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성 그라나의 길 (13)
* * *
마을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눈보라에 아무런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던 마을은 고립되었고, 마을 사람 모두가 눈에 파묻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
한 여인이 이들을 가련하게 여기며 그들을 구하러 가기를 자청하니, 모두가 그녀를 뜯어말렸다.
그런데도 의지를 꺾지 않은 여인이 홀로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가니,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눈보라를 헤치며 마을로 나아간 여인은 악마와 마주했다.
그 악마는 들고 다니던 램프에 맹렬한 불길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본디 세상에 흩뿌려져야 마땅한 열기를 악마가 홀로 독식한 탓이었다.
여인이 지팡이를 들어 악마의 머리를 내리치니 악마는 분노하여 더욱더 맹렬한 눈보라를 내렸으나, 여인은 거침없이 지팡이를 휘둘러 악마가 든 램프를 깨트리니 악마가 모았던 열기가 흩어지며 눈보라가 멈추었다.
이후, 사실을 알게 된 모두가 여인의 행적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여인은 미처 구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어버린 이들을 긍휼히 여기니, 사람들이 그 여인을 가리켜 성녀라 칭하였다.
아르멜 루트비히, [성인의 발자취를 좇으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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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
티아가 괴성을 지르는 것에 맞추어 티아의 주변에 피어오른 불길은 그 기세를 더해갔다.
주변에 쌓여있던 눈을 녹여버리고, 나뭇조각 처럼 불에 타기 쉬운 물건들을 불태우고, 티아의 옆에서 다친 티아를 간호하던 세이사까지….
"세이사!"
모두가 당황하던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의 주술에 당한 티아는 지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세이사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세이사의 목숨은 그대로 끝이었다.
"아아아악! 뜨거워!"
그러나 세이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간다는 선택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미 티아는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을 질러대며 이성을 잃은 뒤였고, 그런 티아의 행동 원리는 분노한 짐승의 행동 원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전부, 사라져 버려!"
그래,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공격한다는 행동 원리 말이다.
티아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일행 모두가 몸이 굳어버린 상황에서 세이사를 구하러 달려 나간 나는 졸지에 티아의 목표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큭!"
세이사를 옆으로 밀치는 것으로 티아가 일으키는 불꽃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나는 체력도 뭣도 없는 에일라의 몸으로 티아를 정면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라면, 티아의 손에 무기가 될만한 물건이 없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나무막대를 들어 방어에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티아, 정신 차리세요! 저예요!"
그러나 그것도 최악을 피했을 뿐이지,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티아의 움직임은 술에 취해 날뛰는 취객처럼 아무렇게나 주먹을 날려대는 것으로 보였지만, 주먹 하나하나가 사람을 일격에 기절시키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고작 나무막대 하나를 휘두르는 것으로 그런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연히 나는 방패로 사용한 나무막대가 부러지면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완전히 공격에 노출된, 무방비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에일라 님!"
"네가 상대하던 것은 내가 아니었던가? 한눈을 팔 여유를 가질 상황은 아닐 텐데."
칼린이 상황을 파악하고 나를 향해 달려오려 하였지만, 남자가 칼린을 가로막으면서 그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으, 아아아…."
여전히 입에서 고통스러운 괴성을 쏟아내며 나를 향해 달려드는 티아.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로서는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이제는 '기적' 말고는 없었다.
'에일라, 어서 보호막을…!'
기적을 사용하면 탈진해서 전력에서 탈락한다는 페널티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내가 에일라에게 기적을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쩌적
티아가 일으킨 불길로 인해 뜨거웠던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얼음으로 이루어진 벽이 눈앞에 솟아올라 나와 티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콰앙
티아의 주먹과 얼음벽이 충돌하자 땅이 들썩일 정도의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갔지만, 천만다행히도 빙벽의 견고함은 티아의 주먹보다 뛰어난 모양이었다.
"루피아 사제님?"
그리고 이렇게 견고한 빙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주위에 단 한 사람 말고는 없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 괜찮으신가요!"
칼린과 함께 남자를 상대하던 루피아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적을 사용한 것이었다.
티아를 감싸듯이 솟아오른 견고한 빙벽.
티아가 불길을 뿜어대는 탓에 얼마나 버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티아를 한동안 묶어놓을 정도는 될 터였다.
"루피아 사제님! 뒤에!"
그러나 지금 상황은 티아를 잠시 묶어둔 것으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와 대치 중인 가면남은 우리 전체를 상대하면서도 여유가 넘칠 정도의 강자였고, 나를 보호한다고 그쪽에 정신이 쏠린 루피아를 공격하지 않을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아가드의 사제, 너도 마찬가지다. 나를 상대하면서 한눈을 팔다니."
조금 전에 티아를 가둔 빙벽을 만들어 낸 것처럼 얼음으로 이루어진 방패를 만들어내 남자의 공격을 막아낸 루피아였지만, 그대로 몸이 주욱 뒤로 밀리며 절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크읏!"
새하얗던 루피아의 사제복에 붉은 얼룩이 생겨났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며 평평해진 절벽이었지만 군데군데 튀어나온 부분이 남아있었고, 그 일부가 루피아의 등과 마찰하며 상처를 낸 것이다.
"…아가드 님의 권능은 추위에 떠는 이에게 따스함을 건네고 다른 이를 추위에 내던지는 냉혹한 자에게 차가운 심판을 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상당히 쓰라린 고통을 동반하는 상처임이 분명했지만, 루피아는 고통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악마 따위를 숭배하는 당신 같은 이단자가 눈보라를 일으키는 아가드 님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저는 당신을 막을 겁니다."
고통으로 살짝 몸을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는 루피아.
"웃기는 소리.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주제에 잘도 떠드는구나."
그런 루피아를 남자는 비웃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이를 우습게 여기는 것처럼.
"당신이야말로 한눈팔지 말란 검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머리를 향해, 칼린이 휘두른 검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쓸데없는 짓을."
아주 여유롭게 손을 뻗어 칼린의 검을 받아낸 남자.
─쩌적
그러나 칼린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의 위력을 완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는지, 내가 권총을 명중시키는 것으로 가면에 생겼던 실금이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가면에 새겨진 실금이 점차 균열을 늘려가며 갈라지기 시작하자, 남자는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마치 가면이 벗겨지거나 부서져서 얼굴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라도 하는 듯이.
"지금이에요! 모두 공격해요!"
"이런 망할 놈들이! 꿈의 노예여, 나를 지켜라!"
이것이 기회라는 사실을 포착한 나의 총공격 지시와 남자가 티아에게 자신을 지키라 명령하는 소리가 동시에 교차했다.
'에일라. 이번에는 우리도 합세하자.'
[알겠어요.]
몸에서 신성력과 기운이 빠르게 빠져나가며 시네티 마을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이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성스러운 창'이 내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아압!"
"받으세요!"
내가 침착하게 남자를 조준한 뒤에 '성스러운 창'을 사출하는 동시에, 칼린과 루피아 역시 남자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크으윽!"
남자는 조금 전에 보여줬던 움직임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어설픈 움직임으로 대응했고, 남자의 가면에 생긴 금은 더욱 그 균열을 넓혀갔다.
"크아아아악!"
한편, 손과 발, 어깨 등으로 거칠게 빙벽을 두들기는 티아의 괴성과 함께 루피아가 세워두었던 빙벽에도 쩌적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시간제한을 강요하는 형국이었다.
─빠직!
여전히 공격을 막아내며 결정적인 일격을 허용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꾸준히 누적된 충격은 마침내 남자의 가면을 깨트렸다.
"…당신은."
[…브라이트.]
그리고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나와 에일라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넬런 백작가의 시종이었던 브라이트의 얼굴이었으니까.
"…백작이 시킨 일인가요."
자연스럽게 내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넬런 백작가의 시종이 납치범으로서 파견되었다면 그 배후야 뻔하디뻔한 것 아닌가.
"크흐흐. 내 승리다. 그 반푼이에 불과한 기적으로 멍청이들이 성녀 후보라며 떠받들어주니 즐거웠더냐? 에일라 넬런."
그러나 이미 반쯤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에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브라이트가 건 주술로 악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티아가 빙벽을 거의 다 부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고, 브라이트는 그 사실을 믿고 있는지, 자신만만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마침내 빙벽을 뚫고 나온 티아가 맹렬한 기세로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무언가가 뼈와 살을 꿰뚫으며 내는 끔찍한 파육음.
"커허억."
그 소리의 근원지는 브라이트의 가슴 부근이었다.
"어, 어째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는 브라이트.
그의 얼굴은 자신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린 티아가 어째서 자신을 공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수도에서 지성이 없는 악마들을 상대하는 법을 몇 가지 익혀두었죠."
중지되었던 악마화가 다시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악마화에 저항하며 괴성을 질러대는 티아는 사실상 지성이 없어 다른 상급 악마의 명령이 없으면 자신의 욕망과 본능대로 행동하는 하급 악마와도 비슷한 상태였다.
그런 그들이 상급 악마의 명령에 저항해 가면서조차 이상하리만치 집착을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기적에 담으면 기적에 명중 당한 이에게 표식처럼 새겨지는 특수한 신성력이었다.
나는 브라이트를 목표로 한 '성스러운 창'에 그 특수한 신성력을 부여하여 사출했고, 명중하면서 브라이트의 몸에는 그 특수한 신성력이 새겨진 상태였다.
당연히 티아의 우선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 이대로 티아를 제압하고 다시 제정신을 차리도록 하면….
"같잖은 수작질을…. 안 돼.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에일라 넬런…너를 살려서 끌고 갈 수 없다면 차라리…죽여서 없애 버리겠다."
곧바로 제정신이 아닌 티아를 진정시킬 방법을 생각하던 나를 향해, 저주와도 같은 유언을 남긴 브라이트는 뻥 뚫려버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날아드는 브라이트의 저주가 담긴 화살.
이미 기적을 사용하여 상당한 기력을 소진한 나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아냐, 그래도 남은 기력을 짜내서 보호막을 만들어 낸다면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그렇게 생각하며 보호막을 만들어 내려던 도중, 나를 향해 날아오는 저주의 화살과 내 사이에 뛰어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안돼!"
전투 도중에 한쪽으로 대피 시켜 두었다가 잠시 그 존재를 잊었던 세이사가 양팔을 크게 벌리며 내 앞에서 저주가 담긴 화살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세이사! 안 돼요!"
갑작스러운 세이사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나는 이대로 며칠이나 기절해 있어도 좋다는 각오로 신성력을 끌어올려 기적을 펼치려 했으나, 브라이트가 마지막 집념을 담아 쏜 저주의 화살은 너무나도 빨랐다.
저주의 화살이 세이사의 어깨에 꽂히며 치명적인 저주를 주위에 흩뿌렸다.
그리고 그렇게 사방으로 튄 저주는 전투가 벌어지면서 지속적으로 충격에 노출되었던 절벽을 무너뜨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쿠르르릉
결국, 절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눈사태가 일어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기력을 짜내 세이사를 붙잡으며 보호막을 펼쳤고,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는 눈사태는 또다시 우리 위를 덮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