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휴식, 그리고 선택 (5)
* * *
어두운 방을 밝게 비추는 촛불에 녹아내린 촛농 냄새와 램프에서 새어 나오는 기름 냄새, 필경대 위에 놓인 종이 냄새와 깃펜과 잉크 통에서 풍겨오는 잉크 냄새까지.
여느 수도원이나 수녀원의 필사실이 그렇듯이, 필사실에 들어서자 그런 냄새들이 한데 뒤섞인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장난스럽게 툭 치고 지나갔다.
"반갑습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교단에서 파견한 이적조사관, 아르멜 루트비히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 '필사실 냄새'를 마음껏 음미할 틈은 없었다.
우리가 필사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싱그러운 느낌이 드는 감귤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이 나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를 건넸으니 말이다.
[아….]
게다가 에일라는 여성이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에일라?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기억을 읽어도 될까?'
지금까지 어지간해서는 본 적 없는 에일라의 당황한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에일라에게 기억을 읽어도 좋은지 물었다.
[…앞으로 기억을 읽을 때는 서로 허락을 얻기로 하죠.]
어떻게 된 일인지 잠시 설명하자면, 에일라와 내가 기억을 공유하는 방식은 각각의 기억이 기록된 '윤시후'라는 책과 '에일라 넬런'이라는 책을 서로가 읽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에일라가 가진 과거의 기억이 희미하더라도 내가 에일라의 기억을 살핀다면, 이미 '에일라 넬런'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는 것처럼 그 기억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에일라가 이것만큼은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기억만큼은 책의 내용을 검게 덧칠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읽을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처음에 언급했듯이, 내가 '에일라 넬런'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에일라 역시 '윤시후'라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이건 서로 상처만 되겠다.'
시간이라는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서로의 흑역사가 타인에 의해 재발굴되는 경험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결국, 서로 민망한 기억을 들켜가며 여러 번 얼굴을 붉힌 뒤에야, 나와 에일라는 서로의 기억을 읽어야 할 상황이 오면 상대의 허락을 구한 뒤에 기억을 읽는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았다.
…과거 회상은 여기까지.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서, 이전에 합의를 본 내용에 따라 내가 에일라의 기억을 읽어도 되는지 물으니, 에일라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내가 기억을 읽는 것을 허락했다.
[…별것 아니에요. 황립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 같은 수업을 몇 번 들으며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인 선배니까요. 딱히 기억을 봐도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알았어. 그럼 기억을…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에일라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고, 먼저 아르멜이 건넨 인사에 대답하는 것이 늦어지면서 필사실 안에는 무척이나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상대의 인사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애매한 정적이 흐르게 두는 것은 자칫하면 상대를 무시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위.
우선은 헛기침과 함께 사과부터 건넸다.
"괜찮아요. 그보다 이렇게 다시 보게되다니, 정말이지 길더스텐 님의 뜻은 오묘하네요."
내가 건넨 사과가 효험이 있었는지, 아르멜의 옆에서 얼굴을 굳히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젊은 사제의 표정이 무너지며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그런 모습이 퍽 우스웠는지 입가를 끌어올리며 피식 웃은 아르멜이 나를 향해 알은체를 했다.
'…참견쟁이 선배인가.'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에일라의 기억을 빠르게 훑어본 나는 아르멜 루트비히라는 인간을 그렇게 정의했다.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원만하게 지내며, 지인이 곤란에 처한다면 자신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의리가 넘치는 누님 타입의 인물.
이 정도가 에일라의 기억을 살펴본 내가 정의한 아르멜 루트비히의 인물상이었다.
'…일부러 장난을 걸고 있군.'
더불어, 아르멜 루트비히는 후배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예의 바른 부류의 인물은 아니었다.
"…뭐 격식은 여기까지만 차려도 되겠지? 괜히 이렇게 무게를 잡아봐야 에일라…너라면 내 말투쯤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르멜 루트비히를 정의하고 있을 때, 아르멜은 격식을 차리던 말투를 집어던지고 에일라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털털한 말투를 꺼내 들었다.
"조사관님, 공적인 자리에선 말투에 주의를…."
아르멜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젊은 사제가 스스럼없는 아르멜의 말투를 듣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르멜은 그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필사실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젊은 사제의 주의를 가볍게 일축했다.
"루크는 가만히 있어. 너도 내 성격은 알고 있잖아? 어차피 소문을 퍼뜨릴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오오, 완전 마음에 드는 성격이심다! 이적조사관이라고 하면 다 고리타분하고 깐깐한 성격이라는 편견이 깨졌슴다!"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는 '루크'라는 이름의 사제와 털털한 아르멜의 모습에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눈을 빛내는 칼린의 모습이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었다.
"아 참, 그보다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였슴까?"
"…황립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의 선배예요."
"어라, 그건 조금 섭섭한 설명인걸. 에일라와 나는 황립 아카데미의 신학과 수업에서 가장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 로즐린 교수의 수업에서 유이하게 최고점수를 받아낸 동지잖아?"
나와 아르멜 이적조사관 사이의 관계를 묻는 칼린의 질문에 내가 에일라의 기억을 빌려 간단하게 대답하자, 아르멜은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 동시에 흥미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피곤한 사람이야.'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아르멜은 무시와 악의가 아니라 관심과 호의로 에일라를 대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내가 정말로 상대하기 곤란한 부류였다.
'…이젠 다른 사람과 거리를 뒀다는 네 말을 못 믿겠는데.'
…이쯤 되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그동안 에일라는 눈매도 사납고, 나쁜 소문도 많이 퍼져있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기본값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사람들을 만나보면 생각보다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여자)을 끌어모으는 사람이라….
'기만자….'
[…저, 저도 아르멜 선배가 저를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고요!]
내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내뱉은 핀잔에 울컥하며 반박하는 에일라.
'농담이야.'
…뭐, 방금의 기만자 운운은 에일라를 가볍게 골려줄 생각으로 꺼낸 농담일 뿐이었다.
에일라의 성격이 수도 리아트에 파다한 소문처럼 모질거나 악독하지 않다는 것은 에일라의 몸에 빙의하며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나 역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뭐라고요!]
내가 농담이었다는 것을 밝히자,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한 잠깐의 텀을 두었다가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아듣고 버럭 성을 내는 에일라.
…이렇게 보면 딱 나이에 맞는 소녀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결정까지 내릴 정도로 에일라를 몰아세운 넬런 백작은 대체 어떤 인간인 건지.
뭐, 악마와 결탁해서 인체실험을 일삼던 인간이니, 적어도 제정신이 온전히 박힌 인간은 아닐 것이다.
─콩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올린 것은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가벼운 충격이었다.
"…앗."
그리고,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에는 아르멜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대화 도중에 자신만의 생각에 잠기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네?"
거리감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인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온 아르멜의 행동에 나는 당황했고, 아르멜은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고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미소지었다.
…향긋한 감귤 냄새와도 같은 향이 코끝에 아른거렸다.
아르멜의 입장에선 에일라가 같은 여성이니까 이렇게 가까운 거리로 다가오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에일라의 몸에 들어앉은 것은 20대 남자의 영혼.
…너무나도 자극이 강했다.
"그래도 성격이 바뀐 건 맞는 모양이네."
게다가 아르멜은 내가 아르멜의 갑작스러운 접근으로 혼란에 빠진 사이에 나에 대한 기본적인 탐색을 모두 마친 모양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는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죽음만 기다리는 멍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에일라는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을 하고 있어."
그리고 아카데미와 지금 모습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 역시 파악한 듯한 의미심장한 질문까지.
"…그건."
그렇다고 '몸 안에 들어선 영혼이 달라져서 그렇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
"…하아, 맞아요. 제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무력하게 있어 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지겹도록 깨달았어요."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속수무책으로 아르멜의 말에 말려드는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세이사와 티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걸로 에일라 후배가 결심을 단단히 했다는 것은 알겠어. 그럼 이걸로 내 용건은 대략 해결했으니 이제 본제로 넘어가 볼까?"
그리고 자신의 사적인 목적은 이걸로 대충 해결되었다며 두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맞부딪히며 싱긋 웃어 보이는 아르멜.
"…그러시죠."
내가 떨떠름한 심정으로 아르멜의 말에 동의하자, 아르멜은 옆에서 연신 한숨을 내쉬던 루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루크, 교단에서 보낸 공문을 꺼내줄래?"
"…알겠습니다."
한숨 쉬는 것은 이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아르멜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루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거두며 교단의 인장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저기도 고생이 많구나.'
이번에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주변의 여자에 휘둘리는 그 처량한 모습을 보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수도의 머리 굳은 노인네들이 이번에 크게 데인 모양이야.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제멋대로 결정했을 일을 이렇게 공문까지 작성해서 보내다니. 자, 그럼 뜯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멜은 내가 두루마리에 찍힌 인장을 알아보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필경대 위에 놓인 필통에 꽂혀있던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께
반갑습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우선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이 험난하기로 유명한 성 그라나의 길을 순례하던 도중에 이적을 행하셨다는 소식에 놀라움과 경의를 표합니다.
이에 교단에서는 악마들의 준동으로 어두운 시기에 이적을 내려주신 길더스텐 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동시에, 이러한 이적을 행하신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을 교단 최고의 교육기관이라 자부하는 '지식의 등불'에 초청하고자 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3년간의 기도를 올린 끝에 길더스텐 님의 계시를 받은 성 라이오넬 님의 일화처럼,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추신최근 수도 리아트를 방문한 비르겐 교국의 사제들이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이 도움을 주겠다 약속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을 자신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을 모시는 사제들의 어려움에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성녀 후보에 어울리시는 모습이라 할 수 있으나, 악마들의 준동으로 믿음이 위협받는 혼란한 이 시기에 길더스텐 님의 종복으로서 믿음의 등불을 지켜나가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이라면 반드시 현명한 선택을 하실 것을 믿습니다.」
두루마리에 적힌 문장은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잔뜩 첨가된 보기만 해도 체할 것 같은 내용의 글이었지만,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적까지 일으킨 성녀 후보를 타국의 다른 교단에 내어주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일단 수도 리아트로 돌아오라. 그만한 혜택을 제공하겠다.'
"…어이가 없는 내용이네요."
두루마리의 말미에 붙은 추신이 오히려 본 내용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지는 동시에,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교단 내 알력다툼의 편린을 살짝 맛본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아마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수도 리아트로 돌아간다면, 온갖 방법으로 내게 줄을 대거나 목줄을 채우려는 이들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을 것이 분명했다.
"맞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두루마리의 내용을 확인한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옆에서 같이 내용을 확인한 아르멜 역시 내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르멜 루트비히도 나처럼 교단 내부의 다툼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
"감히 어디서 '지식의 등불' 주제에 '황립아카데미' 출신의 후배님을 채 가려고. 에일라 후배도 그렇게 생각하지?"
"……."
─지는 않고, 아르멜은 황립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퇴학당한 후배는 후배가 아니지 않나?'는 의문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에일라 후.배.님?"
"…네. 그렇네요."
조금 전에 루크를 압박했을 때 보냈던 것과 똑같은 시선을 이번에는 나를 향해 보내는 아르멜의 모습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문득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곁눈질하니, 루크가 나를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째서인지, 그 눈빛만으로도 루크가 내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