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휴식, 그리고 선택 (7)
* * *
"…알겠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던 유마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 그로 말미암아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의 분노 역시 마땅히 제가 감당해야 할 짐이겠지요."
"좋아요. 그럼 과거의 일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죠."
내가 유마에게 시네티 마을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권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유마를 시네티 마을로 보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마을을 습격한 사나운 마수들의 송곳니와 발톱에 찢긴 참혹한 모습으로 가족을 잃어야 했던 시네티 마을 사람들의 분노.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지만, 그것은 유마와 같은 소녀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젠 보모가 다 되었어.'
굳이 베풀 필요도 없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대의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지만, 유마의 행동은 나는 물론이고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과 시네티 마을을 돕기 위해 와 있던 다른 수녀들의 목숨까지 앗아갈 뻔했다.
하다못해 남에게 이용당했다고 변명이라도 가능한 티아의 경우와 달리, 유마의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한 행동이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유마를 냉정하게 내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냐, 이건 내 미래를 위한 투자야.'
그야 당연히 나를 위해서다.
아무리 성녀 후보라는 자리에 있다지만, 경쟁자가 셋이나 더 있는 상황이니 반드시 성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어느 쪽이 되었건 지지 세력을 구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교단을 양분하는 두 세력, 하얀 장미 수도회와 푸른 십자 수도회 중에서 어느 쪽도 썩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다음 대의 성녀를 자기 세력에서 배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지.'
지금의 성녀님은 굳이 분류하자면 두 수도회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교황 역시 두 수도회의 다툼을 중재하며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
'자기네 세력에서 교황이나 성녀를 배출하면 그대로 반대편 세력을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뭘 하겠어.'
수도 리아트에서 마주했던 두 수도회 소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생각으로 내게 접촉을 시도했다.
에일라 넬런은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이고, 수도에서 나쁜 소문이 무성한 탓에 딱히 의지할 곳도 없으니 적당한 사탕발림만으로도 충분히 회유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느껴지는 그들의 언행.
'남의 뜻에 휘둘리며 사는 건 한 번으로 족해.'
하는 것이라고는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공적은 자기 혼자 독식하려는 돼지 같은 상사들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언행에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나는 결국 두 세력 중 하나와 손을 잡는다는 선택지를 스스로 폐기했다.
그러나 맨손으로 자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비르겐 교국의 사제들에게 그런 제안을 했었지.'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건네는 친절은 없는 법이다.
비르겐 교국은 키니아 제국의 북부와 국경을 맞댄 나라이며, 북부는 거리상으로 가까운 탓에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르겐 교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침 내가 새로운 세력의 중심지로 삼을 생각인 수녀원도 북부에 있었으니, 비르겐 교국과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 좋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 이건 라우프에서 영향력이 큰 할렌디스 교단과의 연줄을 위한 포석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유마가 저지른 잘못을 감싸주는 것도 마찬가지인 이유에서였다.
기왕이면 나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세력은 많은 편이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악마와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인 이상, 악마들의 땅과 가장 인접한 라우프는 언젠가는 들르게 될 수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저에게 책임이 있으니, 아이셀 님께 책임을 추궁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끝마쳤을 때, 유마는 내게 오스라드 상단의 인장으로 봉인된,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양의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에일라 넬런에게」
인장을 뜯어내고 겉봉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니 아이셀의 필체로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불필요한 인사는 생략해도 좋겠지.
주위에 사람이 있다면 가급적 물리고 혼자서 내용을 확인해주길 바란다.」
제 성격은 어디 개한테도 못 주는 것인지, 아이셀이 보낸 편지는 극히 불손한 인사로 시작했다.
「유마에게 이야기는 들었겠지.
유마가 자청해서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으니.」
상황을 보아하니 아이셀도 유마가 나를 찾아가 사실을 털어놓으리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만, 적어도 유마를 심하게 책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유마의 계획을 부풀려 너를 제거하려고 획책했던 것은 분명 나였으니 말이지.」
시네티 마을의 일은 유마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이 계획한 일이라며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아이셀.
이쯤에서 대체 유마와 아이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셀린 엘리어드 영애에게 집착하는 4인방 중의 하나인 아이셀이 유마를 이렇게 싸고도는 것인지 호기심이 일었지만, 아직 편지의 내용이 많이 남아있던 관계로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고 편지를 마저 읽어나가기로 했다.
「네가 나를 떨떠름하게 여기는 것은 안다.
빌어먹을 악마와 놈의 하수인에게 속아 있지도 않은 일로 너를 끌어내리고 온갖 고생을 겪게 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원망할 거라면 마음껏 원망해도 좋다.」
흐음, 그래도 여태껏 저지른 일을 반성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잘됐네. 에일라.'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기쁘진 않은데요.]
슬쩍 에일라에게 물어보니 에일라의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뭐, 사람 감정이라는 것이 칼로 자른 것처럼 딱딱 끊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에일라가 떨떠름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는 간다.
「아무튼 이것으로 서론은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내가 아이셀에게 '그래놀라'라는 좋은 사업 거리를 던져주는 대신, 아이셀은 수도 리아트에서 활동하는 여러 세력의 동향이나 정보를 내게 제공하기로 이전에 합의를 보았으니, 부디 쓸모 있는 정보가 많이 담겨있기를 바랄 뿐이다.
「네가 악마숭배자들에게 습격받은 일이 수도까지 알려지면서, 백작의 심복이 악마숭배자들의 우두머리였다는 것 때문에 넬런 백작가도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키니아 제국이라는 이 나라는 악마와 맞서서 인류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주변의 수없이 잘게 쪼개져 있었던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몸집을 불리는 것으로 성립된 나라니까.」
아이셀이 꺼내든 이야기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내용이었다.
아무리 키니아 제국민들의 신앙심이 예전만 못하고, 교단의 내부분열로 인해 힘이 약해졌다지만, 악마와 내통한 이와 연관된 사건까지 느슨하게 처리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키니아 제국이 성립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근본적인 명분을 훼손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교단의 이단심문관들까지 동석한 심문을 거친 결과, 넬런 백작은 혐의가 없다는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아마 넬런 백작도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던 나는 예상을 벗어난 사실에 얼굴을 굳혔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그 이단심문관들까지 혐의를 밝혀내지 못한 거지?'
「심문에 관한 정보를 꽁꽁 숨기는 탓에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내는 것까지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실마리는 잡을 수 있었다.
…제2황자가 연관되어 있다더군.」
아이셀은 여기서 긴장했는지, 필체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제2황자라….'
어째서 아이셀이 긴장한 것인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너라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몰라 설명을 첨부하자면 제2황자는 네 아버지…넬런 백작이 차기 황태자로 지지하는 황자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짐작이 가겠지.」
아이셀은 자칫 내 역린을 건드릴 수 있음을 직감하고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
[…….]
슬쩍 눈치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침묵하는 에일라 쪽에서 무척이나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넬런 백작.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라우리파 산에 브라이트를 비롯한 암살자를 보내는 것으로 내 목숨을 노렸지만, 그 일이 실패로 끝나며 브라이트가 악마숭배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법 뼈아픈 일격이 되리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넬런 백작은 아주 조그마한 피해조차 입지 않았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는 내가 내놓은 어설픈 책략으로 공략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조심해라. 제2황자는 차기 황제가 될 것이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인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네 무운을 빌지.
아이셀 오스라드
추신. 이 편지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네 재량에 맡기도록 하지. 좋을 대로 처리하도록.」
"편지는 잘 봤어요."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유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바로 편지를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치이익
일렁거리며 빛을 발하던 촛불에 닿은 편지는 곧바로 불이 옮겨붙는 즉시 새까만 잿가루가 되어 파스스 흩어졌고, 이것으로 아이셀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알아낼 방법은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유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모든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이 편지가 남아있다면 아이셀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기에, 편지를 파기한 내 행동에 감사를 표한 것이리라.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유마의 감사 인사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 다음, 나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조심하라는 경고로 끝난 아이셀의 편지를 떠올리니, 새삼스럽게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해야 하는 적은 정체도 불명확하며, 어디까지 그 마수가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만만치 않은 후원자까지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다.
'뭐 이제야 첫발을 내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아직 그 윤곽조차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목적지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아르멜 선배. 대체 언제까지 이야기를 엿듣을 생각인 거죠?"
하지만 그 전에, 이야기를 엿듣던 불청객부터 처리하자.
"흠흠, 루크 그러니까 내가 그러지 말자고…."
내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히자,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현장에서 적발된 꼴이 되어버린 아르멜은 어색한 웃음으로 내 시선을 피하며, 루크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뭐, 됐어요. 아르멜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으니까요."
죄 없는 루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아르멜의 한심한 변명을 끊으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상대하기 귀찮은 선배님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장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르멜 선배는 이적조사관이니까 아는 것도 많으시겠죠?"
"그래, 맞아! 뭐든지 물어봐.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대답해 줄 테니까!"
곧바로 의기양양하여 '엣헴'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어깨를 펴는 아르멜의 모습을 슬쩍 흘겨보면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천사'에 대해서 선배가 아는 사실을 전부 말해주세요."
엘리의 부탁도 있었지만, 라우리파 산에서 겪었던 '천사화'의 비밀에 다가서기 위해서라도 내게는 '천사'와 관련된 정보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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