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성 그라나의 길 (15)
* * *
─쿠르르릉
무언가 무너지기라도 했는지, 라우리파 산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이고 맙소사!"
먼저 절벽 아래로 달려 나간 칼린과 루피아의 발자국을 뒤따르던 에일라 일행의 마부, 피루스 씨는 기겁하며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거 또 눈사태가 일어난 건가? 그럼 먼저 달려 나간 기사님과 사제님은….'
그는 그런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굉음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파악하려고 굉음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제기랄!"
그의 불길한 예감을 증명하듯 굉음은 서서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육지에서 몰아치는 새하얀 파도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눈과 얼음의 격류.
"꼬마 수녀님! 일단 피하고 봅시다!"
행여 눈보라에 지워질세라 다급하게 따라가던 칼린과 루피아의 발자국이 새하얀 눈이 저 멀리서 일어난 눈사태에 휩쓸려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틈도 없었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는 자신들도 저 눈사태에 휩쓸린 피해자가 될 판이었으니, 피루스 씨는 옆에서 따라오던 유일한 동행인인 엘리의 손목을 붙잡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허억, 허억. 꼬마 수녀님,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얼마나 눈사태를 피해 도망쳤을까, 정신없이 달리던 중에 눈사태를 피할 수 있을 만한 동굴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대피한 피루스 씨는 그제야 엘리를 돌아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휴우,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참으로 천진난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씩씩한 엘리의 대답에 피루스 씨는 추위 속에서도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워낙 규모가 컸던 눈사태여서 멀리서도 그 굉음을 듣고 도망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체 능력을 지닌 기사님이나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제님 정도라면 그런 눈사태를 맞이해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피루스 씨와 엘리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마 눈치채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눈 속에 파묻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그보다도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기사님도 사제님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그러나 피루스 씨의 마음은 눈사태를 피해 목숨을 부지했다는 기쁨보다는 또다시 눈사태로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다는 절망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가드의 사제인 루피아가 걸어준 기적의 효과가 아직 남아있으니 라우리파 산 전역에 몰아치는 눈보라와 추위를 버틸 수 있었지만, 자력으로 이 눈보라를 뚫고 라우리파 산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리나가 우리를 도우러 올 거예요!"
그렇게 까맣게 타들어 가는 피루스 씨의 속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지, 엘리는 영문모를 소리나 늘어놓고 있었다.
"아니, 꼬마 수녀님. 그 리나라는 분은 대체 누군데 그러는 겁니까?"
한숨만 나오는 막막한 상황에 태연자약하게 그런 반응이나 보이는 엘리의 모습은 아직 두 자리를 넘기지도 못한 엘리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몰려있었던 피루스 씨는 그런 아량을 베풀 여유가 없었다.
"리나는 제 친구예요! 이쪽으로 온다고 했으니 아마 에일라 언니가 리나를 붙잡아두던 나쁜 사람을 쓰러뜨린 모양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핀잔이 섞인 반응을 돌려주었음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엘리의 모습에 피루스 씨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어…?"
피루스 씨는 목격하고 말았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혜성처럼 눈부신 섬광을 내뿜으며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
"…큰일이네요."
─휘이잉
바깥에서는 그칠 기미조차 없이 끝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세이사."
─새근새근
동굴 안에는 여전히 몸에 남은 저주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세이사가 있었다.
'이를 어쩐다.'
눈보라를 피해 라우리파 산 어딘가의 조그마한 동굴 안으로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천사의 모습으로 변했던 변신은 지속시간이 있었는지, 동굴을 발견하고 세이사를 바닥에 눕혀 놓자 내 몸을 감쌌던 새하얀 천사의 법의와 날개는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추었고, 그 직후 나와 세이사를 추위에서 보호하던 따스한 기운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추위에서 환자인 세이사와 체력이 약한 편인 에일라의 몸이 버틸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
별수 없이 나는 동굴과 근처의 벽을 타고 자라난 이름 모를 덩굴들을 떼어내서 땔감으로 긁어모으고 불을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세이사도 말라 죽고 말 거야. 악랄한 놈들.'
그러나 장작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오래 타는 나무도 아니고, 고작 불쏘시개로나 쓸법한 덩굴 정도로 불을 오래 피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 덩굴마저도 얼마 되지 않는 상황.
서둘러 저 눈보라를 뚫고 나가 동료들과 합류하거나, 눈보라를 멈출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브라이트가 유언으로 남긴 말마따나 나와 세이사는 이 라우리파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여유롭게 대책을 생각할 여유가 없으면서도 뾰족한 수도 없는 상황에 나는 답답한 마음이 되어 애꿎은 벽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그 변신은 뭐였지? 에일라, 혹시 아는 것 없어?'
그나마 희망을 걸어본다면 눈사태로 쌓인 눈을 헤치며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천사화'였다.
그 상태에선 거의 상시로 기적을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신성력을 주위에 발상했지만, 평소에 기적을 사용하던 때와는 달리 내 기력이 빨려나가거나 내장이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지는 느낌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 상태에서는 마음먹고 기적을 마구 사용하더라도 탈진해 기절하거나 해서 전력외가 되어버리는 상태가 되어버리지도 않을 터.
다시 내가 '천사화'를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를 간단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에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시후.]
그러나 나든 에일라든 이 '천사화'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다.
어째서 내게 '천사화'가 일어난 것인지, '천사화'를 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지, 언제까지 그 '천사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있었다.
'일단 칼린과 루피아라면 이 눈사태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았을 거야. 우선은 이 둘을 찾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어.'
결국 나는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천사화'에 대한 고찰은 미뤄두고,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 계획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 눈사태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어도 이 넓은 산에서 어떻게 그들을 찾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이대로 놈들의 생각대로 흘러가게 둘 순 없어.'
그렇게 의지를 다졌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에일라의 지적대로, '천사화'가 풀리고 평소의 병약한 에일라의 몸뚱이로 눈보라를 뚫고 칼린과 루피아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세이사는 어떡하고요?]
게다가 지금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세이사를 동굴 안에 내버려 두고 섣불리 길을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진퇴양난이었다.
아주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는다면 눈사태에서 무사히 생존한 칼린과 루피아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도 적었다.
'제기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에 절로 욕설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전부 내 잘못이야. 어설픈 계획을 세워놓은 주제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자만했어. 나는 기적의 힘만 믿고서 날뛴 애송이에 불과해.'
당연히 내가 욕하는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수도에서 기적을 몇 번 사용하면 자동문이 열리듯이 술술 풀리는 문제들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순례길을 골라 다른 사람의 피해를 줄여? 습격에 대응하기 용이해?
내가 계획했던 것은 전부 애송이의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내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그런 알량한 각오로 상대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머저리 새끼. 기적 몇 번 써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내니 이 세상이 만만해 보였냐?'
그리고 내가 가진 힘을 과대평가했다.
그 결과, 일행은 모조리 흩어지고 나와 세이사는 동굴 안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완전한 실패였다.
─사박사박
그렇게 내가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 사이, 동굴 바깥에서 누군가가 눈을 밟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좋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면 칼린과 루피아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야. 칼린이나 루피아일 가능성은 너무 적어.'
그러나 그들이 우리 위치를 알 방법도 없는데 이렇게 빨리 찾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 희망적인 가정을 가장 먼저 내려놓았다.
나쁜 상황은 이 라우리파 산을 배회하는 난폭한 짐승이 잠시 눈보라를 피할 동굴을 찾아 접근해 오는 것.
'다가오는 발소리로 짐작해 보면 분명 두 발로 걷는 소리야. 네발 달린 짐승은 아니야.'
눈이 사철 쌓이는 추운 지방에서 가끔 출몰한다는 '설인'이라는 마수가 아닌 이상, 이 라우리파 산에 두 발로 걷는 짐승은 없었다.
이것도 기각.
'그렇다면 남은 건….'
자연적으로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에일…라…."
"…티아."
브라이트를 물리친 덕에 이성이 돌아온 것인지,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난 티아는 연신 '에일라'라는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잃어버렸던 동료를 찾았으니 다행인 일이 아니냐고 반응할 수 있겠지만.
"에일…라…!"
나를 보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것을 보면 여전히 티아의 의식은 악마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 내 운이 이렇지 뭐.'
나는 그렇게 자조하며 망설임 없이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와 세이사가 임시 거처로 삼은 동굴은 너무나도 좁은 공간이었고, 여기에서 전투를 벌였다가는 세이사가 다칠 위험이 너무나도 컸다.
"좋아요. 티아, 빌어먹을 술래잡기나 한 판 해 보죠!"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에서 에일라의 몸으로 얼마나 오래 시간을 버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티아와 목숨을 건 술래잡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