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휴식, 그리고 선택 (8)
* * *
천사.
그들은 '하늘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답게, 신의 대리인으로서 지상에 강림하여 지상의 종족들에게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이다.
이렇듯, 신에게 직접 힘과 사명을 부여받은 천사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신을 향한 굳건한 신앙심과 경건한 기도를 올림으로써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된 대주교급의 사제조차 따라 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신의 명령에 따라 휘두른다.
먼 과거, 카르실리안의 모든 종족이 연합하여 대륙을 침공한 악마에 맞섰던, '테오토스 전쟁'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카르실리안 연합군이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거대한 악마가 나타나자 천사 셋이 모습을 드러내어, 각각 눈 부신 빛으로 이루어진 검과 철퇴, 창을 휘둘러 카르실리안 연합군을 위협하던 악마를 쫓아내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그들의 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카르실리안 대륙의 종족들을 위기에서 구한 천사들이지만,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관한 기록은 교단에서 천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을 제외하면 무척 드물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기록이 유실되거나 천사의 이름을 내세우며 그릇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이단자들의 준동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기록마저도 금서로 지정되어 교황청 내부의 금서고 깊숙한 곳에 봉인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금서 지정을 피해 살아남은 천사에 관한 기록이라면, 우리 리아트 제국의 건국 대제이신 리아트 1세께서 남긴 회고록이 거의 유일하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악마들의 맹렬한 공세에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자처럼 나타나 병사들을 구하는 천사들을 향한 감탄과 도움을 내려주신 길더스텐 님을 향해 감사하는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테오토스 전쟁이 끝난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것이며, 원본의 기록은 이토록 강력한 힘을 다루는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그들이 조금도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리아트 1세가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하는 내용이다.
"…일단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천사'에 대한 정보야. 어때? 도움이 좀 됐어?"
제법 길었던 아르멜의 설명이 끝나자, 나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엘리는 분명 리나가 라우리파 산을 벗어난 이후로 달라졌다고 했었지.'
일단 천사들이 무표정하고 무감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아르벨 수도원장도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천사들은 저런 무뚝뚝한 언행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아르멜의 설명 역시 이 사실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적어도 엘리가 그런 거짓말까지 지어가며 부탁할 아이는 아니야.'
그렇다고 이것이 순전히 엘리의 착각에 불과한 것인가 하면, 내 직감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코니엘 신부는 분명히 엘리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했었지. 실제로 순례길에서 엘리는 옆에 또래의 친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었고.'
그리고 코니엘 신부가 내게 보냈던 편지와 직접 옆에서 보았던 엘리의 행동도 그런 직감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그러면 리나가 변한 것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뒤라는 말인데…아르멜의 설명 중에서 사람이 천사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었어.'
원래의 리나는 분명 평범한 사람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엘리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평소에 리나를 향해 말을 걸던 엘리의 말투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친구가 '신의 전령'이 되어버리면서 무척이나 딱딱하고 메마른 감정이 담긴 말만을 건네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엘리가 침울해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쿡쿡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던 도중, 문득 뺨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
생각에 잠긴 채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올리니 보이는 것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의 아르멜.
"여전히 고민이 해결된 표정이 아니네.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야? 이번에는 꼭 대답을 들어야겠어."
도망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아르멜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일라에게 물었다.
'…아르멜을 믿고 도움을 구해도 될까?'
어떻게 되었든 에일라가 관계를 억지로라도 끊으면서 지키려 했던 사람이다.
내가 여기서 도움을 청한다면 아르멜 역시 에일라의 일에 엮여들어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위기에 처할 가능성도 있는 상황.
그러니 먼저 에일라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시후의 생각대로 하세요. 하지만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아르멜 선배에게 위기가 닥친다면 선배를 지켜주세요.]
'…알겠어.'
에일라의 조건을 수락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선배의 의지는 알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르멜 선배가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듣겠다면요."
"당연히 들어야지!"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멜.
"좋아요. 아르멜 선배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려드릴게요."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에일라를 향한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흔들림 없이 에일라를 향하는 아르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흔들림 없이 에일라를 지지해 주는 아르멜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에일라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떠올린 탓이었다.
*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르벨 수도원장님."
"아닐세. 오히려 이 보잘 것 없는 늙은이가 길더스텐 님의 이적을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영광으로 여길 일이지."
며칠 후, 아르니크 수도원의 입구.
떠날 준비를 마친 마차를 앞에 두고 나는 아르벨 수도원장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진심인가? 무려 천사님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고작 돌아가는 길에 동행하는 것이라니."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내 요구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는 아르벨 수도원장의 질문에는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신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권능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는 천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있는 귀하디 귀한 기회를 너무나도 어이없게 소모한 것이 아니냐는 의아함.
"쉽게 얻은 재물은 그만큼 쉽게 잃어버리는 것이니, 언젠가 무너질 곳간이 아닌 하늘에 재산을 쌓으라는 말을 실천했을 뿐입니다."
그 의아함에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성전의 구절이로군. 과연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다운 말일세. 자매님의 길에 길더스텐 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빌겠네."
아르벨 수도원장은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수도원장이라는 자리에 오를 만큼 노회한 인물답게, 그는 능숙하게 덕담을 건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끝마쳤다.
─달칵
'후우,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아르벨 수도원장과의 인사를 마치고,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니, 순례길 도중에 겪었던 일들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러자 무거운 한숨과 함께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다.
"…이 카르실리안 대륙에서 천사님을 승객으로 받아본 마부는 저희말고는 없을 겁니다."
'천사'를 모시고 시네티 마을까지 가 달라는 내 요구에 수녀원으로 향하는 마차를 몰 마부들은 모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천사는 날개가 있어 날아다닐 수도 있는데 굳이 마차에 탈 필요가 있는가?
천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눈부시게 흩뿌려지는 빛이 말들을 놀라게 하지는 않는가?
천사는 승객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아니면 화물로 분류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요금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마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내가 기준을 제시하고 나서야,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천사 수송 의뢰'를 받아들였다.
'일단 아르멜의 조언에 따르기는 했는데….'
이런 소동을 감수하면서까지 천사를 굳이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동행케 한 것은 이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와중에 아르멜이 제시한 의견을 따른 결과였다.
"그러면 리나를 리나의 아버지가 있다는 시네티 마을로 데려가 보는 것은 어때?"
아무리 감정이 메말라 버린 천사라 하더라도 가족을 만난다면 뭔가 반응을 보이지 않겠냐는 아르멜의 의견.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형편 좋게 돌아가는 이야기라 가능성은 너무나도 작다고 보았지만.
"좋아요! 리나도 늘 아저씨에게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속상해했으니까 분명 반응을 보여줄 거예요!"
"천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할 권리를 받았다고? 그러면 이참에 그 권리를 써 버려. 천사라는 존재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으면서,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한 지식과 힘을 가지고 태어나 지상으로 내려오는 존재라서 정보나 힘을 요구하면 거절당할 가능성이 커. 물론 이번 경우는 기록으로 내려오는 천사와는 다른 점이 여럿 있지만, 그건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엘리가 그 의견에 격한 찬성을 표하기도 했고, 천사에게 정보나 힘을 요구해보았자 별다른 이득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아르멜의 조언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참 미련하게도 보일 수 있는 짓을 감행했다.
'뭐, 가지고 있어 봐야 먹지도 못할 떡이면 남에게 넘겨서 인심이나 챙기는 것이 낫지.'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언제까지고 대답을 미루면서 천사를 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마차는 뭐길래 저렇게 빛이 나는 겁니까?"
의뢰를 받은 마부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마차에 탄 천사가 몸에서 내뿜는 광휘는 마차의 창문을 가려놓는다고 숨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나, 중간에 쉬어가는 마을이나 수도원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알 수 없는 광휘와 신성함을 뿜어내는 마차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진짜로 천사님이 저 마차에 타고 계신단 말입니까?"
처음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했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이 천사와 동행하신다고?"
"차기 성녀는 저분이 확실하겠구먼. 천사가 따라다니는 것부터가 길더스텐 님의 뜻이 에일라 넬런 성녀 후보님께 있다는 말 아니겠나?"
결국 나는 돌아가는 길에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엄청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빨리 도착해라. 제발.'
이 소문이 또 수도까지 흘러 들어가면 또 난리가 벌어지겠구나.
경외가 담긴 시선으로 마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트레스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