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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65화 (65/80)

〈 65화 〉 성 그라나의 길 (14)

* * *

"세이사! 정신 차리세요! 세이사!"

눈과 바위, 흙이 한데 뒤섞이며 보호막 위를 사정없이 두드리는 와중에도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세이사의 손을 꼭 붙잡고 소리쳤다.

브라이트가 최후의 발악으로 쏜 저주의 화살은 세이사의 어깨에 명중한 후 사방으로 뿜어낸 기운만으로도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저주를 담고 있었다.

"에일…라. 괜찮…아?"

아무리 급소에 맞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치명적인 저주가 담긴 화살을 맞은 사람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화살에 맞아 의식이 희미해진 와중에도 에일라의 이름을 부르며 안위를 걱정하는 세이사의 상태는 참혹했다.

악마들이 내뿜는 사악한 마력과도 비슷한 기운이 화살이 적중한 상처를 시작점으로 해서 서서히 세이사의 몸을 침식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미 세이사가 쓰러진 바닥 위에는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지며 하얀 눈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으며, 고통을 꾹 눌러 참는 세이사의 얼굴을 보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세이사의 몸을 난도질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시바삐 세이사의 상처를 치료하고 몸을 잠식하는 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거나 처리하지 않는다면 세이사는 분명히 죽게 될 것이다.

"에일라! 어서 세이사에게 치유를!"

그 사실에 내 마음이 급해졌다.

혹여나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생각에 속으로만 부르던 에일라의 이름을 외치며 치유의 기적을 사용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도 보호막을 유지하는 것에 신성력이 상당량 빠져나가고 있어요. 정말 괜찮겠어요?]

에일라 역시 세이사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는 점에선 의견을 같이했지만, 마지막으로 내게 정말 괜찮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에일라의 질문은 내가 이대로 신성력을 무식하게 사용했다가는 시네티 마을에서 있었던 일처럼 며칠이나 기절하는 것을 넘어, 아예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세이사가 아니었으면 화살에 당하는 사람은 나였을 거야. 내가 책임져야 해!"

나는 브라이트가 쏜 저주의 화살을 막기 위해 보호막을 치려 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 보면 기습적으로 화살을 쏜 브라이트가 한발 빨랐다.

세이사가 몸을 던져서 브라이트가 쏜 화살을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아직 완성되지 못한 보호막을 찢고 들어온 저주의 화살에 맞는 사람은 분명 내가 되었을 터.

세이사의 목숨을 구하려고 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쯤이야 값싼 리스크였다.

[…시후의 의지는 알았어요. 기적이 완성되는 동안 정신을 잃지 않도록 정신을 꼭 붙들어 두세요.]

그런 내 각오가 전해졌는지, 에일라 역시 다소 무모한 내 결정에 아무런 말 없이 기적을 사용할 준비를 시작했다.

여전히 세이사를 부축하며 꽉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는 반대편 손을 세이사의 상처가 있는 곳 위에 올렸다.

여전히 보호막 위를 두드리는 눈사태와 바위 등의 무게를 버텨낼 보호막을 유지하는 동시에 강력한 저주에 당한 세이사의 치료까지 시작하자 지독한 현기증이 일면서 눈앞의 풍경이 빙글빙글 돌았다.

"또 바보 같이 쓰러져서 간병이나 받는 건 사양이에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초점이 흐려지는 시야를 강제로 되돌린다.

세게 짓씹은 입술이 터지며 새어 나온 피가 턱까지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만 무시했다.

지금 내가 정신을 쏟아야 하는 것은 보호막의 강도를 충분히 유지하는 동시에 세이사의 치유였지, 내 몸을 돌보는 것은 이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세이사, 괜찮을 거예요. 저는 나중에 성녀가 될 사람이니까요. 이까짓 저주쯤은 간단하게 치유할 수 있어요."

세이사의 상처 위로 올려놓은 손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며 신성력이 세이사의 몸 안으로 침투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신성력은 세이사의 몸을 잠식하던 사악한 저주를 막아세우며 추가적인 잠식을 차단하는 동시에, 세이사의 상반신 절반을 차지하던 새까만 저주의 영역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읏."

세이사의 몸을 잠식했던 저주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으나, 속을 뒤집어엎는 듯한 복통이 내게 찾아왔다.

'이까짓 거…아프지도 않아!'

입술이 터지면서 턱을 따라 줄줄 흐르던 피에 각혈하며 새어 나온 피가 더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어도 보호막을 짓누르는 낙석과 눈의 무지막지한 무게에 깔려서 압사할뿐더러, 세이사의 치유 역시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정신을 잃고 쓰러질 수는 없었다.

─콰직

그러나 내 결연한 의지와는 별개로, 내가 세이사의 치유에 신성력을 소모한 만큼 보호막을 유지하던 신성력은 약해졌고, 이는 보호막의 내구성이 약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보호막 위를 뒤덮은 눈덩이와 낙하물의 무게에 찌부러질 것만 같은 보호막이 경고신호라도 되는지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길! 제발!"

그 심상치 않은 소리 속에서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길더스텐.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제대로 된 신앙을 바친 적은 없지만, 세이사는 당신을 향해 흔들림 없이 올바른 신앙을 바쳐왔어.

이기적으로 내 살길만 생각하던 나를 돌봐준 것도 세이사였고, 세이사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내 목숨을 다 바쳐도 모자라.

당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당신의 힘을 자기 좋을대로 사용하는 불순한 신도인 내 목숨을 거둬가도 좋아.

하지만 신실하게 당신을 믿고, 다른 사람을 돌보길 좋아하는 세이사는 당신의 충실한 종이잖아?

부탁이야.

나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여기서 세이사만은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게 해줘.

"…보."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서 의식이 흐릿해진 상태로 기도를 마친 내 귓가에 너무나도 친숙해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에일라는 바보야."

상처는 말끔하게 치유되었지만, 저주의 영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저주가 남긴 검은 얼룩이 아직 남아있는 세이사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내 손을 마주 잡지 않았던 손으로 붙잡으며, 세이사는 내게 원망이 담긴 말을 꺼냈다.

"에일라가 죽고 나 혼자 살아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

그렇게 원망의 말을 남기고 다시 정신을 잃은 세이사.

그 순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던 정신이 번쩍 들며, 주위에 눈부신 섬광이 번개가 치듯이 번쩍였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돌아온 것은 끊어질 것만 같았던 정신만이 아니었다.

기적을 사용하면 으레 따라붙던 피로감이 말끔히 사라졌고, 몸에 두른 옷은 피와 먼지가 잔뜩 묻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새까만 수녀복이 아니라 마치 천상에서 내려와 이 지상에서 신의 뜻을 대리하여 전하는 천사가 몸에 두를 법한 새하얀 법의로 바뀌어있었다.

"…날개?"

그리고 눈부신 광휘를 주위에 흩뿌리는 새하얀 날개.

그 날개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 그 역할을 다한 보호막을 대신하여 눈사태로 쏟아져 내린 것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말 내가 한 기도가 길더스텐에게 닿기라도 한 것인가.

[시후, 팔에 새겨진 상처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멍하니 서 있던 내 정신을 다시 현실로 되돌려 놓은 것은 에일라의 외침이었다.

'…성녀님이 말씀하셨던 성흔이라는 게 설마.'

[믿을 수 없어요. 원래 그 상처는….]

'에일라 네가 신성력을 제어하는 능력을 망가뜨리려고 일부러 상처를 내서 효력을 잃은 가짜 성흔이라고 했었지.'

그러나 그 가짜 성흔은 지금, 그 누구에게 물어보더라도 길더스텐과 교단을 상징하는 십자 문양이라고 답할 형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고 보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혼란스러움이 밀려왔지만, 지금 이대로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상실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보라 아래 어딘가에 묻혀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일행들도 찾아봐야 했고, 사악한 저주를 몰아내고 상처를 말끔히 회복했다지만 그 후유증이 남은 세이사가 무사히 회복하도록 안심하고 돌볼 수 있는 숙소를 물색할 필요도 있었다.

─사각사각

새롭게 돋아난 날개를 사용해본 소감이 어떻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팔이 한 쌍 더 돋아난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답할 것이다.

위쪽에서 짓누르는 눈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 날개로 지지하는 동시에, 다른 날개로 두더지가 굴을 파듯 사방을 뒤덮은 눈을 치우는 작업에 날개는 무척이나 유용했다.

"푸하!"

날개를 이용한 굴착 작업(?)을 계속한 끝에 나는 눈덩이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막상 바깥으로 나와보니 바깥 상황은 결코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었다.

"눈보라가 아직도…."

브라이트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그쳤을 것으로 예상했던 눈보라는 여전히 라우리파 산을 뒤덮은 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지독한 놈. 자기는 죽어도 우리가 살아서 나가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건가?"

나는 평소에 사용하던 에일라의 말투까지 내다 버리며 브라이트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브라이트가 최후의 발악을 벌이고, 그 여파로 절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럴 겨를이 없었지만, 브라이트의 시체가 눈앞에 있다면 있는 힘껏 걷어차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일단은 거점을 마련해야 해. 세이사를 계속 업고 다닐 수도 없는 데다, 이 '천사' 상태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티아를 업은 채로 일행을 찾으러 나섰다가 악마화로 폭주하는 티아를 마주치면 낭패야.'

악마화를 일으키는 브라이트의 저주에 당해 반마상태가 되어버린 티아라면 눈사태에서도 멀쩡할 것이다.

칼린이라면 자력으로 눈사태 속에서 살아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고, 루피아 역시 냉기를 다루는 아가드의 사제인 만큼 눈사태에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보지 못했던 피루스 씨와 엘리는 아마 두 사람이 전투를 염두에 두고 안전한 곳으로 따로 보내 놓았을 터.

지금은 세이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나서 뒷일을 생각할 때였다.

"…세이사."

여전히 저주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내 등에 업힌 세이사는 의식을 잃은 채로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내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눈보라를 피해 우리가 머무를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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