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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72화 (72/80)

〈 72화 〉 휴식, 그리고 선택

* * *

─쪼르륵

희미한 의식 사이, 차가운 액체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물? 아냐 이 차가우면서 뜨거운 느낌은…술?'

처음에는 물인가 싶었지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화끈한 느낌이 온몸에 퍼지는 것으로 보아 누군지는 몰라도 내게 술을 먹인 것이 분명했다.

"콜록!"

이전의 내 몸이라면 별문제는 없었겠지만, 여태껏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 없던 에일라의 몸은 처음 마시는 술, 그것도 마시자마자 체감 온도를 치솟게 하는 독한 술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으으…."

이미 목구멍을 타고 대부분의 술이 넘어간 뒤라 입안에 머금은 술을 사방에 흩뿌리는 일은 면했지만, 이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고순도의 알코올은 이미 온몸으로 퍼지며 가벼운 어지러움과 두통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 드디어 일어난 모양이군."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상체를 일으키니 그 인기척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누구…시죠?"

내 마지막 기억은 티아의 몸을 차지하여 악마화시키려던 악마를 플레온의 힘을 빌려 퇴치했고, 그 반동으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정신을 차렸을 때 운이 좋다면 임시로 거처로 삼은 동굴 안, 운이 없다면 눈이 쌓인 설원 한가운데서 눈을 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벽난로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따스한 방 한구석에 놓인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새하얀 수염을 산타클로스처럼 길게 기른, 사람이 좋아 보이는 초로의 남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허허,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보다 주변을 좀 둘러보는 게 어떤가?"

"……."

노인의 말대로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덮은 이불 위에 탈진한 듯이 쓰러져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금발과 적갈색 머리칼을 지닌 두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정체는 말할 것도 없이 세이사와 티아.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기다리며 잠까지 줄여가며 나를 간호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아가씨를 극진히 여기는 친구들이 있다니, 아가씨는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네."

"…그러게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노인의 말에 낯이 간질거렸지만, 차마 반론할 수가 없었던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다른 일행이 더 있었는데요."

그래도 이런 낯이 간질거리는 분위기 속에 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다른 일행의 안위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전환했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마부 한 명과 다른 친구들, 저 북쪽 땅에서 온 손님까지 모두 무사하다네."

"…다행이네요."

단 한 명도 목숨을 잃는 일 없이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기운이 쭈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 자고 싶은 기분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한 뒤에 해야겠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허어,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네. 왜 갑자기 내게 사과를 하는 건가?"

노인은 짐짓 모른 체를 하며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나는 이미 방을 둘러보면서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한 뒤였다.

"아르니크 수도원의 아르벨 수도원장님이 아니십니까."

"허허, 눈치가 빠른 자매님이시군."

내가 벽 한구석에 걸린 액자 안에 담긴 문서를 가리키며 묻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눈썰미가 있다면 누구라도 눈치챌 거라고 생각합니다.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아르벨 수도원장은 재미있다며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짐짓 겸양하며 별것 아닌 일임을 강조했다.

리피샤 수녀원장의 방을 방문했을 때에도 벽 한구석에 걸려있던 문서와 비슷한 것이 떡하니 방 한구석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 사실은 별로 대단한 추리도 아니었으니 괜히 칭찬을 받아봐야 낯부끄러울 뿐이었다.

"흐음…그런가? 자매님이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알겠네. 편히 쉬게나. 다른 일행들에게는 내가 소식을 전해주도록 하겠네."

다행히도 내 뉘앙스가 전해졌는지, 아르벨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물러났다.

"편히 쉬라고 말해도…."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는 말이었지만, 어차피 지금은 엿들을 사람도 없는 상황이기도 해서 나는 곧바로 푸념을 내뱉었다.

"수도원장실을 병실로 내어주다니 이건 대체 무슨 의도인 건지…."

솔직히 말해서 부담스럽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깨어난 곳이 수도원장의 방이라니.

지금 내 상황과 비슷한 예시를 들자면 병장이나 상병쯤 되는 병사가 낮에 작업하던 도중에 일사병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대대장실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편히 쉬라고 말한다고 해서 편히 쉴 수 있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내게는 '성녀 후보'라는 신분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 직책에 불과했고, 어떠한 이유로 그 자격을 잃거나 최종 경쟁에서 탈락하여 성녀가 되지 못한다면 다시 평범한 수녀의 신분으로 돌아가니, 지금 내 정식 지위는 수습 수녀와 정식 수녀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애매한 위치였다.

'뭐 명목상으로는 '성녀 후보'라는 신분이 우선되니 수도원장급의 사제와는 상호 존대하는 거로 되어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앞세우며 교단에 오랫동안 발붙이며 연륜을 쌓아온 사제들에게 지위만 믿고 날뛰는 오만방자한 애송이라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수도원장실이라 그런가, 집기 하나하나가 다 고급스럽네.'

당장 내가 덮고 있는 이불만 해도 손으로 쓸어보면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겉감은 물론이오, 안감은 깃털이나 솜을 가득 채워 넣었는지 푹신푹신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이 누가 봐도 고급품임이 분명했다.

수녀원에서 사용했던 꼬질꼬질한 담요와 비교하자면 그 격차는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었다.

"…일단 일어날까요."

어차피 이 푹신한 침대는 내가 사용한 뒤.

그렇다면 그 호의를 더 많은 사람이 누리도록 하는 것까지는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네요."

침대에 기대어 잠든 두 사람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온 나는 곤히 잠든 티아와 세이사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우선은 손을 겨드랑이 사이로 넣은 뒤, 허리를 붙잡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침대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가볍네.'

침대 위로 옮기는 데 제법 힘을 써야 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의 몸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내가 팔에 힘을 줘서 위로 들어 올리면 별다른 저항도 없이 쑥쑥 들려 올라가는 것이, 사람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봉제 인형을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됐다. 이제 주위를 좀 둘러볼 수 있겠어.'

아무튼, 무사히 두 사람을 침대 위로 옮긴 나는 두 사람의 몸 위로 내가 덮었던 이불을 덮어준 뒤, 수도원장실임이 분명한 이 방을 찬찬히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에일라. 지금 있는 거지?'

티아의 심상 세계로 들어가면서 끊어졌던 에일라와의 연결이 복구되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네. 저는 여기 있어요. 시후. 잠시 연결이 끊어졌을 때는 정말 끝인 줄 알았어요. 목숨을 연명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시후의 혼이 없다면 이 몸은 텅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는 '다시 연결되었다.'였다.

'미안, 걱정을 끼쳐서. 사실 그때는….'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에일라에게 잠시 연결이 끊어졌던 동안의 이야기를 간략히 요약해서 알려주었다.

[그랬군요. 그런 일이….]

에일라는 내가 플레온을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고, 플레온의 힘을 받아 티아의 몸을 빼앗으려던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서로 성질이 다른 신성력을 몸에 받아들여서 기적까지 사용했다고요?]

'그래. 플레온의 기적으로 불을 일으키거나 신체 능력을 강화해서 악마를 상대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어떤 신의 신성력을 받아들여서 기적을 행할 수 있게 된 사람은 그 신의 기적 말고는 다른 신의 기적을 행할 수 없어요. 아주 불가능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시후의 말처럼 자유자재로 기적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해요.]

심각한 목소리로 이상한 점을 짚어주는 에일라.

생각해보니 이 부분에 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아 나는 에일라에게 그 부분에 관한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네. 그때 플레온은 이런 말도 했었어. 이곳은 티아의 심상 세계 속이라 포티아족의 피 안에 잠들어 있던 플레온의 영향으로 자유롭게 그 힘을 다룰 수 있지만, 이후에는 티아와 강력한 결속을 맺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을 거라고.'

[…뭐, 뭐라고요?]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당황한 에일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 마마마말도 안 돼요. 겨, 결속이라고요? 그것도 강력한?]

'왜 그러는데? 그 결속이라는 것에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어?'

이렇게 당황하는 에일라의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 이유를 물었지만, 에일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말을 우물거리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주저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잘 들어요. 시후. 카르실리안의 신학에서 '결속', 그것도 '강력한 결속'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뭐라고요?"

그리고 에일라의 설명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플레온, 이 미친 우결충이!'

에일라가 내게 설명해 준 '결속', 그중에서도 '강력한 결속'이라는 것의 의미는 축복 속에 두 사람의 영혼이 엮이며 하나의 가족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의식.

흔히 다른 말로는 '결혼'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첫날밤을 보내는 것까지 포함한 의미로.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네. 저도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런 걸로 치죠.]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나와 에일라는 방금의 문답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일단 방부터 둘러볼까.'

조금 전 티아를 침대 위로 옮기면서 손끝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각이 어째선지 생생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떨군 채로 최대한 침대 쪽에서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벨 수도원장이 내게 술을 먹인 덕분에 내 얼굴이 붉어진 이유를 둘러댈 핑계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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