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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67화 (67/80)

〈 67화 〉 성 그라나의 길 (16)

* * *

"하아…하아…!"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길을 아무런 대비나 장비도 없이 전력으로 질주하는 내 선택은 상식적으로도 분명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추위를 막아줄 의복은 일련의 사건과 거친 산길을 거치며 군데군데 헤져서 반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상태였고, 장갑조차 끼지 못한 채 매서운 설산의 추위에 노출된 손은 빨갛게 부어올라 동상에 걸리기 일보 직전.

"에일…라…!"

거기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등 뒤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반인반마 상태의 티아까지.

"정말이지, 이런 스토킹은 사양인데요…!"

의식을 잃은 세이사를 지키려고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술래잡기였지만, 애초에 승리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티아의 공격을 피해서 접촉해야 해.'

숨이 차올라서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나와는 달리 조금도 속도가 줄어드는 일이 없는 티아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신체적인 능력만 놓고 보아도 이쪽의 압도적인 열세.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승산은 계속해서 나를 추적하는 티아의 빈틈을 노려서 티아에게 가까이 접근한 후, 티아의 몸 안에 신성력을 불어 넣어, 티아의 악마화를 중단시키고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기적은…봉인된 거나 다름없어.'

악마를 상대로 즉효를 보이는 공격계의 기적을 사용했다가는, 제어기능에 맛이 간 탓에 멋대로 폭주하여 출력 조절이 불안정한 내 기적의 특성상 악마화가 진행 중인 티아를 아예 퇴치해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방어계의 기적을 사용하자니, 이전에 기적을 사용했을 때처럼 신성력이 빠르게 고갈되어 티아를 구하기도 전에 내가 탈진할 위험이 있었다.

요컨대, 지금 나는 재주껏 티아의 빈틈을 노려서 티아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상황.

'이건 뭐, 투우장에서 날뛰는 거친 소를 상대로 등 위에 올라타 로데오를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조건이었다.

칼린처럼 평소에도 몸을 단련하고, 신성력을 운용하여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 전투에 임하는 성기사 정도라면 모를까, 아무리 단련해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질 체력인 에일라의 몸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일단 몸을 피할 곳을 찾은 뒤의 일이지만.'

그나마 안전한 길을 택한다고 동굴까지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도망가는 길을 선택했지만,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세이사를 두고 온 동굴 말고는 마땅히 몸을 숨길만 한 장소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이거라도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어.'

눈보라를 정면으로 맞아가며 달리는 와중이라 머리에 열이 올라오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반드시 성공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체력이라는 한계점이 존재하는 이상 언제까지고 티아와 술래잡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타앙!

나는 산짐승이 동굴에 가까이 다가올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장전해 두었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티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신체 능력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지금 내가 티아를 제압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은 이것 말고는 없었다.

"으아아…아아!"

"쳇, 역시 안되나요!"

티아의 목숨까지 노릴 생각은 없었기에 급소가 아닌 부위인 다리를 노리고 권총을 발사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악수였다.

티아의 다리에 총알이 명중하며 기동력이 다소 저하되기는 했지만, 총상정도야 가벼운 부상 정도에 불과하다는 듯이 괴성을 지르면서 나를 향해 돌진하는 티아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시후! 어서 피해요!]

그 결과, 조준을 위해 잠시 멈춰 섰던 나는 티아의 돌진을 회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여유 거리를 확보할 수 없었고, 에일라의 비명과도 같은 경고에도 한발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푸확

악마화가 진행되면서 마치 칼날처럼 길고 날카롭게 자라난 티아의 손톱이 내 팔을 스쳤고, 새하얗게 눈이 쌓인 산길 위로 붉디붉은 피가 튀었다.

"아아아아악!"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고통이 내 몸을 관통했고, 입은 나도 모르는 사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내가 카르실리안 대륙에 떨어진 이후로 느꼈던 고통 중에 가장 끔찍한 고통이었다.

기적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속이 엉망이 되어 피를 토한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목숨을 걸겠다고 결연하게 각오를 다지기라도 했지, 이번에는 그런 사전작업도 없이 고통이 벼락처럼 내리꽂힌 탓에 이를 악물며 버티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아…하아…!"

그러나 이대로 정신을 놓고 비명만 지를 여유는 내게 없었다.

'괜찮아. 고작 팔이 살짝 긁힌 것뿐이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의식이 새하얗게 물들며 현기증이 일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간신히 정신을 다잡으며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 심하게 긁히긴 했네.'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팔의 상처를 살펴보니, 살점이 통째로 뜯겨 나가 뼈가 피부 위로 드러날 정도인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상처였다.

또다시 티아에게 공격을 허용했다가는 그대로 죽거나, 과다출혈로 기절해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척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모자람이 없었다.

'빨리 지혈을 안 하면 위험하겠어. 그보다 티아가 다시 돌진해 오면 피할 수는 있을까?'

상처를 빨리 지혈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동시에 다시 나를 향해 돌격해 오지는 않을지 경계하며 티아 쪽을 바라보니, 조금 전의 돌격으로 내게 큰 상처를 입힌 티아는 이상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공격한 것은 자신인데도 오히려 자신이 공격당한 것처럼 고통 섞인 괴성을 질러대는 티아는 나를 향해 휘둘렀던 팔을 눈에다 문지르고 있었다.

'뭐지? 왜 저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티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티아가 눈에다 문지르고 있는 팔에서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설마….'

순간 머릿속의 정보가 이리저리 조합되며 티아를 제압할 방법이 떠올랐다.

성수는 정화의 기운을 품고 있어 성수를 뒤집어쓴 악마는 그 힘이 무척이나 약해진다.

그리고 그 성수는 깨끗한 물에다 강한 신성력을 지닌 성직자의 피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성수의 주요 성분이라 할 수 있는 성직자의 피를 직접 악마에게 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간이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야!'

티아가 언제 정신을 차리고 공격해 올지 알 수 없었기에 증명할 시간도 없었고, 머리를 굴릴 시간적인 여유는 더더욱 없었던 탓에, 내가 이 무모한 시도를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나는 조금 전에 권총으로도 저지할 수 없었던 돌진을 또다시 준비하는 티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상처가 난 팔을 움켜쥐었다.

짜릿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주어진 기회는 오직 한 번뿐.

체력이 고갈되고 심각한 상처까지 입은 탓에, 티아의 재빠른 돌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넓은 범위에 피를 뿌려, 티아가 내게 도달하는 것보다 먼저 내 피를 뒤집어쓰게 해야 했다.

"나 참,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부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는다고 하던가.

나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에일…라…!"

그런 내 모습을 도발이라고 판단했는지, 티아는 얼굴에 고통과 분노 등으로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촤악

내가 상처를 쥐어짜내 전방으로 흩뿌린 붉은 피의 궤적과 나를 향해 달려들던 티아의 붉은 궤적이 서로 교차했다.

"으, 으아아아…으아아아아…!"

그 결과, 비명을 내지른 쪽은 티아였다.

나와의 거리를 불과 한 발자국만 남겨놓은 채, 티아는 내가 흩뿌린 피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치이익

다행히도 내 가설이 맞았는지, 내 피에 닿은 티아의 몸에선 살이 뜨거운 것에 닿아 익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수를 악마에게 뿌렸을 때처럼, 티아의 몸에 뿌려진 내 피에 담긴 신성력이 티아의 몸에 깃든 악마의 사특한 기운과 충돌하는 것이 분명했다.

"에일라…으윽…죽여…아니, 살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티아의 의식과 악마의 정신이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중인지, 티아는 앞뒤가 안 맞게 상반되는 말을 횡설수설 떠들어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티아,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티아에게 다가가 티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대로 내가 티아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면, 약화된 악마의 정신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티아의 몸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을 터.

'에일라, 준비해줘.'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에일라를 불렀다.

내 피를 뒤집어써서 악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 기회에 티아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티아의 몸에 깃든 악마를 완전히 몰아낼 생각이었다.

[…제가 말려도 시후는 안 듣겠죠? 지금 몸 상태도 말이 아닌데 여기서 신성력을 썼다가는…]

사실, 티아에게 내 피를 뿌려 제압한다는 것도 운에 결과를 맡긴 도박수였지만, 티아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악마화를 저지하는 것도 도박수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더불어 제어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내가 티아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신성력이 멋대로 폭주하여 티아에게 무제한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어 나는 신성력이 고갈되어 탈진하거나 목숨을 잃고, 티아 역시 몸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신성력을 감당할 수 없어 소멸하는 최악의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황.

에일라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며 내게 뜻을 거둘 수는 없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에일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부탁해.'

쇠뿔과도 같은 형상으로 머리 옆으로 자라난 붉은 뿔과 칼날과도 같이 자라난 손톱, 티아의 얼굴과 팔다리를 비롯하여 몸 곳곳에 생겨난 의미를 알 수 없는 붉은 문양들.

지금 무력화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티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반인반마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내 피를 뒤집어쓰고 무력화되었다지만, 내가 당장 티아의 악마화를 저지하지 않는다면 악마화가 더 진행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하아, 알았어요. 시후는 정말 터무니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사실을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너무나도 잘 알았던 에일라는 결국 체념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그런 에일라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는 티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티아, 괜찮아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티아를 버려도 저는 티아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신성력이 손끝으로 모여드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티아의 머리 위로 올려놓은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크읏."

몸에서 급속도로 신성력이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지며 지독한 현기증이 엄습해 왔지만, 이대로 정신을 잃어서야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일행이 눈사태에 뿔뿔이 흩어진 것도, 세이사가 브라이트가 쏜 저주의 화살에 당해 쓰러진 것도, 티아가 브라이트의 악마화 주술에 걸린 것도 결국은 내 미숙함과 자만심으로 인해 일어난 일.

그러니 내가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끊어지기 직전의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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