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불과 전쟁의 신 (4)
* * *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나는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악마의 거대한 주먹을 막기 위해 단검을 뽑아 들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도문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그러자 내 몸을 흐르던 플레온의 뜨거운 기운이 더욱더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포티아족이 사용한다는 플레온의 기적인가?'
일반적으로 카르실리안 대륙에서 기적을 발동하는 방식은 기도문이나 경전의 구절을 외우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상 회화에서도 관용어로 사용되는 기도문의 일부나 경전의 구절을 입에 담을 때마다 기적이 발동한다면 불편할 점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기도문과 경전의 구절을 외운다고 해서 반드시 기적이 발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용할 기적의 종류를 결정하고 그 범위와 효과의 정도를 조절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 기적을 내리는 신의 힘, 신성력에 사용자의 의지를 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기적은 발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카르실리안 대륙에 존재하는 종족마다 주로 모시는 신이 다르듯이, 종족마다 타고 나는 신성력의 성질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길더스텐을 가장 으뜸으로 섬기는 키니아 제국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의 경우 길더스텐의 기적은 수월히 행할 수 있지만, 다른 신의 기적을 행하라 하면 버벅대거나 기적이 발동되지 않으며 심한 경우 몸을 순환하는 신성력에 이상이 생겨 불구가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키니아 제국의 인간 종족인 에일라가 포티아족이 사용하는 플레온의 기적을 행하는 모습은 오랜 시간 동안 기적에 대해 연구해 왔던 카르실리안 대륙의 수많은 신학자들을 모조리 그 자리에서 뒤집어지게 만들 일이라는 말이다.
'뭐, 나는 플레온에게 직접 힘을 받았으니 포티아족이 사용하는 기적도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러나 나는 다소 덤덤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이 힘은 티아를 구하고 난 뒤에는 플레온이 말했던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힘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들킬 일도 없을 것이며, 기왕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간 답답했던 마음을 모조리 저 악마를 향해 풀어놓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콰앙
굉음을 내며 충돌하는 거대한 주먹과 조그마한 단검.
"에일라!"
누군가에게 그 결과를 묻는다면 당연히 거대한 주먹 쪽이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고 싸움을 바라보던 티아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지만, 이번 충돌의 결과는 달랐다.
"덩치만 컸지, 실속이라곤 조금도 없는 공격이군요."
비록 단단한 악마의 갑피를 뚫지는 못했지만, 그 충격에도 부러지지 않은 단검과 내 팔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악마의 주먹을 여유롭게 지탱하고 있었다.
"이, 이놈…! 어떻게!"
난쟁이가 거인을 한 손가락으로 받치고 서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악마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내려쳤던 주먹을 거두었다.
"이놈! 길더스텐을 따르는 머저리에 불과한 네놈이 어째서 플레온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냐!"
"글쎼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플레온은 내가 지쳐서 기절한 사이에 내게 신성력을 불어넣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놓았으니 말이다.
"플레온! 감히 협정을 깨고 내게 해를 가할 셈인가!"
그러나 내 대답이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인지, 악마는 더더욱 분노하며 자신의 몸을 휘감은 불꽃을 부르르 떨었다.
'협정이라…. 플레온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이유가 그거였나?'
본인이 직접 나서서 티아를 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했던 플레온의 말과 플레온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분노하는 악마의 태도를 합쳐서 생각하면 틀림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그것보다는 이 기회를 노려야 해.'
플레온과 악마 사이의 협정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악마를 쓰러뜨리고 티아를 구출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는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처음 사용한 기적은 아직 효과가 남아있는 모양이고…. 다른 공격용 기적은 없나?'
무기라고는 고작 플레온이 준 단검 하나뿐인 상황에서 어지간한 3층 건물 높이 가까이 크기를 불린 악마에게 섣불리 다가가 유효타를 입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플레온이 악마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넣으라고 직접 언급한 것을 생각하면 최후의 일격은 물론 단검으로 가하는 것이 맞겠지만, 우선은 그 심장에 단검을 꽂아 넣을 상황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번에도 처음 기적을 사용했을 때와 같이 똑같은 기도문을 외우며 악마를 향해 팔을 뻗자, 손바닥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피어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플레온! 네 이놈!"
내가 기적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악마가 몸을 감싼 화염을 왼팔에 집중시킨 뒤 휘둘러 방어했지만, 역시 악마와 신의 힘에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악마의 왼팔은 곳곳에 화상 자국이 피어오르며 흉하게 일그러졌다.
'길더스텐의 기적을 사용했을 때만큼 극상성은 아니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어.'
불에 내성이 있어 몸에 불꽃을 두르고도 멀쩡히 돌아다니던 악마의 몸에 화상을 입을 정도다.
이 힘이라면 저 악마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얻은 나는 이어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여신이여…."
"망할 떨거지 놈이 감히!"
또 내가 기적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가는 자신의 패배라는 것을 직감한 악마는 나를 향해 급히 팔을 휘둘렀다.
다행히도 저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회피를 선택한 내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지만, 불타오르던 저택의 벽에는 무시무시한 손톱자국이 남았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는 다시 플레온의 기적을 사용했다.
"크아아아악!"
불꽃이 쉼 없이 피어오르던 악마의 등에 작렬하는 플레온의 불길이 악마의 등을 헤집으며 화상을 입히자, 거대해졌던 악마의 몸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 계속 악마의 전력을 깎아내면…응?'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내가 다시 공격을 가하려던 순간, 기적으로 강화된 감각이 위험을 알려왔다.
─채앵
감각이 경고를 보냈던 장소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자 그곳에는 길게 자라난 악마의 손톱이 있었다.
"플레온! 어째서 이 되다 만 것을 돕는 것이냐!"
제 나름대로 회심의 반격이었는지, 악마는 공격이 실패하자 분노를 가득 담은 채 플레온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3층 건물 높이에 육박했던 악마의 덩치도 어느덧 크게 줄어들어, 성인 남성 기준으로 조금 키가 큰 수준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직접 무기를 맞부딪히며 전투를 벌이는 것도 가능할 터.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그것이 전부인가요?"
그렇게 판단한 나는 악마를 향해 도발을 날렸다.
"이 되다 만 것이…!"
그대로 도발에 넘어가 돌진해오는 악마.
맹렬히 타오르는 불을 다루는 악마답게 도발에 무척이나 취약한 악마였다.
─채앵
그리고 단검과 손톱이 교차하며 쇠붙이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기를 몇 차례.
"크윽!"
먼저 힘을 잃고 부러져 버린 것은 악마의 손톱 쪽이었다.
"이대로…당하기만 할 줄 알았느냐!"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악마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는지, 부러진 채 허공으로 떠올랐던 손톱을 붙잡아 투척했다.
"…티아!"
싸움을 벌이던 도중에 잠시 잊혔던 티아의 목을 정확하게 노린 투척.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반격이었다.
"저 영혼만 사라지면 이 몸을 차지하고 나는 살 아남을 수 있다. 이 일의 복수는 반드시…."
악마의 노림수를 깨달은 나는 티아 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악마 역시 내가 그렇게 행동할 것을 예상하고 내 진로를 가로막았다.
"닥쳐요!"
티아의 위기에 다급해진 마음 탓이었을까.
진짜 에일라라면 '시끄러워요.'정도로 끝냈을 말을 더 거칠고 날카로운 욕설의 형태로 내뱉고 말았다.
─푸욱
"크헉…."
그리고 내 분노가 담긴 단검은 앞을 가로막았던 악마의 가슴 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프, 플레온…감히…을 배신…."
단검이 꽂힌 악마의 가슴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맹렬한 불길.
그 불길은 삽시간에 악마의 몸을 집어삼키며 불태웠고, 불길 속에서 악마의 원통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티아! 피해요!"
하지만 그 광경을 여유롭게 구경할 여유는 없었다.
악마가 최후의 발악으로 투척한 부러진 손톱이 티아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젠장! 기적으로 강화된 몸이라고 해도 이걸론 부족해!'
이미 한발 늦게 반응한 데다, 악마가 나를 가로막으면서 부족한 시간이 더욱 촉박해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악마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넣으면서 저 날카로운 손톱을 쳐낼 무기도 없어진 상태.
그 결과, 내가 선택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식한 방법이라며 고개를 내저을 방법이었다.
─푸욱
왼손바닥을 꿰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감각.
"하아…."
나는 그 끔찍한 감각을 느끼며 숨을 들이쉬었다.
손톱에 관통당한 왼손은 물론이고, 내 왼손바닥을 꿰뚫었음에도 여전히 가속력이 남아있던 손톱을 붙잡은 오른손 역시 날카로운 칼날을 힘껏 움켜쥔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에, 에일라!"
너무나도 빠르게 벌어진 일이어서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던 티아는 내 양손이 피투성이가 된 것에 화들짝 놀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요. 티아. 이 정도는…."
"괜찮을 리가 없잖아! 피, 피가!"
나는 티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는 말을 꺼냈지만 티아는 오히려 내 말에 펄쩍 뛰며 피투성이가 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빠, 빨리 치료를…!"
내 손을 붙잡은 티아는 치료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내 티아 자신은 치유 효과가 있는 기적을 사용할 수도 없고, 기적이 아닌 일반적인 방법으로 상처를 치료할 도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왕좌왕했다.
"괜찮아요. 이제 악마는 쓰러졌어요. 이젠 안전해요. 이만 돌아가죠. 티아."
그런 티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며 티아의 등을 토닥였다.
"나, 나는…이번에도…."
눈가를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는 티아.
그 시선과 티아가 꺼낼 죄책감 섞인 말이 조금 낯부끄럽게 느껴졌던 나는 짐짓 시선을 돌리며 티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해가 뜨네요."
악마와의 싸움 도중에 무너졌던 저택의 천장과 벽 너머의 하늘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민 태양이 새까맣게 물들었던 하늘에 푸르스름한 여명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으로 가득했던 세상을 되찾겠다는 의지라도 있는지, 태양으로부터 온 세상을 감싸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새하얀 빛.
그 눈부신 섬광 속에서 나는 티아를 꼭 안아주며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