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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73화 (73/80)

〈 73화 〉 휴식, 그리고 선택 (2)

* * *

"…별건 없네요."

티아의 일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자 시작한 수도원장실의 조사는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방을 뒤져 나온 물건은 길더스텐 교단의 인증을 받았다는 표식이 찍힌 표지에 손때를 잔뜩 탄 성서, 깨어나서 방을 대충 둘러본 것만으로도 발견할 수 있었던 아르벨 사제를 아르니크 수도원의 장으로 임명한다는 문서가 담긴 액자, 그리고 수도원의 행정을 처리하는 일에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잉크나 깃펜 등의 사무용품 정도가 끝.

혹여나 중요한 문서가 있을까 싶어 책상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아르벨 수도원장은 그런 일에는 철저한 것인지 책장 서랍이나 금고처럼 문서를 보관할 만한 장소에는 하나같이 잠금장치가 단단히 걸려있었다.

'그보다 칼린이랑 엘리, 피루스 씨, 루피아 사제에게 소식을 알린다던 아르벨 수도원장이 늦네.'

결국 할 일을 잃은 나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로 아르벨 수도원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다 쓰러져서 위급한 상황이었을 테니 그걸 옮기느라 칼린과 피루스 씨, 루피아 사제가 고생이 많았을 것 같은데.'

엘리는 애초에 자기 마음대로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꼬맹이고, 자기 몸보다 큰 사람을 옮길만한 재주가 없으니 제외.

그러면 마침 1명씩 인원이 나누어지기도 했겠다, 각각 1명씩 담당해서 눈보라가 몰아치던 산을 벗어났을 터였다.

그 고생이야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

'혹시 에일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저도 그때는 시후와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어요. 아마 기적 사용을 보조하는 보조 인격으로 전락한 제가 감각을 느끼는 것은 시후가 무사한 경우로만 한정되는 모양이에요.]

내가 티아의 심상 세계로 들어갔을 때, 에일라는 그래도 몸에 붙어있었을 테니 주변의 상황 정도야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울해지는 주제라고 해야 할까.

정신은 멀쩡히 살아 있지만, 스스로 볼 수도, 들을 수도, 무언가를 느낄 수도 없다면 그것이 캄캄한 상자 안에 꼼짝도 할 수 없게 갇혀버린 것과 무엇이 다를까.

[…동정할 필요는 없어요.]

'글쎄…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살짝 부루퉁해진 에일라의 말을 받아넘기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냉정하게 말하면 당장 뾰족한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믿는 종교도 없던 내가 에일라의 몸에 빙의한 것도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없는 데다, 에일라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내가 원래 살던 세상으로 되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인 위로를 건네는 것과 에일라는 소녀가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무사히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다.

'한 사람의 목숨만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인걸. 무슨 임산부도 아니고. 아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계속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한숨과 함께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상한 잡념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무서운 성격이에요. 하마터면 넘어갈 뻔…헉, 제가 무슨 소리를.]

"……."

그러나 이상한 잡념에 빠진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분명 여름은 멀었을 텐데…. 덥네….'

[그, 그러게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는 나와 에일라.

분명 아르벨 수도원장이 내게 목구멍 너머로 부어 넣은 술로 인한 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에일라 님! 무사하심까!"

"에일라 언니!"

"에일라 성녀 후보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민망함을 잊기 위해 침대에 걸터앉아 손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소식을 전하러 나갔던 아르벨 수도원장이 다른 일행들과 함께 돌아왔다.

"보다시피 괜찮아요. 다들 고생이 많았을 텐데 죄송해요."

몸은 좀 어떠냐며 안부를 묻는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하며 허세를 부린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죄송함다. 그놈이 마지막에 그런 발악을 벌일 줄은…."

"그 일은 제 잘못이니 칼린 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전부 제 잘못이었어요."

칼린은 호위 기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채무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이미 끝난 일로 사과받고 싶진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이번 습격은 힘을 과신하고 허점투성이의 계획을 세운 내 과실이 원인이었으니 사과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그보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어쩌다 우리가 아르니크 수도원까지 오게 된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르니크 수도원과 우리가 조난했던 라우리파 산 사이의 거리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단순한 이동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 몰라도, 도저히 환자를 업고 이동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리.

"아, 그게 말임다…."

뭐라 말하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은 칼린이 대답을 주저하는 동안, 내 의문에 대답해준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리나가 우리를 도와줬어요!"

엘리의 엉뚱한 대답.

그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정말이냐는 시선을 칼린과 루피아에게 보냈다.

"…어, 그게 설명하기가 난감함다만…사실임다."

"그…믿기 어려운 일이지만…엘리 양의 말이 맞습니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머뭇머뭇하면서도 엘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칼린과 루피아.

"이 어린 자매의 말이 맞다네."

그리고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우리들의 재회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르벨 수도원장이었다.

"다만…이 어린 자매가 '리나'라고 부르는 존재가 천사라는 것이 문제라네."

*

"…이 문제는 따지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군요."

키니아 제국의 수도 리아트.

제국의 국교인 길더스텐 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대성당의 회의실 안에서 분노를 이성으로 간신히 억누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신뢰의 문제입니다. 우리 아가드 교단은 길더스텐 교단에게 이 일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분노를 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길더스텐 교단에 해명을 요구한 남자의 이름은 아렌.

키니아 제국의 북부와 국경을 접한 비르겐 교국의 신관이자, 아가드 교단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인물이었다.

"루피아 자매가 길더스텐 교단이 관할하는 순례길에서 습격을 받았습니다. 어째서 우리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 한 것인지 저는 여기서 그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

길더스텐 교단 측에서 협상을 위해 이 자리에 나온 사제들은 아렌의 추궁에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줄 사제단의 파견도 안 돼, 먼저 우리를 돕겠다고 나선 성녀 후보 하나를 데려가는 것도 안 돼, 대체 언제까지 안 되겠다는 대답만 들려주실 생각입니까?"

사실 길더스텐 교단은 굳이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아가드 교단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당장 교단 내부에서 파벌이 갈리며 갈등이 심화할 조짐을 보이는 상황이라 자신들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사제들을 위험한 곳에 파견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좋은 말로 비르겐에서 온 협상단을 달래며 물자를 조금 지원해 주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솔직한 속내였으니 말이다.

'끈질긴 놈. 그저 겉치레로 한 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꼴이라니.'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아렌의 추궁은 성가신 진상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렌이 지목한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를 파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지만, 막대한 신성력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어 교단 내에서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인물인 만큼. 교단 내에서는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를 섣부르게 외국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강세였다.

'그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가 눈과 얼음밖에 없는 비르겐 교국에 진심으로 갈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아카데미의 신학과로 불러들여 포섭하려고 했건만….'

물론 그들이 에일라의 비르겐행을 막은 진짜 이유는 막대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차기 성녀로 뽑힐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되는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를 자신들의 파벌로 포섭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섭에 진전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아렌을 비롯한 아가드 교단의 사제들은 불쾌함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끈질기게 교섭을 이어 나가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수도 리아트로 한 소식이 날아들었고, 협상장의 분위기는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악마 숭배자들의 공격을 받은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가 다쳤고, 동행했던 사람들 역시 눈보라를 뚫고 이동하느라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여 당분간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소식.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악마 숭배자들의 공격에 성녀 후보가 다친 것은 분명 교단에서 제법 골치를 썩일 문제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 습격을 무사히 이겨내고 사망자도 없었으니 잘 무마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 일행에는 우리 아가드 교단의 자매 역시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와 동행했던 사람 중에 아가드 교단의 협상단을 따라 내려왔던 사제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협상에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는 소식.

그렇기에 길더스텐 교단 측에서는 이 사실을 아가드 교단 측에 숨기는 것을 택했고, 그 사실을 오늘이 되어서야 알아차린 아렌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며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겠소.'

'끄응….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아렌의 기세에 눌린 것도 있고, 명분상으로도 불리해진 길더스텐 교단은 결국 아렌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 조건이 있소."

"무엇입니까?"

마침내 원하던 약속을 얻어내어 기분이 조금은 풀린 아렌에게 길더스텐 교단의 사제는 조건을 내걸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의 생각을 들어보고, 그때도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의 생각이 변함없다면 우리 길더스텐 교단은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를 비르겐 교국에 파견하는 일에 동의하겠소."

"그렇다면 거절당했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렌은 더 이상 자신들이 손해를 보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세로 따져 물었고, 길더스텐 교단의 사제는 고개를 돌려 잠시 한숨을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가 거절한다면 따로 사제단을 파견하여 그대들을 돕겠소."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지루하게 늘어지던 협상은 단 하나의 소식이 전해진 것을 계기로 마침내 끝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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