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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69화 (69/80)

〈 69화 〉 불과 전쟁의 신 (2)

* * *

"쯧쯧. 어디 그래서야 이 몸에 조그마한 생채기라도 낼 수 있겠느냐?"

─파앙

플레온이 끌끌 혀를 차며 내지른 손바닥이 내 몸을 가격하자, 나는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볼품없이 바닥을 굴렀다.

이것으로 내가 바닥을 구른 것은 천이백 하고도 일흔다섯 번째.

이제는 서 있는 것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시 가겠습니다."

그러나 내게 바닥에 엎어진 채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만한 투지도 없어서야 무슨 일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다시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고쳐잡는 내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플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곰방대를 입가로 가져갔다.

어떻게 보면 나를 무시하거나 도발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괘념치 않고 플레온의 동작에서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상대는 싸움에 관해서는 카르실리안 대륙의 어느 종족보다도 뛰어나다는 포티아족이 신으로 모시는 존재.

저렇게 허술하고 여유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내 눈에는 좀처럼 파고 들어갈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파악이 너무 늦는구나. 전장에서 멍하니 있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거늘."

그렇다고 빈틈을 노리며 대치를 무작정 이어갈 수도 없었다.

대치가 조금만 길어진다 싶으면 자비없이 플레온이 공격을 시작하기에, 나는 여러 번 바닥을 구른 탓에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압!"

나는 나름대로 힘을 내 보려고 기합까지 내지르며 단검을 휘둘렀다.

"부족하구나. 너무 허점이 많은 공격이다."

그러나 플레온은 그런 자포자기식으로 휘두르는 공격에 맞아줄 정도로 느슨한 스승이 아니었다.

여유롭게 내가 내지른 단검을 회피하며 빠른 속도로 반격을 시작하는 플레온.

'…온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내 눈앞에 앞으로 일어날 과정이 생생히 스쳐 지나갔다.

공격권을 잃은 나를 향해 날아드는 플레온의 손바닥과 그 절묘한 공격에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구르는 내 모습.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그러나 몇 번이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요령이든 파훼법이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플레온이 내게 공격을 가하는 순간 마지막 힘을 짜내 반격을 가한다는 육참골단(????)의 전술.

─파앙

또다시 내 복부에 꽂히는 플레온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지금이야!'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머리에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단검을 역수로 고쳐잡고는 내게 근접한 플레온을 향해 그대로 내려찍었다.

"…제법 머리를 쓴 모양이로구나."

흐릿해진 시야에 보이는 것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플레온이었다.

"아…."

그 표정을 보고 이번에는 성공한 것인가 싶어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보이는 것은 단검을 쥔 내 손을 단단히 붙잡은 플레온의 팔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플레온의 팔에는 조그만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제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상대와 끝장을 보려는 독한 녀석들이 있는 법인데, 네녀석이 바로 그 독한 녀석이로구나."

─다만, 상대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자신만 목숨을 잃어서야 그것은 그저 개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더냐?

플레온이 그렇게 말하며 내 손목을 꺾자, 단검을 쥐었던 손에 힘이 풀린 나는 단검을 놓치고 말았다.

"저는 반드시…."

손목이 꺾인 고통과 플레온의 손바닥에 여러 차례 가격당한 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티아는 죽고 만다.

비롯 첫 만남이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아픔을 품고 있는 녀석이었고, 지금은 내게 의지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만큼 나는 잔혹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럴 능력도 무엇도 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은 머저리라서 그 무엇도 놓아줄 수 없다.

"…미련한 것 같으니. 고집불통인 점이 참으로 그 녀석과 판박이로구나."

플레온은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더니,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잠시 잠들어 있도록 하거라.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기로 하마."

"안됩니다. 저는 더…."

나는 플레온에게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플레온은 더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다시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날렸고, 그대로 내 의식은 암전했다.

*

"쯧, 미련한 것 같으니."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에일라를 내려다보며 플레온은 혀를 찼다.

너무나도 무모하고 어리석으면서도 지독한 아이였다.

수많은 전사를 자신의 손으로 키워낸 전쟁의 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 에일라는 결함품 중의 결함품이었다.

이전에 플레온이 가르쳤던 전사 중에서 배움이 느린 전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에일라의 신체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기본을 받쳐줄 능력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낮았다.

그나마 틈틈이 상대의 빈틈을 노려 반격하려는 시도를 보아하니 전투 감각 자체는 좋았다만, 그것도 최소한의 신체 능력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길더스텐, 네녀석도 참 성질이 고약하구나. 굳이 골라도 이런 녀석을 고르다니 말이다. 그리 모진 말을 해 놓고도 아직 미련이 남았더냐?"

영 마뜩잖은 일이라며 구시렁대던 플레온은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망설이던 마음을 몰아냈다.

"시험을 통과하지도 않고 기어이 이 몸을 움직이게 만들다니. 참으로 고약한 녀석이로구나."

입으로는 툴툴거리며 불만을 늘어놓는 플레온이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원칙적으로 내가 직접 개입하는 것은 협정 위반이다만, 이 녀석의 몸을 통한 개입이라면 눈 가리고 아웅이기는 해도 협정 위반은 아니지."

플레온의 활동을 제한하는 '협정'으로 그녀는 본디 때가 오기 전까지는 움직이거나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세상 어디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듯이 그 '협정'에도 우회로는 존재했다.

협정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수하를 이용하거나 다른 이를 유도하여 움직이게 하는 등의 간접적인 개입은 허용하는 사실상 구멍투성이의 협정이었다.

플레온이나 상대방이나 모두 그 허점을 알고 있었지만, 둘 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일부러 그 사실을 무시했으니 이 사실을 걸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절반이기는 하다만, 감히 나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넘본 값은 톡톡히 받아 가야겠구나."

불과 전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대부분은 불과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파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불과 전쟁은 인류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뒤를 이어 대지를 딛고 살아갈 얼굴도 본 적 없는 후대의 누군가를 위하여.

그렇다면 감히 자신의 것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심판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불과 전쟁의 신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이 아니겠는가.

"좋다. 어디 한번 날뛰어 보도록 하여라. 이 몸의 힘을 받고서도 고작 저런 저급한 녀석에게 진다면 그 대가는 목을 바쳐야 할 것이니라."

플레온은 만약 진다면 목을 바치라는 다소 섬뜩하면서도 전쟁의 신 다운 응원을 보내며, 자신의 신성력을 에일라의 몸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

"아, 안돼…."

다시 이곳에 떨어졌다.

다시 이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저번에 나를 유혹하던 목소리가 방침을 바꾸었는지, 이번에는 직접 악마로서의 모습을 드러냈고, 내가 저항할 틈도 없이 모든 것을 부수고, 불태우기 시작했다.

버림받고 떠나온 곳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따뜻했던 기억이 남아있던 곳이기도 했던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다.

내게 항상 애증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던 할아버지는 악마가 팔을 휘두른 것에 목이 잘려 바닥에 머리만이 나뒹굴고 있다.

지금도 저택 곳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은 분명 악마가 저택의 사람들을 살해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일 터.

"하하하하하! 어리석은 녀석! 이렇게 간단한 일을 주저하다니!"

거기에 나를 조롱하는 악마의 목소리는 귓가를 거칠게 열어젖히며 파고들었다.

"아, 아니야. 나는…."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았어.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그렇게 항변해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그것을 비웃는 악마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뿐이었다.

"아니라고? 웃기는 소리! 너는 네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부숴버린 저 늙은이와 그에 편승하여 네게 짜증을 풀어댔던 놈들을 죽여버리고 싶었잖아?"

"아니야! 이건…아니라고…."

나는 그저 돌아오기를 바랐다.

사소한 일을 해내도 기특하다며 웃어주는 할아버지의 미소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잠자리에 들기 전 시녀들과 그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던 그때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모두가 고통과 저주가 담긴 단말마를 내지르며 불길 속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계속 눈물이나 흘리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그럴수록 나는 내 목적을 더 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나를 비웃는 악마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을수록 절망이라는 이름의 늪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던 도중,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이 티아를 버렸어도, 저는 티아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도와줘."

언젠가는 도와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의지하는 것이 참으로 염치없는 행동이라고 느껴졌지만 내가 의지할 곳은 그곳 말고는 없었다.

"도와달라고? 하하하하하! 지금 너를 도와줄 녀석은 없어! 없다고!"

다시금 나를 향해 날아드는 악마의 조롱.

그 끔찍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눈을 감고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네. 티아가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의지해 주세요. 티아는 제 친구잖아요?

문득, 제대로 된 기도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생각과 함께 에일라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구해줘. 에일라."

진심을 담아 나를 처음으로 친구라고 불러준 나의 첫 친구에게 이 기도가 닿기를.

"하하하! 기도하는 것이 그 잘난 길더스텐도 아니고 고작 인간이라고? 이것 참 우습구나!"

당연하게도 내 기도에 악마는 우습다는 반응을 보이며 조소를 보냈다.

─하지만

"시끄럽네요. 물에 담가놓으면 입만 동동 뜰 악마."

"…에일라?"

신성력을 사용해 일으키는 것이 아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경우를 빗대는 말인 '기적'처럼 에일라는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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