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77화 (77/80)

〈 77화 〉 휴식, 그리고 선택 (6)

* * *

"하아…."

아르멜과의 대화가 끝난 이후, 나는 밀려오는 피곤함에 한숨을 내쉬며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때는 에일라가…."

"아, 그러셨슴까? 그건…."

"아, 그때라면 에일라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는 일행들과 완전히 안면을 텄는지 '에일라 넬런의 황립아카데미 재학시절'을 주제로 온갖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아르멜의 모습을 옆에서 곁눈질하고 있자니 스트레스가 팍팍 쌓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도망쳐서 울고 있던 저를 에일라가 구해줬어요."

"그렇구나. 역시 에일라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멀쩡한 귀족 가문을 날려버리는 짓을 저지르진 않았겠지. 세이사도 고생이 많았겠네."

'…여자들은 원래 다 이런가?'

어차피 따로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앉아서 가만히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칭찬투성이였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세이사는 내가 에일라의 몸에 들어오기도 전에 있었던, 아버지의 학대와 강요로 이루어질 뻔했던 정략혼을 에일라가 나서서 막아준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

그러는 한편, 티아는 내가 자신을 구해준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은 눈치였지만,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성대한 자폭이 될 수 있는 탓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역시, 에일라 성녀 후보님은 다른 분의 고난을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시군요."

더불어,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루피아 역시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면서 부담스러움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가만히 낯부끄러워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의 이야기는 도중에 끼어든 목소리에 중단되었다.

"이적조사관님과의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만 자신들에게도 시간을 내어 주시길 바란다는 오스라드 상단 측 사람들의 전언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르니크 수도원에 들어온 마차중에는 오스라드 상단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도 있었다.

평소라면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오스라드 상단 측 인물의 방문이었지만, 지금의 부담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내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에일라 후배님의 친구들,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하면 되겠지?"

"네!"

"알겠슴다!"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아르멜이 물러나준 덕분에, 나는 마침내 부담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오랜만입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언제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오스라드 상단에서 보낸 대리인은 예상외로 조그마한 체구에 회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소녀였다.

소녀는 수도 리아트의 귀족 영애 사이에서 유행하는 프릴과 장식이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런 종류의 옷에 익숙하지 않은지 잠시 버벅거리다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왜 당신이 여기에 온 건가요."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림새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만, 기억을 되짚어보면 분명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유마'라고 했던가요?"

내가 수도 리아트에서 아이셀 오스라드와 담판을 지을 때 자리에 동석했던 할렌디스의 사제는 내가 자신을 알아본 것이 의외였던지, 무표정했던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비천한 길잡이에 불과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

평범하게 오스라드 상단에서 보낸 사람과 사업에 관련된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리라 생각했던 내 예상이 빗나간 탓일까.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

"그래서, 무슨 일이죠? 저를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 당신을 대리인으로 보냈을 리는 없을 테고요."

아이셀이 나를 일부러 엿먹이기 위해서 유마를 대리인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 나는 그 가능성을 제외했다.

'에일라 넬런'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죽음의 신께 맹세하는 계약'을 맺은 아이셀이었다.

혹여라도 아이셀이 그런 생각으로 유마를 대리인으로 파견했다면, 그런 행동 자체가 계약위반으로 판정되어 아이셀의 목숨은 그 자리에서 끝난다.

심성이 배배 꼬이기는 했지만, 거대 상단의 후계자답게 불필요한 손해를 싫어하는 아이셀의 성격상,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일부러 유마를 대리인으로 파견했을 가능성은 작았다.

'그럼 대체 왜?'

"우선,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께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아이셀이 대체 왜 유마를 대리인으로 보냈는지를 고민하며 유마를 바라보고 있으니, 유마는 나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부터 건넸다.

"…무슨 의미인가요?"

머릿속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드는 유마의 사과에 나는 약간의 짜증이 담긴 질문을 던졌고, 유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때 아이셀님의 제지로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사실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이 시네티 마을에서 위기에 처했던 원인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마의 대답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더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마을로 다수의 마수를 끌어들이는 계획, 그리고 마수들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에 이끌려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 것.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저라는 말입니다."

"……."

침묵.

유마가 밝힌 충격적인 사실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만약 이 안에 이단심문관이 있었다면, 이단이라며 당장이라도 유마를 향해 무기를 뽑아들었을 충격적인 고백.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소리를 지른 것은 티아였다.

당장이라도 유마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유마를 쏘아보는 티아와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유마.

"뭐라도 좋으니까 말하라고!"

시네티 마을에서 있었던 마수들의 습격 사건.

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험한 꼴을 당할 뻔 했던 티아로서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유마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유마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알려지면 안 그래도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인상이 좋지 못한 할렌디스의 사제들에게도 피해가 갈 텐데요."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유마를 향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 같은 티아의 기세를 진정시킬 겸, 나는 유마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할렌디스님의 신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질문에 유마는 길었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신탁?"

"그게 말이 된다고…!"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유마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티아가 기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칼린."

그러나 티아의 주먹이 유마를 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겠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유마와 티아 사이를 가로막고 선 칼린이 티아의 주먹을 여유롭게 받아낸 것이었다.

"신탁이라, 설마 그런 모호한 설명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요? 사제가 신탁을 잘못 이해한 끝에 오히려 이단으로 몰려 처형되는 일은 어떤 신을 모시는 교단이든 계속 있었던 일이니까요."

"물론입니다."

유마는 내 질문에 계속해서 숙였던 고개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들은 할렌디스 님의 신탁은 악마들이 다시 힘을 키워 이 카리실리안 대륙을 노리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 아닌가요?"

악마들이 카르실리안 대륙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종족과 믿는 신을 막론하고, 카르실리안 대륙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 평범한 범주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카르실리안 대륙은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악마들의 암약을 눈치채지 못하고, 평화에 젖어 악마에 맞설 힘을 잃고 있습니다."

유마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 반응에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권력 다툼에 골몰하는 고위 성직자들, 청렴한 수도 생활보다는 일신의 사치를 위한 재물을 끌어모으는 일에 골몰하는 수도자들.

그들에게 있어, 신을 향한 믿음은 이미 그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저는 마수들을 미끼로 삼아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면, 악마와의 싸움에서 언제나 최전선에 서던 길더스텐의 사제들이 심각성을 인지하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유마는 타성에 젖어가는 길더스텐 교단의 분위기에 파문을 일으키려는 생각이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유마의 행동은 아주 작은 변화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치맛자락을 와락 움켜잡으며 손을 부르르 떠는 유마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은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분함에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짓는 표정과도 비슷했다.

"…의도는 이해했어요. 그래도 잘했다는 말은 못 해주겠네요."

그러나 위로를 건넬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의를 위한 일에 자신의 목숨이나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할 사람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린다면 그건 밑이 빠진 항아리에 계속 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에요."

시네티 마을의 일은 내가 악마를 쓰러뜨린 것에 힘입어 적은 피해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시네티 마을에 없었거나, 마수들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시네티 마을은 그대로 마수들의 손에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인 유마.

그 모습은 적어도 꾸며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럼 질책은 이쯤에서 끝내고 조언을 할까.

"…그러니 사과하도록 하세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를 구하는 것.

"저 말고 시네티 마을의 사람들에게요."

그것으로 사람은 이전보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

"흐음, 후배님의 말솜씨가 제법인데?"

"…아가씨."

루크는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이야기를 엿듣는 아르멜을 흘겨보는 것으로 질책했지만, 아르멜은 그런 루크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문에서 귀를 떼는 동시에 루크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왜?"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엿듣는 것은 실례…하아, 아닙니다."

뻔뻔한 아르멜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단념하는 루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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