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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63화 (63/80)

〈 63화 〉 성 그라나의 길 (12)

* * *

─콰앙

우리가 머무르던 절벽 밑은 그다지 넓은 장소도 아니었던 탓에, 벽이 무너지며 튀어 오른 파편들은 당연하게도 우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윽!"

충격으로 날카롭게 쪼개진 나무 파편은 충분히 위협적인 흉기였고, 벽이 무너지는 동시에 나와 세이사를 감싸며 보호하려 한 티아의 몸에 사정없이 박혀 들었다.

"티아! 괜찮은 건가요!"

"티아! 괜찮아?!"

그 상황에 놀란 나와 세이사가 티아를 걱정하며 티아의 모습을 살폈지만, 티아의 상태는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참담한 몰골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도망가."

몸에 박힌 파편이 장기를 건드렸는지, 입가에서 심상치 않은 양의 피를 흘리며 어서 도망가라고 말하는 티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실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티아는 분명 새까만 수녀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붉은 기운이 수녀복에 스며들며 티아의 적갈색 머리카락과도 비슷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문 티아의 표정은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만히 있으세요. 빨리 치유를…."

"됐으니까 빨리 도망가라고!"

나는 티아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손을 뻗었지만, 티아는 거칠게 내 손을 쳐내며 빨리 도망치라며 소리쳤다.

"도망쳐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티아의 외침을 비웃듯, 무너진 벽 너머에서 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에는 새까만 로브를 두르고, 얼굴에는 웃는 얼굴이 그려진 새하얀 가면을 쓴 사신이 말이다.

'저 녀석은….'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수도에서 사람들을 악마로 변이시키고, 전투력이라면 결코 부족함이 없을 성기사인 티롤프의 공격을 아이 장난 대하듯 가볍게 막아냈던 그 모습을.

'에일라, 기적을 사용할 준비를!'

[알았어요!]

에일라에게 언제든 기적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며, 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전에는 얕보고 자리를 비운 탓에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의무를 이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노려보는 것 정도는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거침없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눈보라와 눈사태는 당신이 한 일이었군요."

실력이 뛰어난 성기사조차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이를 상대로 근접전을 시도해 봐야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시간을 벌 생각으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연한 사실을 굳이 말할 이유는 없다. 시간을 벌 생각인가? 그렇다면 너무나도 얕은수로구나."

하지만 그런 얕은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내 속셈을 간파하고는 비웃음이 담긴 말을 돌려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미 충분한 시간은 벌었으니까.

─타앙

"뭣…."

남자는 갑작스럽게 가면을 강타한 탄환에 몸을 비틀거렸다.

─타앙

굳이 그에게 여유를 줄 이유도 없었던 나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 찬 다른 권총을 꺼내 같은 부위를 향해 발사했다.

"이놈…!"

─타앙

분노하며 나를 향해 달려드는 그를 향해 재차 발사한 마지막 한 발.

이걸로 미리 장전해 두었던 권총을 모조리 소진하고 말았지만, 순례길을 여행하면서 틈틈이 사격을 연습해 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증명하듯, 내가 발사한 세 발의 탄환은 모두 남자의 가면에 조밀한 탄착군을 형성하며 적중했다.

"…대체 뭐로 만든 가면이길래 그렇게 튼튼한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남자의 가면에는 실금이 조금 갔을 뿐, 총탄이 가면을 관통하여 남자를 침묵하게 하거나 누적된 충격으로 남자를 기절하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현대의 총기와 비교해서 파괴력이 떨어지는 전장식 권총이라지만, 총탄을 세 발이나 맞고서도 고작 실금이 가는 정도로 버텨낼 수 있는 가면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후후후, 제법 재미있는 짓을 꾸몄지만, 이 정도가 한계였나 보구나."

짜증 날 정도로 오만한 말투로 나를 얕잡아보는 남자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지금 저 남자를 막아설 방법이 없다.

눈사태로 일행들과 분단되어 버린 탓에 협공을 펼치는 것도 불가능하며, 기적을 사용해 저항한다고 해도 내가 탈진해 쓰러지기 전에 남자를 제압해야 한다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그나마 남은 저항 수단으로 권총을 사용해 남자의 머리를 겨냥해 쏜 것인데, 대체 뭐로 만들었는지 총탄을 세 발이나 버텨내는 방탄 가면에 막혀버리고 말았으니, 이제는 모든 수단을 다 써버려서 빈손인 상태나 다름없었다.

"으랴아앗!"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칼린의 난입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괜찮으심까?! 폭발음을 듣고 바로 달려왔슴다!"

남자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남자와 우리 일행 사이로 끼어든 칼린이 뒤를 슬쩍 돌아보며 괜찮은지 물으며 남자와 대치했다.

"눈사태로 떨어트려 놓았던 호위기사인가. 과연 교단의 사냥개답게 후각이 뛰어나군."

"이단자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슴다!"

칼린의 검격을 간단하게 피한 남자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도발을 걸었지만, 칼린은 '이단자'라 맞받아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고작 그런 실력으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칼린이 신성력을 담아 휘두르는 검격은 분명 매서웠지만, 막상 그것을 상대하는 남자에게선 여유가 흘러넘쳤다.

마치 검술 사범이 제자의 검술을 적당히 봐주면서 상대해주는 것 같은 느낌,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일격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노련함이 남자의 움직임에서 느껴졌다.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가는 분명 칼린은 남자에게 패한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세이사는 티아를 돌봐주세요."

그러니 칼린이 벌어준 시간 동안 저 남자를 쓰러뜨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이사에게 티아를 돌봐달라며 부탁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상해. 저렇게 칼린의 검을 막아내는 실력이라면 내가 쏜 권총 정도는 미리 알아차리고 막아내는 것도 가능할 텐데.'

맨몸으로 총탄을 막아낸다는 것은 소설이나 게임 속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세계였다.

게다가 길더스텐의 힘을 받아 싸우는 칼린의 움직임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동작들이 가득한 '초인'의 움직임이었고, 이를 막아내는 남자의 움직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평균보다도 떨어지는 체력을 가진 내가 손을 움직여 권총을 쏘는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세 번이나 연거푸 얻어맞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설마….'

머릿속에 한가지 가설이 떠올랐으나, 나는 반신반의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가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이 남자를 이길 방법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취한 현실도피였다.

'저 남자, 신성력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건가?'

"에일라 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루피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날카로운 고드름이 남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가드의 사제인가."

루피아가 날린 고드름이 충돌한 주변으로 눈과 얼음 조각이 튀었지만, 남자는 멀쩡했다.

칼린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시에 루피아가 날린 고드름도 막아낸 것이 분명했다.

'역시….'

사람이 손부채질을 하면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며 바람이 일어나듯이, 기적을 사용하면 신성력이 움직인다.

성기사의 움직임을 예로 들자면, 일반적인 기사들은 '오러'라 불리는 체내의 기운을 운용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성기사는 몸에 흐르는 신성력을 일점으로 집중하거나 온몸에 고르게 퍼뜨리는 등의 방식으로 신성력을 운용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동체 시력과 괴력, 순발력 등을 발휘한다.

하지만 상대가 그런 신성력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을 수 있다면?

물론 성기사의 움직임을 상대할 정도로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가 따라붙어야 하겠지만, 그 조건만 충족한다면 성기사의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은 참으로 하품이 나오는 단순한 움직임으로 추락하고 만다.

더불어서 신성력 그 자체를 기반으로 발동하는 기적 역시 손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다면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는 공격으로 상대해야….'

그렇게 판단한 나는 주머니를 뒤져 둥근 납탄과 화약이 담긴 통을 꺼내 장전을 시작했다.

총구에 화약을 부어 넣고 납탄을 집어넣은 뒤, 곧바로 권총 밑에 딸린 꽂을대를 꺼내 총구에 찔러넣는다.

그렇게 꽂을대를 꾹꾹 눌러 화약을 다지는 동시에 납탄이 총열에 맞물리도록 하는 작업을 마친 후, 렌치를 꺼내 격발장치의 톱니바퀴를 감았다.

마지막으로 점화약의 역할을 할 화약을 화약 접시에 부어 넣고 덮개를 닫은 뒤 상대를 조준하는 것으로 발사 준비가 끝났다.

─타앙

부디 이 한 발의 총탄이 이 위기를 타개할 역전의 한 발이 되기를 바라며 방아쇠를 당기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울려 퍼지는 격발음.

"두 번이나 당해줄 것 같은가."

그러나 남자는 내 행동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칼린과 루피아의 협공을 받아내는 동시에 내가 발사한 총탄을 가볍게 회피했다.

내가 처음에 권총으로 남자의 가면을 연이어 맞춘 것은 남자가 방심해서 낼 수 있었던 우연한 성과일 뿐, 남자가 방심하지 않고 진심을 낸다면 그저 발악 이상의 의미조차 없는 시도임을 증명하는 잔혹한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너무 번잡하구나. 그렇다면 나도 아군을 늘려야 하겠군."

우리 일행은 저 남자를 이길 수 없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남자는 아군을 증원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지금 남자 하나를 상대로도 고전하는 중인 상황에서 남자가 증원을 부른다면 승부의 추는 당연하게도 남자를 향해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라. 꿈에 사로잡힌 자여."

그럼에도 남자의 수하들을 물리치고, 이 상황을 타개할 상대할 방법을 고민하던 나를 비웃듯, 남자는 최악의 상대를 꺼내들었다.

"크으으으으…!"

"…티아?"

자신을 돌보던 세이사의 간호를 뿌리치며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한 티아.

"티아! 정신 차리세요!"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급히 티아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수도에서처럼 다수의 인원을 악마화하는 것도 아닌, 티아 단 한 명만을 대상으로 하는 악마화 주술은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티아의 머리에 나 있던 새빨간 뿔은 이젠 한눈에 보기에도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자라나 있었다.

"뜨거워…! 뜨거워…!"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티아의 주변에선 이 라우리파 산에 두텁게 쌓인 눈을 모조리 녹여버릴 기세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우리가 절대 목숨을 거둬서는 안 되는 강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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