)

* * *

"아, 마차가 눈사태에 휩쓸려서…."

당황한 것도 잠시, 세이사는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 곯아떨어진 티아의 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보며 상황을 이해했다.

"…티아도 최선을 다했구나."

세 사람 중에서 생활력을 놓고 보자면 가장 뛰어난 세이사의 눈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조금 보였지만, 수녀원에서 힘든 일을 피해 가려고 꾀를 피우던 티아를 생각해보면, 신의 분노로 하루아침에 드높았던 산이 커다란 호수로 변해 버렸다는 전설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티아의 변화였다.

"티아도 이렇게 노력해 줬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칼린 씨라던가 다른 분들이 우리를 찾을 때까지 버틸 준비를 해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세이사는 먼저 티아가 피워놓은 화톳불을 향해 다가갔다.

티아가 화톳불을 피워놓긴 했지만, 고작해야 횃불 수준에 불과한 티아의 화톳불은 매서운 눈보라를 버틸 만큼 충분한 열기를 제공할 수 없었다.

"티아가 만든 썰매를 장작으로 쓰는 수밖에 없네. 아, 이 나무토막도 쓸 수 있겠다."

불을 더 크게 피우기 위해 세이사는 티아가 썰매에 실었던 나무토막을 꺼내, 큼지막한 것부터 바닥에 쌓아 올렸다.

"눈을 맞은 장작이라 연기와 그을음이 심하게 나오고, 불도 잘 붙지 않겠지만…"

눈을 맞아 축축하게 젖어버린 장작의 상태를 본 세이사는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천천히 타오르는 젖은 장작의 특성상 한정된 물자를 가지고 얼마나 버텨야 할지 장담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불은 이걸로 해결했고, 다음은 식량이네."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로 티아가 피운 불을 옮기는 것으로 불 문제를 해결한 세이사는 곧바로 다음 문제에 착수했다.

"눈보라 때문에 나무 열매나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니 최소한 눈보라가 걷힐 때까지는 지금 가진 것들로 버텨야 해."

그렇게 세이사가 각자가 소지한 소지품, 티아가 이것저것 긁어모은 잡동사니 등을 뒤져 식량으로 쓸 수 있는 것을 한자리에 모아본 결과.

"육포 조금, 딱딱하게 굳은 흑빵 조금, 그래놀라 조금이 전부네…."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언제 눈보라가 그칠지도 모르는데, 이것을 아무리 아껴 먹는다고 해도 일주일은 버틸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나마 식수는 사방에 널린 눈을 녹여서 쓰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물에 육포라도 우려내서 마셔야 하나…?"

지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이 들었다면 제정신이냐며 경악했을 말이었지만, 세이사는 반쯤은 진심이었다.

"아니야, 이건 나중에 더 생각해보자. 그보다 에일라와 티아가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해."

그러나 세이사의 그런 생각은 세이사가 두 사람이 괜찮은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으로 중지되었다.

만약 세이사가 두 사람을 간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깨어나자마자 딱딱했던 육포가 흐늘흐늘해질 때까지 푹 우려낸 소금물을 꼼짝없이 마셨어야 에일라와 티아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

"…으."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리며,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리니 새하얀 빛이 눈으로 쏟아졌다.

"에일라! 일어났구나!"

반색하며 내게 다가온 세이사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절벽 아래에 눈보라를 피해 여러 잡동사니를 쌓아 올려 벽을 두른, 허름하지만 아늑한 느낌이 드는 임시 거처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마워요. 세이사. 그보다 여기는 어디죠?"

우선 세이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자, 세이사는 내 뒤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누워있는 티아가 고생해가면서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야."

"더는 못가…."

공교롭게도 세이사의 설명에 티아의 잠꼬대가 더해지자, 벽에 기대 힘없이 주저앉은 티아의 주변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꿈에서도 저 썰매를 끌고 있는 모양이네요."

"그래도 내가 일어났을 때는 불까지 피워놨었어. 티아도 죽을힘을 다해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려왔을 거야. 내가 일어나서 티아 손을 살펴보니까 빨갛게 물집이 잡혀 있었어."

"…그런가요."

세이사의 부가 설명을 들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티아 쪽을 향해 다가가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수고했어요. 티아."

티아는 겁쟁이에, 남의 눈치를 살피는 소심한 성격이 여전할 텐데도 나와 세이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거점을 마련했다.

단순히 혼자서 이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정신을 잃은 사람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데리고 눈보라를 피할 거점까지 확보한 후 기절했으니, 티아의 행동에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9점을 줘도 아깝지 않았다.

"그보다 세이사, 티아의 손에 물집이 잡혔다고요?"

"응. 일단 눈을 녹여서 만든 물로 손을 씻기기는 했지만, 가진 약재가 없어서 치료하지는 못했어. 하다못해 성수라도 있었으면 소독이라도…."

세이사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낙심한 듯 고개를 떨궜지만, 나는 그런 세이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이사, 성수라면 간단히 해결할 방법이 있잖아요?"

"뭐? 아, 그랬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은 세이사였지만, 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이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은 눈을 녹이면 되니 재료는 충분해요. 따로 성수를 담을 그릇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내 말을 듣자마자 후다닥 바깥으로 달려 나가 눈을 퍼담기 시작하는 세이사.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에일라에게 말을 걸었다.

'에일라, 역시 이번 눈사태는….'

[시후가 생각한 대로 그들의 습격일 가능성이 커요.]

'그래.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막무가내인 방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어.'

적어도 그들이 우리 일행을 다시 습격한다면 직접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고, 아예 눈사태와 눈보라를 일으키는 과격한 수단을 사용했다.

'과대평가를 받아도 별로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걸.'

그 행동에서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이 내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덤벼들어 우리 일행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면, 눈사태를 일으킨다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했을 리가 없다.

'눈사태로 우리 일행을 분단시켜 전력을 줄인 뒤에 상대할 생각이 분명해.'

그 사실을 떠올리니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라우리파 산에 눈보라를 펼쳐 방해꾼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한 그들은 지금 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찾으려고 산을 뒤지고 있을 칼린 일행이 그들과 마주한다면?

"…이대로면 칼린 쪽도 위험할 수 있겠어."

상황을 자각하자, 몰려오는 위기감에 절로 위가 따끔거리며 속이 메슥거렸다.

'젠장, 듣는 사람이 있으니 생각으로도 욕을 못 하겠어.'

속으로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에일라가 들을 테니 할 수 없었다.

[시후, 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에일라는 자신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내게 따라붙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에일라를 배려하는 것이었고.

"에일라. 방금 그 말, 대체 무슨 말이야?"

두 번째 이유는 어느새 깨어난 티아가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

"하압!"

"크아악!"

기합성을 내지르며 칼린이 검을 휘두르자, 새까만 로브를 두른 사람이 붉은 피를 새하얀 눈 위에 흩뿌리며 쓰러졌다.

"또 이놈들임까."

칼린은 평소의 여유롭고 능글맞던 말투를 버리고, 초조함이 담긴 푸념을 내뱉었다.

"칼린 기사님은 이 수상한 사람들을 아시는 건가요?"

그러자, 칼린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로브를 두른 사람을 제압한 루피아 글라체스가 곁에서 질문을 던졌다.

"저도 자세히는 모름다. 하지만 이놈들이 에일라 성녀 후보님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슴다."

대답을 마친 칼린은 후우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지 않슴까."

그곳에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방금 칼린의 손에 쓰러진 자와 비슷하게 붉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크흐흐흐흐."

"크하하하하하."

아직 숨이 붙은 채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이들은 광기가 느껴지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멍청한 신의 종복 같으니. 크흐흐."

"너희들의 끝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다! 하하하!"

거기에 칼린 일행을 향해 조롱과 저주가 담긴 말까지 자기들 좋을 대로 툭툭 뱉어대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와도 같았다.

"시끄럽슴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들의 입을 칼자루로 후려치는 것으로 조용하게 만든 칼린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이 모양이라 배후를 캐내기는 글렀슴다."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피루스 씨와 에린 양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뭐…그 두 사람은 조용히 숨어있는 편이 나을 검다. 안 그래도 수에서 밀리는데 인질까지 잡힌다면 절망적임다."

습격자의 다리 위에 올려놓은 발에 은근히 힘을 주며 칼린은 여전히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라우리파 산의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서둘러 에일라 성녀 후보님을 찾아야 함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 습격을 기획한 우두머리를 찾아서 없애버려야 함다.'

차마 그 길에 부외자인 루피아를 강제로 데려갈 수는 없어서 뒷말을 삼키는 칼린이었지만, 루피아는 이미 행간에서 그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칼린 기사님. 저도 돕겠습니다."

"위험한 일임다. 차라리 루피아 사제님은 여기 남아 피루스 씨와 엘리 자매를 보호해 주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슴다."

칼린의 말은 정론이었다.

이번 습격은 에일라 넬런을 노린 수수께끼의 단체가 일으킨 것이었고, 같은 신을 모시는 사제도 아닌 루피아 글라체스가 굳이 끼어들어 에일라 넬런 일행을 도울 의무는 없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은 우리의 사정을 듣고 곧바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하신 은인입니다. 그런 분을 여기서 정체도 모를 사교도들에게 당하게 할 순 없습니다."

"…알겠슴다."

루피아의 말에 굳은 의지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린 칼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루피아 사제님은 피루스 씨와 엘리 자매의 호위를 맡아주셨으면 함다."

"네? 그렇지만 저는 칼린 기사님을 도와…."

"그렇다고 여기다 둘을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지 않슴까."

"아, 그렇네요."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루피아였지만, 이어진 칼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엘리 자매가 말하기를 근처에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으니 그쪽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고 하지 않았슴까? 에일라 성녀 후보님도 엘리의 말을 마냥 흘려듣지는 않았으니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름다."

"글쎄요. 그건…."

하지만 뒤에 이어진 칼린의 제안에 루피아는 난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린아이의 말에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으니 말이다.

"저도 이해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슴다. 지금 우리가 의지해 볼 곳은 그것 말고는 없슴다."

"…어쩔 수 없네요. 신들께선 가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지혜를 빌려주시는 일도 있으니, 이번이 그런 것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네요."

그러나 그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루피아도 그런 칼린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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