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불과 전쟁의 신 (3)
* * *
뜨겁다.
여름철의 작열하는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아무런 피서 용품도 걸치지 않고 서 있는 것처럼, 뜨겁게 달궈진 돌덩이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것처럼, 뜨겁다는 감각만이 내 모든 감각을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크윽."
당장 정신을 잃고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은 고통 속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온갖 고통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기로 유명한 작열통이 고작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진정될 리가 만무했지만, 이대로 정신을 잃는다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이라는 묘한 직감이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붙들어 줄 닻이 되어 주었다.
[흐음, 정신을 차린 것이더냐? 생각보다 빠르구나.]
그렇게 극심한 작열감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던 도중, 내 머릿속에 플레온의 사념파가 울려 퍼졌다.
"…플레온 님?"
사념파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야 에일라와 했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플레온의 사념파에 응답했다.
[호오, 이 몸이 건넨 기운의 지독한 열기에 정신을 똑바로 가누기도 힘들 터인데, 이 몸의 중얼거림에 대꾸할 여유까지 있는 것이더냐? 재미있구나.]
지독한 작열감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한 내 태도가 흥미로웠는지, 플레온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건네준 기운…. 그렇다면 이건…."
그리고 나는 그 대화를 통해 이 타는 듯한 고통의 원인이 플레온이 직접 내게 주입한 신성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설명을 쓸데없이 길게 늘여 말하는 취미는 없으니 가만히 들어라. 우선 네녀석의 몸을 맴도는 낯선 기운이 있을 것이다.]
"낯선 기운? 아…!"
플레온의 설명대로 조심스럽게 몸을 살펴보니, 나는 작열감 말고도 몸을 맴도는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불길처럼 뜨거운 기운을 계속해서 뿜어내면서도 조금도 식지 않고 온몸을 순환하는 맹렬한 기운.
그리고 그 기운의 영향인지, 조금만 체력을 소모해도 헐떡이던 에일라의 몸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 인제야 좀 볼만한 꼴이 되었구나. 이 몸의 기운이 네녀석의 몸에 머무는 동안 네녀석의 체력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꺼지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무기라도 제 몸을 다루듯이 손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를 인지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내 모습에 플레온은 비로소 볼만한 꼴이 되었다며 만족스럽다는 반응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힘으로 빨리 티아를….'
이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어깨너머로 보았던 칼린의 동작을 따라해 보며 이 힘이면 티아를 잠식하는 악마에 충분히 맞설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허나 아이들 중에서 제법 볼만한 전사 하나에게 힘을 나누어 주는 것보다는 효율이 낮구나. 따라서 그 힘에는 제약이 있느니라.]
"……."
그러나 용기백배한 내 생각을 읽었는지, 플레온은 내 확신에 곧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지금 이곳은 티아라는 아이의 심상 속이라 네녀석이 그 힘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겠다만, 이곳에서 나간 뒤에는 그 아이와의 강력한 결속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아마 몇 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니라.]
"그 결속이라는 것은…."
[흐음,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알려줘야 하더냐?]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 힘은 사실상 이번 한 번으로 한정된 것이라는 말에 나는 그 조건을 물었지만, 플레온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정도는 스스로 깨우쳐 사용하도록 하거라. 나는 이미 네게 충분한 단서를 주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이곳은…."
깨어나자마자 느껴진 작열감으로 인해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만, 내 주변 풍경은 플레온과 대련을 벌였던 황야가 아닌, 새빨간 불길에 삼켜진 채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저택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고도 모르느냐? 네가 구하려는 아이가 있는 곳이다.]
"……."
플레온이 밝힌 사실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곳에 티아의 정신이 있다.
그리고 그런 티아를 영원히 잠재우고 그 몸을 차지하려는 악마도 이곳에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단검을 붙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 준비는 되었느냐? 나는 네녀석에게 기회를 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플레온에게 감사를 표하자, 이어져 있던 연결이 갑작스럽게 끊어지는 느낌이 감각을 엄습했다.
"떠난 건가요…."
그리고 나는 이것이 플레온이 내게 모든 일의 뒤처리를 맡기고 다시 잠에 빠져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티아."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듯 말한 뒤, 나는 불길이 맹렬히 피어오르는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타닥타닥
저택을 뒤덮은 새빨간 불길은 그 지저분한 혀를 날름대며 나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불길은 내게 조금의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역시 불의 신이 내려준 신성력이라 그런지, 이런 불은 아무렇지도 않네. 불길에 닿아도 몸이 타오르지도 않고 전혀 뜨겁지도 않다니.'
오히려 지금 내 몸을 난폭하게 질주하는 플레온의 신성력에 비하면 이런 불길 정도야 오히려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터엉!
"…방해인가요."
그러나 침입자인 나를 이대로 순순히 들여보내 줄 생각은 없었는지, 불길에 휩싸인 저택의 잔해가 나를 향해 연신 떨어져 내리며 길을 방해했다.
'머리 위에서 하나, 오른쪽에서 둘.'
재빠르게 잔해가 떨어지는 위치를 확인한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원래라면 체력이 약한 탓에 끊임없이 쏟아지는 잔해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겠지만, 지금 내게는 플레온에게서 받은 신성력이 있었다.
"흐읍!"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리에 힘을 주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분명 무리였을 움직임이 지금은 내가 생각한 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할 수 있어! 이 저주받은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 준다고!'
그 사실에 나는 해방감과 동시에 고양감을 느꼈다.
─쿠르릉!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악마는 어떻게든 내 침입을 막을 생각이었는지, 천둥 치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잔해의 수를 계속해서 늘렸다.
─콰앙!
그러다가 잔해를 떨어뜨리는 것으로는 나를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저택의 천장이 통째로 무너지며, 저택의 잔해가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방해에요."
그에 맞서 나는 무너지는 천장을 향해 단검을 쥔 팔을 휘둘렀다.
─콰삭!
아무리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목재라고 하지만, 아직 심이 살아있어 단단하고 무거움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잔해가 고작 단검 하나에 산산이 조각나는 묘기가 펼쳐졌다.
"…저기군요."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부수며 발걸음을 옮긴 결과, 나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을 삼킨 불길이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중심지이자, 악마가 티아를 회유하기 위해 더러운 술수를 부리고 있을 것이 분명한 저택의 방.
망설임 없이 나는 그곳을 향해 몸을 던졌다.
*
"…에일라?"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일라…맞지?"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올렸던 기도가 닿은 것인지, 에일라가 나를 구하러 달려와 주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떨어졌다.
고마웠다.
여태껏 만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기만 했다.
이글라스 가문에서 유일하게 남은 직계의 핏줄이라며 온갖 예쁨을 받았던 이글라스 저택은 자신이 포티아족의 피가 섞인 혼혈아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무시무시한 냉대가 쏟아지는 곳으로 돌변했다.
냉대 속에 쫓겨나듯 도착한 수녀원에서 원치도 않았던 수도 생활을 버텨가며 어느 정도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들 역시 자신을 이용해 먹기 좋은 인간으로 생각했을 뿐, 결국 자신을 기꺼이 버림패로 써먹지 않았던가.
"…티아, 괜찮은 건가요?"
그리고 그런 사람과는 달리 나를 향해 걱정 섞인 질문을 던지는 에일라.
그 질문을 듣자, 멍하니 에일라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것을 들켰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동시에 에일라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는 기쁨이 가슴에 복받쳐 올랐다.
"…방해꾼이 왔구나."
그러나 감격에 가득 찬 재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끔찍한 광경을 보여주며 나를 끊임없이 조롱했던 악마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에일라를 향해 으르렁거린 것이다.
"흐음. 악마에게 굳이 존대할 필요는 없겠죠. 다른 사람의 몸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기생충 따위에 존엄은 없을 테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금방 공포에 질리거나 긴장감에 몸이 굳어버릴 정도로 악마의 기세는 흉흉했지만, 오히려 에일라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악마를 향해 도발했다.
"이 열등한 것이 뚫린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구나."
그리고 에일라의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악마는 몹시 언짢다는 반응을 보이며 에일라를 노려보았다.
'괘, 괜찮을까?'
여태껏 에일라가 보여줬던 활약을 생각해 보면 에일라가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에일라가 기적을 사용하면 악마는 그 강력한 신성력을 이기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퇴치당하는 것이 여태까지의 흐름이었으니까.
"자, 덤비세요. 지저분한 기생충."
"어리석은 길더스텐의 말을 따르는 떨거지가 허세를 부리기는!"
그러나 에일라는 도발에 넘어가 역정을 내며 달려드는 악마를 향해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네놈은 길더스텐 그 빌어먹을 여자의 힘을 믿은 모양이지만, 이곳에서 그년의 힘은 사용할 수 없다!"
이곳에서는 길더스텐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할 수 없다 단언하는 악마.
"…확실히 그런 모양이군요."
그리고 에일라는 악마의 말을 그대로 긍정했다.
"에일라! 피해!"
안 된다.
여기서 기적을 사용할 수 없다면 에일라는 저 악마를 이길 수 없다.
기적을 사용할 수 없는 에일라는 평균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병약한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악마의 힘에 맞설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에일라를 향해 소리쳤지만, 에일라는 오히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악마를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뭣이! 말도 안 된다…! 이 힘은…!"
끔찍한 결과를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당황한 악마의 목소리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에일라가 서 있었던 곳을 향해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왜 그러시죠? 자랑할 건 힘밖에 없었는데 그토록 경멸하던 인간에게 힘으로 밀려서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었나요?"
"이, 이놈이!"
저택 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악마와 그런 악마를 밟고 서 있는 에일라.
악마는 자신이 힘에서 밀렸다는 굴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고, 에일라는 비웃음이 담긴 시선으로 악마를 내려다보는 예상했던 결과와 상반된 결과에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놈! 어떻게 인간 주제에 그런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냐!"
"글쎄요. 어째서일까요."
바닥에 처박힌 몸을 빼내며 에일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악마의 추궁에 에일라는 피식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좋다! 이 빌어먹을 놈. 내 모든 힘을 사용해서 그 자신만만한 면상을 조각조각 부숴주고 말겠다!"
악마는 에일라의 능청에 진심으로 분노한 모양이었다.
─화르륵
계속해서 저택을 불태우던 불길이 악마를 향해 몰려들며 악마의 몸에 불길을 옮겨 붙였다.
그러나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악마는 그 불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덩치를 급격하게 불리기 시작했다.
"덩치를 키우면 무조건 유리해진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단순하기 짝이 없네요."
그러나 에일라는 거대한 언덕만 한 크기로 덩치를 키운 악마를 앞에 두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불을 흡수하여 덩치를 불리는 악마…."
오히려 악마가 보이는 특성을 바탕으로 그 정체를 추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죽어라! 이놈!"
그런 에일라의 태도가 무척이나 신경을 긁었는지, 악마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 주먹을 에일라를 향해 떨어트렸다.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그에 맞서, 에일라 역시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콰아앙!
악마가 휘두른 거대한 주먹과 에일라가 휘두른 자그마한 단검.
누가 봐도 우위가 명확한 두 공격이 충돌하자 강렬한 충격파가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재와 먼지가 뒤섞인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사방을 뒤덮었다.
"에일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