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68화 (68/80)

〈 68화 〉 불과 전쟁의 신

* * *

"……."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사방이 하얗게 물든 공간에 외로이 서 있었다.

끝없이 높은 곳에 펼쳐진 하늘도,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단단한 대지도, 하다못해 이정표로 삼을 조그마한 장애물조차 없는,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어 공간 감각마저 이상해질 것 같은 공간.

'에일라?'

이 돌발상황을 마주한 나는 이 현상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조력자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자세한 원리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에일라의 영혼은 내 영혼이 에일라의 몸에 깃들면서 일종의 부속품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에일라의 몸에 묶여버린 상태.

따라서 내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던 그 감각과 정보를 공유하고, 내가 말을 건다면 즉시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 정상이었다.

"에일라?"

그러나 내가 목소리를 내어 에일라를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끝을 모르고 무겁게 내려앉는 침묵뿐이었다.

"…젠장."

간신히 늦지 않게 티아를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곳에 떨어진 꼴이었다.

차라리 내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이 아침마다 맞이하던 원룸의 칙칙한 천장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그동안 카르실리안 대륙에서 있었던 일들은 내가 하룻밤 사이에 꾼 꿈에 불과했다고 납득하며, 평소의 일과대로 출근 준비를 시작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눈 앞에 펼쳐진 지독히도 새하얀 공간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이상 현상이었고, 당장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초조함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다.

'일단 걷자. 계속 걷다 보면 뭔가 방법이 나오겠지.'

결국,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기 아무도 없나요?"

사람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면 두려움에 잠식당해 침착함을 잃기 마련이라는데, 빛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아니, 차라리 지독한 눈부심이 없어 눈이라도 편안한 어둠 속이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몰랐다.

"하아, 이게 도대체…."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새하얀 풍경에는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발걸음을 옮겨보아도 조그만 변화조차 없는 풍경에 지친 내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오호라. 네녀석이 이 몸을 깨운 녀석이더냐?"

새하얀 빛으로만 가득했던 공간에 비로소 변화가 일어났다.

"…?"

오른손에 쥔 곰방대를 반대편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무척이나 오만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온 존재는 무척이나 독특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난 외모와 몸매를 대부분 밖으로 드러내 다소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봐서는 전형적인 포티아족 여성이라 할 수 있었지만, 얼굴은 물론이고 팔다리를 비롯한 온몸에 붉은 문신으로 가득한 모습과 결정적으로 여인의 머리 위로 삐죽 솟아 나온 붉은색 뿔은 내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신은 누구시죠?"

악마화가 진행 중이던 티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그 모습에 나는 경계도를 최상으로 높이며 여성에게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허, 멋대로 쳐들어와 놓고서 당신은 누구냐니,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길더스텐, 그 녀석은 자기 신도를 이렇게 관리하는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지."

그러자 돌아온 것은 기가 찬다는 여인의 반응이었다.

"…길더스텐?"

카르실리안 대륙의 종족들이 신으로 모시는 존재의 이름을 마치 제 또래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마냥 푸념하는 여인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하하, 이거 참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그 꼬장꼬장한 성격의 길더스텐을 모시는 신도라는 녀석이 자기가 모시는 신의 이름을 '님'자도 붙이지 않고 그렇게 가볍게 말하다니!"

그리고 길더스텐을 향한 신앙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나의 반응은 여인의 흥미를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

사실, 내게 길더스텐을 향한 신앙심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뭐라 답하기도 난감한 반응이었다.

"하하하, 이 몸을 아주 오랜만에 웃긴 녀석이기도 하거니와, 빙빙 말을 돌리는 재주도 없으니 그 건방진 질문에 바로 답해주마. 이 몸의 이름은 플레온이다."

그리고 내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기색의 여인이 시원스럽게 공개한 정체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말도 안 되는…."

플레온.

열두 신 중에서 전쟁과 불을 주관하는 신이며, 포티아족이 숭배하는 신의 이름이 아닌가.

그런 존재가 대체 왜 여기서 나타난단 말인가?

"왜 놀라고 있느냐? 이 몸은 그대들이 포티아족이라 부르는 아이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그들의 피 안에서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거늘, 네 녀석이 한 아이의 몸에 무식하게 길더스텐 녀석의 힘을 부어 넣은 탓에 이 몸이 깨어나 버린 것이 아니더냐."

"아니, 저는 그럴 의도로 그런 것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에 현기증이 일어나, 나는 머리를 짚었다.

내가 시도한 것은 티아의 몸을 잠식하던 악마의 기운을 몰아내는 것이었지, 포티아족의 피 안에서 잠들어 있던 플레온을 깨우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잠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티아는 괜찮은 건가?

"흐음? 반응을 보아하니 의도치 않았던 일이었던 모양인데, 네가 신성력을 부어 넣은 아이의 몸이라면 문제가 없을 거다."

내 반응을 여유롭게 살피며 불안감을 포착한 플레온은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멀쩡한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저주에 당했습니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플레온 신의 입장에서야 딱히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닌 악마가 우스울 수야 있겠지만, 악마의 힘에 잠식당하며 연신 비명을 질러대던 티아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시라도 빨리 티아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초조함을 느낀 탓에 플레온의 말에 대꾸하는 내 목소리는 조금 날이 서 있었다.

"하하하, 이런 반응은 신선하구나. 감히 신 앞에서 이치를 따지려 드는 것이냐? 네녀석이 그만한 능력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신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 불량한 태도가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순간 플레온을 감싸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사냥에 나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사냥감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흉흉한 기세에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떨려왔지만, 나는 이대로 플레온의 기세에 눌려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플레온 님이 티아의 몸을 차지하려는 악마를 몰아내는 것 역시 가능하시겠죠. 비록 제가 당신을 신앙하는 신도는 아니라고 하나, 신으로서 자각이 있으시다면 플레온 님께서 돌보는 포티아족의 아이 하나를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플레온이 포티아족을 자신의 '아이'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반문했다.

'아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를 지칭하는 말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라면 '아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요컨대, 플레온이 포티아족에 특별히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가정하에 던진 노림수였다.

"흐음…제법 당돌한 대답이긴 하다만, 네녀석의 그 요구는 들어줄 수 없겠구나. 그건…."

그리고 그런 내 노림수가 먹혔는지, 플레온은 날카로웠던 기세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온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어째서입니까?"

무언가 사정이 있어 잠들어 있었다지만, 신이라 불리는 존재라면 자신의 '아이' 하나 정도 지켜낼 힘은 여유롭게 남아있을 터인데 어째서 그러려고 하지 않는가.

답답한 마음에 퉁명스러운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이 몸이 용감한 이를 예우한다지만, 무례를 용서하는 것은 세 번이 한계라고 미리 경고해두마. 이 몸의 말을 중간에 끊지 마라."

"……."

다시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낸 플레온의 경고에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네녀석은 이 몸 더러 티아라는 아이의 몸에 들어온 악마를 몰아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

어째서 불가능한 것이냐며 항변하고 싶었지만, 이미 두 번이나 플레온의 심기를 건드렸던 나는 침묵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냐고 묻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군. 그러나 신에게도 신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내 아이가 이대로 그 녀석의 수하에게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따악

거기까지 말한 플레온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자, 아직도 새하얗게 빛나던 공간이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흔들리는 공간 속에서 균형을 다잡으며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가 서 있던 공간은 황량한 벌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악

그리고 내 발밑으로 날아와 바닥에 꽂히는 한 자루의 단검.

"티아라는 아이를 구하고 싶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네 손으로 그 아이를 구해보도록 하여라. 줍거라."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이 대뜸 과제를 던져준 꼴이었지만, 나는 군말 없이 플레온의 지시대로 바닥에 꽂힌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플레온이 내게 건넨 단검의 자루에는 불과 전쟁을 관장하는 신인 플레온을 상징하는 두 개의 교차한 검 사이로 타오르는 불꽃 문양이 유려한 솜씨로 조각되어 있었다.

검날의 길이는 15㎝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으로, 전투에 사용하는 무기로써의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을 보다 우선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예 연발이 가능한 자동권총을 주고 악마와 맞서라고 해도 될까 말까 한 수준인데, 체력도 전투기술도 부족한 내가 과연 이 단검으로 티아의 내면에 숨어든 악마를 처치할 수 있을까?

"내 힘의 일부를 담은 단검이다. 조잡한 악마 녀석 정도야 그 단검으로 심장을 찌른다면 간단하게 몰아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지금 플레온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여 심기를 거슬러봐야 내가 얻을 것이 없었고, 단검 안에 자신의 힘을 담았다는 플레온의 말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교단에서도 '축성'이라는 작업을 통해 길더스텐의 힘이 물건에 정착한 것을 '성물'이라 부르며 평소에는 성소에다 보관하다가, 무척이나 중요한 임무에 나서는 사제나 성기사에게 아주 제한인 조건으로 불출을 허용하며, 불출 후에도 교단의 관리 하에 매우 엄격하게 관리한다.

비록 길더스텐이 아닌 다른 신의 힘이 깃든 무기라지만, 신이 직접 자신의 힘을 담은 물건이라면 밑지는 셈 치고 사용해볼 가치는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시작하지."

─따악!

플레온의 목소리와 동시에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머리가 쪼개지는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엎어졌다.

"이게 대체…?"

"뭘 멍하니 있는 것이냐? 설마 이 몸이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네녀석을 곧바로 보내주리라 생각한 것이더냐?"

얼얼한 머리를 감싸 쥐며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플레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몸이 어째서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지 아느냐? 이 몸은 멍청한 녀석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장에 나서는 꼴은 못 보느니라."

"하지만 이래서는 시간이…!"

플레온의 말은 분명 옳았다.

고작 신물을 하나 얻었다고 정면으로 악마와 맞서 싸울 능력은 내게 없었으니까.

그러나 평균보다도 떨어지는 이 저질 체력을 가지고 도대체 언제쯤 전쟁의 신이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사이에 악마가 티아의 몸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시간을 걱정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느니라. 이곳은 포티아족의 피를 이은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심상 세계의 심층. 바깥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곳이니라."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플레온은 이 공간과 바깥의 시간 흐름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손가락 끝에 작은 불씨를 일으켜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 얼마든지 덤벼보도록 하여라. 네녀석이 이 몸에게 아주 작은 상처 하나라도 낼 수 있다면 합격으로 쳐 주도록 하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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