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휴식, 그리고 선택 (4)
* * *
아르벨 수도원장의 인도에 따라 '천사'가 머무르고 있다는 방으로 향하는 길.
"허억…헉…."
예상치 못했던 무수한 계단의 파도에 휩쓸린 나는 계단의 난간을 붙잡으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필 방을 써도…이런 곳에…."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라 방마저 하늘에 가까운 곳을 선호하는 습성이라도 있는 것인지, 천사가 머무는 방은 종탑을 제외하면 아르니크 수도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독방이었다.
"괜찮슴까? 업어드림까?"
"됐으니까…조용히 하세요…."
칼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를 걱정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업어주겠다는 제안을 건넸지만, 이래 봬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던 주제에 여자아이 등에 업혀 계단을 올라가는 꼴은 아무리 생각해도 꼴불견이었기에 나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허억…헉…."
칼린의 제안을 거절하고 계단 위로 발걸음을 몇 걸음 옮기기 시작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루피아가 동행했다면 기적을 사용해서 땀이 뻘뻘 흐르는 몸을 식혀주기라도 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다른 교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루피아는 이번에 동행하지 않았다.
"에일라, 도와줄게."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에일라 언니를 도와 드릴게요!"
"에일라, 괜찮아? 부축해 줄까?"
"…됐어요. 이런 계단은 제힘만으로도…."
칼린의 제안 말고도 티아, 엘리, 세이사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나를 옆에서 부축해 주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나는 이 제안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시후, 너무 자존심만 앞세운 것 아닐까요?]
'시끄러워….'
그렇게 모든 제안을 물리치고 묵묵히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 에일라가 나를 약 올리듯이 말하는 걸 시끄럽다 일축한 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꾸역꾸역 움직이며 계단을 오르는 일에 정신을 집중했다.
열 계단…스무 계단….
머릿속으로 올라온 계단 수를 세던 것이 어느덧 백 번째가 되었을 즈음, 끝이 없어 보이던 계단은 마침내 그 끝을 드러냈다.
성인 남성이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조그마한 문이 딸린 첨탑 끄트머리의 방.
"천사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천사님이 찾으시던 에일라 자매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라."
아르벨 수도원장이 그 조그마한 문을 두드리며 공손히 입실을 청하자, 잠깐의 침묵 이후 문 너머에서 무척이나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아르벨 수도원장이 문고리를 당기자, 경첩에 기름칠이 부족했던 것인지 문은 '끼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
문이 열리자, 방 안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면서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 내 손바닥으로 날아든 것은 새하얗게 빛나는 깃털.
"반갑구나."
그 깃털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조금 전 들어오라 말했던 앳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천사님을 뵙습니다."
"…천사님을 뵙습니다."
그 목소리에 맞춰, 아르벨 수도원장을 필두로 주위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천사를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고개를 들라."
잠시 후, 우리들의 인사를 받아들인 천사가 고개를 들 것을 명했고, 고개를 들어 천사의 얼굴을 처음 본 감상은….
'…인형?'
…인형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분명 천사의 외모는 극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백옥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와 석양빛을 받아 출렁이는 금빛 물결처럼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금발,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처럼 밝게 빛나는 금안, 빛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순백의 날개는 수많은 예술가가 추구하는 '극상의 미(美)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대답으로 삼아도 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움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대들은 들어라."
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이한 목소리.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눈을 마주하는 것 같지 않은 공허한 금안, 이야기를 듣는 상대의 반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용무만을 앞세우는 고압적인 태도.
그랬다.
천사에겐 '인간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신의 뜻을 받들어 임무를 행하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관심 밖인 인형과도 다를 바 없는 존재.
"…미천한 종이 길더스텐 님의 뜻을 받듭니다."
그러나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나는 천사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하게 부복하면서 신명을 받들 준비를 마쳤다.
'…엘리는 저런 존재에 친근감을 느꼈던 건가? 대체 얼마나 친구가 없었으면….'
물론 속으로는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대들의 도움으로 감히 신의 힘을 탐하던 자들에게서 벗어나 다시 신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도다."
다행히도 내 불경한 생각을 읽어내지는 못했는지, 천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일종의 감사 인사와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감정이 배제된 천사의 평이한 어조에서 감사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여, 길더스텐 님께서 그대들의 소원 하나를 들어줄 것을 명하셨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당장 답을 하기에는…."
그러나 천사가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그런 감상은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천사가 직접 들어주는 소원이다.
이것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기회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리에 동석한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런 중요한 선택을 즉석에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동시에 천사가 허락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고 하면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
"……."
미묘한 긴장감이 담긴 정적이 천사와 우리 사이에 흘렀고, 그 무거운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천사 쪽이었다.
"허한다."
허락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좁은 방을 가득 채웠던 무거운 공기가 흩어졌고, 우리는 불편한 분위기로 가득 찼었던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원래 천사분들은 다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여나 문 너머의 천사에게 들릴까 봐 목소리를 죽여가며 꺼낸 내 질문에 아르벨 수도원장이 허허 웃으며 답해주었다.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렇다네. 길더스텐 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니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겠지. 그보다…에일라 자매님은 괜찮겠나? 다른 일행과 의견을 나누려고 지금 계단을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때 고생이 많을 텐데."
"아…."
아르벨 수도원장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문제없습니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는지는…나도 잘 모르겠다.
*
"에일라, 또 마차가 들어오고 있어."
창가에서 바깥을 살피던 세이사의 말마따나, 계단을 다시 내려오느라 완전히 지쳐버린 내가 잠시 방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아르니크 수도원은 계속해서 몰려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차가 많네요."
길더스텐 교단을 상징하는 십자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둘, 양피지와 펜을 형상화한 오스라드 상단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셋이었으니, 아르니크 수도원은 팔자에도 없던 손님을 한꺼번에 몰아받는 처지가 되었다.
'오스라드 상단에서 온 사람이라면 티아는 따로 빼 두는 편이 좋을까.'
교단에서 파견한 인물만 상대하는 것이라면 따로 빼낼 필요가 없었지만, 수도에서 아이셀을 봤을 때도 그렇고, 한 번 아이셀 오스라드에게 이용당했던 전적이 있는 티아에게 오스라드 상단은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일 테니 가급적이면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보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짐작 가는 게 없는데.'
아이셀을 비롯한 셀린 영애의 기사님들(웃음)이 눈꼴 시려워서라도 오스라드 상단과의 거래는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일임해 두었고,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내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게 미리 손을 쓰고 왔는데도 부득불 찾아올 이유라면 무언가 일이 있긴 한 것이 분명했다.
─똑똑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던 도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
"들어오세요. 무슨 일이시죠?"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는 목소리에 대답하자,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아르니크 수도원의 수사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수도원을 찾으신 손님들께서 성녀 후보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아가드의 사제분도 동행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용건은 짐작한 대로 아르니크 수도원을 찾아온 '손님들'이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찾아갈 거라고 전해주세요. 어디로 찾아가면 될까요?"
"아, 알겠습니다. 필사실을 비워 두었으니 준비가 다 끝나시면 문을 두드려주십시오. 필사실까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분명 에일라의 나이보다 다섯 살은 더 먹었을 수사였지만, 내 무덤덤한 반응에 이 젊은 수사는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피다가 문을 닫으며 물러났다.
금방 찾아가겠다는 소식을 전하러 빠르게 걸어가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무슨 별을 옆에다 두고 식사하는 이등병도 아니고.'
뭐, 카르실리안 대륙이 아닌 지구에서도 교황이 어디로 순방한다고 하면 교황 성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다고 교인들이 구름같이 모이던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나도 나름대로 교황에 버금가는 '성녀'라는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후보'니까 교인으로서 무언가 느껴지는 아우라 같은 거라도 있는 거겠지.
"세이사, 칼린, 루피아 사제님. 어서 준비해서 나가죠."
"알았어. 에일라!"
"알겠슴다."
"알겠습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
아무튼 데려가려는 모두의 대답도 들었겠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왔으니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수사가 소식을 전하고 돌아오는 것에 맞춰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나는?"
왜인지 부루퉁한 얼굴을 한 티아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티아는 오스라드 상단 쪽의 인물과 만나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나요? 괜찮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아, 아냐! 나도 따라갈 거야!"
내가 티아를 동행인에서 제외한 이유를 언급하면서 괜찮겠냐고 묻자, 티아는 여전히 오스라드 상단이 껄끄러운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다가 이내 따라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뭐, 티아가 그렇다면 따라와도 좋아요."
"알았어!"
내 허락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티아의 대답을 듣고 이번에야말로 문을 두드려 방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에일라 언니…."
이번에는 천사를 만난 이후로 평소처럼 쉴 새 없이 재잘거리지도 않고 묘하게 풀이 죽은 것 같은 엘리가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리나가 이상해졌어요. 리나는 저렇게 무뚝뚝하게 말하지 않는데, 분명히 산에서 우리를 구해줄 때만 해도 밝게 웃어줬었는데, 지금 리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아요."
지금 일이 바쁘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투정이었지만 나는 잠시 침묵하며 엘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
그 눈에는 알고 있던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슬픔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알았어요. 교단에서 오신 훌륭하신 사제분께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면 되는 거죠?"
그 눈빛에서 엘리가 내게 원하는 것을 읽어낸 나는 내가 읽은 것이 맞는지 다시 엘리에게 물었다.
"네! 고마워요! 에일라 언니!"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엘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나는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수사를 부르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