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74화 (74/80)

〈 74화 〉 휴식, 그리고 선택 (3)

* * *

"천사…말인가요?"

아르벨 수도원장이 꺼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천사란 존재가 무엇인가?

카르실리안 대륙의 종족들이 믿는 신의 종복이자 전령으로서, 신의 뜻을 대리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신성하디 신성한 존재가 아니던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자매님들에게 일어난 일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일어난 이적이라고 할 수 있지. 덕분에 교단에서도 이적을 조사하겠다고 이적 조사관을 파견했고, 이런저런 목적으로 자매님에게 선을 대보려는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네."

그러나 아르벨 수도원장이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꺼낸 말에 내 정신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또 빌어먹을 교단 내 알력 다툼에 말려들게 생겼구나.'

수도 리아트에서 온갖 방법으로 내게 선을 대보려고 하던 파벌들의 요청을 수도에서 있었던 사건을 핑계로 물리치고, 수녀원으로 돌아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춰나갈 준비를 하던 중에 이런 과도한 관심은 손해가 되면 손해가 되었지, 이득이 될 만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어느 세력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힘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결국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어 사방에서 공격받기 마련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 인간은 무슨 속셈일까.'

더불어, 굳이 이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것으로 아르벨 수도원장이 무엇을 얻어내려 하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하자, 푹신했던 침대마저 가시방석이 된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하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까진 없다네. 이 늙은이는 딱히 자매들을 팔아서 무슨 짓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서 말이네."

"…알겠습니다."

아르벨 수도원장이 허허 웃으며 긴장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경계심이 올라가 있었던 나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은 채로 굳었던 얼굴을 바르게 했다.

'에일라, 어떻게 생각해? 거짓말일 가능성은?'

[…온전히 믿을 수는 없죠. 수도원장이라는 자리에 오를 정도의 사제라면 누구나 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씩은 품고 있으니까요.]

우리 일행을 구해준 은혜에는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그걸 빌미로 삼아 이용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그런 마음에 에일라에게 의견을 구하니, 에일라는 잠시 침묵하더니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는 대답을 되돌려 주었다.

'그래. 일단은 상황을 보는 수밖에 없겠네.'

대략적인 방침이 정해지니 대응할 방법 역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회사생활로 사회생활을 겪으며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그보다 이제 자매님이 깨어났으니 슬슬 일을 시작해도 될 것 같군."

그렇게 내가 긴장한 채로 아르벨 수도원장의 얼굴을 곁눈질하고 있자니, 아르벨 수도원장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태평한 목소리로 새로운 화제를 들고왔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갓 깨어난 탓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는 나는 당연하게도 아르벨 수도원장의 말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자매님에게도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꼬마 자매님이 '리나'라 부르는 천사님께서 자매들을 위험에서 구해냈다는 것을."

그리고 내 반문에 아르벨 수도원장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무척이나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천사님이 에일라 넬런 자매님을 찾고 있다네."

그 태연한 모습에 나는 절로 머리가 아파 왔다.

나이를 먹으면 세상일에 달관해서 어지간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평온한 것 아닌가?

*

"루크, 아르니크 수도원은 아직 멀었나요?"

아르니크 수도원을 향해 뻗어 있는, 진흙으로 질척이는 길 위를 천천히 달리는 마차 안에서 감귤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지루함을 참지 못했는지 재촉이 담긴 질문을 자신의 동행인에게 건넸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르멜 이적 조사관님. 아시다시피 해빙기가 찾아온 북부의 도로는 마차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여유를 가지고 느긋한 마음으로 여행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루크라는 이름으로 불린 소녀의 동행인 역시 소녀, 아르멜의 조바심을 눈치채었지만, 그렇다고 진흙이 질척거리는 물렁물렁한 도로 위의 마차를 전력으로 질주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마부에게 주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루크는 완곡한 태도로 아르멜의 재촉을 물리쳤다.

"아으, 진짜 귀찮아 죽겠네. 이적이라는 게 원래 '나 일어난다!'하고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지만, 하필이면 해빙기가 한창인 북부에서 일어날 게 뭐람."

자신의 재촉이 반려되자, 아르멜은 투덜거리며 다소 신성모독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인간인 우리가 감히 신의 뜻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투철한 신앙심에 불타는 사제가 들었다면 아르멜의 발언을 지적하며 당장 고해성사를 하러 갈 것을 요구했을 테지만, 루크는 그런 고리타분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재미없어."

그런 그의 반응에 김이 새기라도 했는지, 아르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홱 돌리고 마차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멜 아가씨."

명백히 루크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아르멜이 삐진 것이 분명한 상황.

참으로 철이 덜 든 철부지 아가씨 같은 아르멜의 태도에 루크는 입가가 절로 실룩이려는 것을 참으며 아르멜을 불렀다.

"…뭔데."

화가 다 풀리지 않았음을 드러내듯, 고개는 여전히 마차 바깥을 향한 채로 대꾸하는 아르멜.

"가주님의 뜻을 따라 이적 조사관이 되신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계십니까?"

"…그런 거 아니야. 이 일에는 나름대로 정이 붙었거든."

루크의 질문에 곧바로 아르멜의 부정이 날아들었다.

"가주님의 뜻을 따라 교단에 출가한 몸이어도 저는 루트비히 가문의 은덕을 입은 몸입니다. 아가씨께서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사양하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좋을 대로 하고 있잖아. 됐어. 이 이상으로 루크를 혹사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것보다는…."

마차 바깥을 향했던 시선을 되돌려 루크를 바라보는 아르멜의 눈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망나니 같은 후배가 이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같은 황립 아카데미 출신인걸. 수업이 겹치는 날에는 대화도 조금씩 나눠봤고."

아르멜 루트비히.

황립 아카데미의 신학과를 졸업하고 교단의 이적 조사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그녀는 황립 아카데미에서 보았던 에일라 넬런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교단도 그렇고, 다른 귀족들도 그렇고, 에일라 넬런이 가진 막대한 신성력과 이적을 어떻게 이용할지에만 관심이 쏠려있을 뿐, 그 애가 원래 어떤 애였는지는 관심 밖이야. 적어도 내가 본 에일라 넬런은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아가씨가 본 에일라 넬런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루크의 질문에 아르멜은 찌푸렸던 미간을 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것처럼 행동하던 녀석이었어."

"달관…입니까?"

달관과 에일라 넬런이라는 단어에서 연관성을 찾지 못한 루크가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고, 아르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 달관이야. 자기가 무슨 일을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듯이 눈동자는 텅 비어있고, 뭘 하든 의욕이 없어 보이는 녀석이었으니까."

"확실히…그건 처음 듣는 정보군요."

"그런데 웃기는 점이 뭔지 알아? 그렇게 인형처럼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만 들어도 제대로 점수를 받기 어려운 황립 아카데미의 수업을 닥치는 대로 들으면서도 교수들이 놀랄 만큼 훌륭한 점수를 받아내는 괴짜 같은 점이야. 애초에 모든 것을 달관한 사람이라면 고작 시험 점수 따위에 연연할 것도 없지 않겠어?"

"…그 말이 맞습니다."

루크는 아르멜의 이야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립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가.

교단이 주축이 되어 세워졌던 기존의 교육 기관들에서 탈피하여, 황실의 이름을 당당히 내걸고 키니아 제국의 황실에 충성하는 뛰어난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키니아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키니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칭송받는 '현제' 셀름 4세가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린 학문의 길'을 천명하며 아카데미를 창설한 이래로, 키니아 제국을 뒤흔든 위대한 인재는 모두 황실 아카데미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아카데미의 졸업장에 이름을 올리려면, 3년간에 달하는 밀도 높은 수업과 문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절로 감싸 쥐게 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 수준은 신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르멜조차 신학과의 빡빡한 수업에 진절머리를 내며 루크를 찾아와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 한과의 수업을 따라가며 시험을 통과하기도 벅찬데, 무슨 재주로 여러 학과의 수업을 따라가면서 모든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두뇌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군요.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재능으로…."

'…수도의 귀족 가문들을 박살 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려던 루크였지만, 루크는 아르멜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눈치채고서는 말을 끊었다.

"루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송구합니다."

황급히 아르멜에게 사죄하는 루크.

아르멜은 그 모습을 보며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됐어.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아무튼 이야기를 되돌리면, 아무리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녀석이라고 해도 수도의 귀족 가문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 날려버리는 것은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이야."

루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아르멜의 말에 동의했다.

수도의 귀족은 지방에 영지를 지닌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생태를 가진다.

그들은 영지가 없지만, 큰 공적을 세우거나 황실에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는 등의 방식으로 작위를 얻어낸 자들로, 온갖 더러운 권모술수에 있어서는 이들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런 뱀과도 같은 자들을 먼저 건드려 봐야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러나 에일라 넬런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일을 저질렀고, 결국 엘러나흐 백작가가 몰락하는 사건에서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녀석이 넬런 백작가에서 쫓겨나기 전에 직접 물어봤었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

"…네?"

아르멜의 말에 루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말한 줄 알아?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미 자기 손을 떠난 일이라더라.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이제 다 끝난 일이라나?"

"그건…."

루크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 시도는 아르멜이 손을 내젓는 것으로 간단히 저지되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애는 가문에서 쫓겨난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었어."

단순히 가문에서 쫓겨나게 된 탓에 실망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루크의 시선에 아르멜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그런 분위기를 풍겼단 말이야. 그래 마치…죽을 생각이라도 가진 것처럼. 게다가 내가 눈썰미가 좋잖아? 이미 자해라도 했는지 손목에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더라. 그래서 약으로 쓰라고 연고를 슬쩍 건네줬었는데 잘 가져갔는지 모르겠네."

"……."

아르멜의 말을 들은 루크는 침묵했다.

상상 이상으로 행동력이 좋았던 아르멜의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있었지만, 아르멜이 무슨 생각으로 이번 이적 조사에 지원했는지 이해하고 말았기에 취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물어볼 생각이야. 어쩌다가 성녀 후보가 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거든. 수도에 왔을 때는 때가 맞지 않아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하잖아?"

교단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이적이 사실인지 아닌지 규명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

그러나 아르멜이 하려는 것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에일라 넬런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없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교단에서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겠지만, 어쩌겠어? 날 담당관으로 파견한 걸 후회하라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루크를 바라보는 아르멜.

그 모습에 루크는 '말괄량이시지만, 정말이지 인정이 넘치는 아가씨'라 생각하며 슬쩍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번 만남이 아가씨의 삶에 큰 변화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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