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성 그라나의 길 (11)
* * *
"칼린 쪽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냐고."
"…티아와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티아는 내게 고개를 들이밀며 조금 전에 내가 중얼거린 말이 무슨 의미냐며 추궁했고, 나는 너무 가까이 다가온 티아의 얼굴을 외면하는 동시에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했다.
기절한 나와 세이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만만치 않은 기력을 소모했을 티아였다.
괜히 티아의 두려움을 자극해 불안감을 조장할 이유도 없는 데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뾰족한 방책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말벌이 들끓는 벌집을 앞장서서 건드릴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 취한 태도였다.
"관계없는 일일리가 없잖아!"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내 얼버무림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나를 향해 크게 소리친 티아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두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었다.
"시네티 마을에서도, 수도에서도, 그리고 여기서도! 왜 맨날 에일라 너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는 건데!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머리냐고!"
아무래도 벌집을 피하자는 생각으로 길을 우회하려던 나는 수풀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티아, 그건…."
"아아, 몰라! 이렇게 된 거 다 말하지 않고서는 못 참겠어!"
그동안 속에 응어리진 것이 많았는지,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담아두었던 말을 쏟아내는 티아의 기세에 놀란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미 티아는 말 몇 마디로는 제지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하고 있었다.
"시네티 마을의 일은 내 잘못도 있으니 따질 자격이 없지만! 적어도 그때 한 번 죽을 뻔한 경험을 했으면 이후로는 몸을 사릴 생각을 해야지! 기적을 쓸 때마다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쏟아지니 우쭐한 기분이라도 들었던 거야? 아니면 에일라는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야?"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시네티 마을에서 악마를 쓰러뜨리느라 억지로 기적을 쥐어 짜냈다가 피를 토하고 죽을 뻔했던 경험을 겪었으면 보통은 몸을 사릴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은 나 역시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에일라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는 제어가 조금은 수월해졌는데….'
물론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활활 타오르는 불에 휘발유를 들이부은 꼴이 될 테니까.
"……."
차라리 이럴 때는 침묵이 답이었다.
티아도 격분한 상태에서 머리를 식힐 시간이 주어지면 냉정함을 되찾을 테니까.
"말해."
아무래도 잠깐의 침묵은 티아의 분노가 식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
"말하라고!"
나는 다시 한번 침묵을 시도해 보았으나, 티아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기라도 했는지 집요하게 내 대답을 요구했다.
"에일라! 눈을 가져왔어! 어?"
그래도 계속해서 침묵을 지킨 보람이 있었다.
잠깐 눈을 퍼오기 위해 나갔던 만큼 세이사는 금방 돌아왔고, 티아가 나를 추궁하느라 벽에 밀어붙인 상태 그대로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둘 다 무슨 짓을 하려던 거야?! 여, 여기서 그런 짓은…!"
"아니에요! (아니거든!)"
아무래도 상황을 오해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세이사의 모습에 나와 티아는 거의 동시에 부정의 의미를 담아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
"아, 그랬구나. 나는 또…."
세이사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 뻔했던 헤프닝이 있었지만, 시간을 들인 나의 필사적인 설명 끝에 어떻게든 오해를 풀 수 있었다.
"……."
하지만 티아는 조금 전 침묵으로만 일관한 내 태도가 불만이었는지, 처음에 세이사의 오해를 부정한 이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덕분에 세이사의 오해를 푸는 것은 오롯이 내 역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같이 부정했으면 이럴 때는 도와주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나는 그런 불만을 담아 티아를 슬쩍 바라보았지만 티아는 단단히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돌리는 것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에일라, 눈이 다 녹았어!"
그러는 와중에도 하던 일은 계속되어, 세이사가 퍼온 눈을 적당한 그릇에 담아 화톳불 위에 올려 만들어낸 물을 성수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혹시나 파상풍이라도 생길까 싶어, 채혈용으로 쓸 단검을 불에 살짝 달구고 팔팔 끓인 물로 날을 깨끗하게 씻어냈고, 성수로 만들 물이 담긴 그릇 앞에 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 끝에 조그맣게 상처를 냈다.
"…됐어요."
이후로는 시네티 마을에서 성수를 만들 때와 같았다.
물 위에 떨어진 내 핏방울이 물속에서 잉크처럼 퍼져나갔다가 밝은 빛을 발했고, 길더스텐 교단의 상징인 십자 문양, 다시 말해 성표가 물 위로 떠 오르는 것으로 이 물이 성수로 바뀌었음을 증명했다.
"티아, 손을 내미세요."
"……."
여전히 '나는 화났다!'라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침묵을 고수하는 티아였지만, 의외로 손을 내밀라는 지시에는 고분고분히 따랐다.
"뭔가요. 이게."
그렇게 티아의 손을 직접 마주한 나는 그 참담한 모습에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장갑조차 끼지 않은 채로 썰매를 연결한 밧줄을 끌었던 탓인지 티아의 손바닥 한가운데에는 새빨간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고, 그 밧줄 자국을 따라 물집이 드문드문 잡혀 있는 것이, 도저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손이 아니었다.
괜히 세이사가 약재가 없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쉰 것이 아니었다.
"엉망이잖아요. 티아."
"……."
책망과 미안함이 담긴 내 말에도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는 티아.
나는 그런 티아의 손 위로 조심스레 성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읏."
상처에 성수가 닿자, 따가운 느낌이 들었는지 티아는 몸을 움찔했다.
"치료가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이걸로 손의 상처가 곪을 걱정은 없을 거예요."
내 장담대로, 붉게 부어올랐던 티아의 손이 원래의 색으로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잔뜩 잡혀 있던 물집 역시 조금이나마 그 크기가 줄어드는 것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고마워."
아무리 화가 나서 입을 다물었다지만, 결국 고맙다는 말을 참지 못하고 말하고 마는 것이 티아답다면 티아다웠다.
"티아가 제게 화가 났다는 건 잘 알았어요. 하지만 티아,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요. 티아는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이참에 화해의 손길을 건넬까 싶어 입을 열었지만, 말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은근히 낯이 뜨거워지는 대사였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니, 어으 닭살.
"정말이야?"
그러나 그런 낯부끄러운 말이 티아에겐 무척이나 와닿았던 모양이었다.
티아가 나를 향해 보내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부담감이 밀려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요."
…뭐, 그래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티아를 계속 내 곁에 두는 것으로 악마와 손잡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노릴 것이고, 그럴수록 그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수월해지리라는 계산 역시 있었으니까.
게다가, 나나 티아와 마찬가지로 표적이 된 셀린 엘리어드 영애는 곁에서 그녀를 지켜줄 남자들이라도 있지만, 티아는 그런 것도 없었다.
원래라면 티아의 안전을 위해 수녀원에 두고 보호할 생각이었지만, 나를 따라오겠다고 티아가 요구한 이상, 내 힘이 닿는 한 보호해 줘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화해의 의미를 담은 악수였다.
"자! 그럼 화해했다는 의미로…."
세이사는 그런 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티아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지만, 그 말은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콰앙
부서진 마차의 잔해와 잡동사니, 티아가 어설프게 만든 썰매 등을 쌓아 만든 벽을 무너뜨리며, 새까만 로브와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
"엘리 자매님? 정말 이 길이 맞슴까?"
칼린은 피루스 씨에게 업힌 채로 동행 중이던 엘리를 돌아보며 정말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는지 되물었다.
지긋지긋하게 몰려들던 검은 로브의 인간들을 쓰러뜨리고, 더는 그들이 쫓아올 수 없도록 몸을 숨기느라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 탓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으니 마음이 절로 급해진 칼린이었다.
"맞아요! 점점 기운이 가까워져 가고 있어요!"
반신반의하는 칼린과는 달리 길잡이 역할을 맡은 엘리는 확신이 가득 담긴 말로 목적지가 가까워져 가고 있음을 호언장담했고, 칼린은 그 말을 믿는 것으로 불안함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 눈보라…이상한 느낌이에요. 악마들이 풍겨대는 지독하게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면서도 신성한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다니."
그러나 기적을 사용하여 일행을 향해 몰아치는 눈보라를 누그러뜨리던 루피아도 무언가 이상한 점을 감지하고는 입을 열자 칼린의 불안감은 한층 증폭되었다.
"마력과 신성력이 동시에 느껴진다는 검까?"
"네. 이런 기운은 저도 처음 봐요. 원래라면 이 두 힘은 서로 반발하는 것이 정상인데…."
"…아무래도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슴다."
칼린이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수도에서 상대했던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성녀 후보의 호위기사로 뽑힐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티롤프의 공격을 너무나도 가볍게 막아내던 수수께끼의 인물.
그는 신성력이 담긴 티롤프의 검격을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내뿜는 것으로 상쇄했었고, 사람을 악마로 타락시키는 무시무시한 사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가 직접 에일라 일행을 노리고 움직였다면 눈사태로 고립된 에일라 일행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에일라 님, 제발 무사히 버티고 있어야 함다.'
초조함에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고, 주변을 살피는 눈에는 핏발이 섰다.
"아! 저 아래에요! 저기에서 기운이 느껴져요!"
그런 칼린에게 엘린의 외침은 망설임을 앗아갔다.
"제가 먼저 가 보겠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엘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절벽 아래를 껑충껑충 뛰어 내려가는, 칼린의 모습에 엘리를 제외한 일행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콰앙
그리고 칼린이 뛰어내린 절벽 아래에서 곧바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 우리도 서두르죠!"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 루피아는 기적을 사용하여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얼음길'을 만들었고, 혹여나 칼린에 뒤질세라 재빠르게 그 길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갑자기 이걸 타고 내려가라니요!"
"하하하! 피루스 아저씨는 겁쟁이였네요!"
그리고 그 뒤를, 이대로 눈보라 속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얼음길 위에 올라탄 피루스 씨의 절규와 잔뜩 신이 난 엘리의 환호 소리가 뒤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