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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80화 (80/80)

〈 80화 〉 예언, 그리고 선택

* * *

"이번에도 크게 일을 저질렀더군요. 에일라 자매."

리피샤 수녀원장은 연일 수녀원으로 흘러 들어오는 에일라 넬런의 소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본디 재주가 있는 자매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수녀원을 나설 때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일을 벌이고 돌아오니, 그녀가 벌인 일의 뒷수습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황당함을 넘어 이제는 경의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황제의 개들이 에일라 자매를 노리며 송곳니를 번뜩이고 있는 상황인데, 처리해야 할 일이 더 늘겠군요.'

그러나 언제까지고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리피샤 수녀원장은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서류의 언덕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장미 수도회의 동향에 관한 보고서'

리피샤 수녀원장의 시선이 닿은 서류의 언덕 가장 위에 놓인 서류의 겉봉에 적힌 제목은 급하게 휘갈겨 쓴 탓인지 무척이나 조악한 필체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척이나 긴급한 사안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리피샤 수녀원장이었고, 그녀는 곧바로 서류의 봉인을 뜯어 그 내용을 확인하였다.

"……."

그리고 그 결과, 조금 전 냉정을 되찾으며 가라앉았던 리피샤 수녀원장의 시선은 더더욱 차가운 냉기를 띠게 되었다.

"대체 어디까지 손이 닿은 건지…."

"그야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다. 성가신 것."

─피잉

리피샤 수녀원장의 대처는 재빨랐다.

기도문을 외우는 과정조차 생략한 채,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사출한 빛의 칼날은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맹렬한 기세로 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호오. 역시 나이를 먹었어도 실력은 여전하군. 과연 '새벽의 칼날'인가."

그러나 갑자기 허공에 나타나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던 어둠과 함께 나타난 존재는 리피샤 수녀원장이 날린 빛의 칼날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짓 한 번으로 빛의 칼날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용공(?), 부네. 네 놈이군. 대체 무슨 꿍꿍이지?"

자애로움과 평온함이 깃든 평소의 말투는 집어치우고 적개심이 가득한 말투로 상대의 이름을 언급하는 리피샤 수녀원장.

용공, 부네.

말 그대로 본모습으로 용의 신체를 지닌 악마 공작으로,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며 교단의 형제자매들을 학살했던 대악마를 상대하는 것이니 적개심이 가득한 리피샤 수녀원장의 대응은 무척이나 상식적인 것이었다.

"우선은 진정해라. 새벽의 칼날. 오늘은 딱히 싸움을 벌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부네는 그런 사실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적개심이 가득 담긴 리피샤 수녀원장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자신이 전투를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감히 신의 전당에 더러운 흙발로 쳐들어온 주제에 잘도 혀를 놀리는구나."

그러나 어떤 사제가 카르실리안 대륙 전체의 공적이라 할 수 있는 악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여전히 적대감을 드러내며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는 리피샤 수녀원장을 부네는 입가를 비틀며 조소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것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네놈들의 장기이니."

─번쩍

순간, 섬광이 일었다.

목표로 하는 지점에 강렬한 빛과 함께 폭발을 일으키는 기적, '신성 폭발'.

악마와의 전쟁에서 다수의 악마를 쓸어버리는 일에 자주 사용되는 기적이 부네의 주위를 섬광으로 감싸며, 악마에게 있어 무척이나 치명적인 약점인 '빛'을 폭발시켰다.

"쯧. 멧돼지 같은 년. 앞만 보고 무식하게 돌진하는 것밖에 못하는 것이냐?"

그러나 부네는 불쾌하다는 듯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을 뿐, 조금의 탄 자국이나 상처 입은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록 간악한 네놈들의 손에 목숨을 잃더라도, 신의 뜻을 받들어 네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멸절하는 것이 사제의 책무다."

"고작 사제 하나, 그것도 다 늙어빠진 인간 하나의 힘으로 칼라탄의 남부를 다스리는 공작인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유감이로군. 너무나도 식견이 좁아."

공격 따윈 전혀 통하지 않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였음에도 여전히 기세가 꺾이지 않는 리피샤 수녀원장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부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부네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는 어둠이 리피샤 수녀원장의 주위를 둘러쌌다.

"큭…! 이건!"

급히 방어를 위해 기적을 사용해 빛을 뿜어내는 리피샤 수녀원장이었지만, 부네가 불러낸 어둠은 리피샤 수녀원장의 저항이 무색하게도,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그녀 주위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쪽이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면 나 역시 강압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 뭐, 딱히 심하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도록. 목숨까지 거둬가지는 않을 테니까."

리피샤 수녀원장의 몸이 완전히 어둠에 뒤덮인 것을 확인한 부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딘가로 이어지는 어둠의 문을 만들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드디어 시네티 마을이네요."

마침내 길고도 길었던 순례길의 끝자락에 도달했다는 생각에 내 입에선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하하. 에일라, 피곤하지?"

세이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피곤하냐며 묻는 것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나는 요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에일라 자매님, 천사님을 뵐 기회를 주선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우선은 시네티 마을로 향하는 도중에 방문한 수도원에서의 일.

수도사들은 천사를 데리고 이동하는 중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혀서는 어떻게든 천사님과 만날 기회를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뭐, 그들의 행동이 아예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황실과의 미묘한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신도들의 믿음이 약해지는 등, 키니아 제국에서 점차 교단의 힘이 빠지는 것이 가시화되던 차에 천사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프로파간다 소재가 나타난 셈이 아닌가.

"직접 뵙지 못해도 좋습니다! 천사님이 타고 계신 마차를 살펴볼 수 없겠습니까? 부디 작은 깃털 하나라도…!"

물론 그렇다고 순수한 신학적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천사의 깃털을 주워 연구해보고 싶다며 대뜸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던 수도사도 있었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나는 그런 부탁을 딱히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대부분 받아들였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같은 교단의 사람들에게 점수를 따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즉, 나를 피곤하게 만든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에일라 성녀 후보님! 부디 저희 여관에!"

"무슨 소리야! 네놈 여관은 심심하면 쥐랑 벌레가 기어 나오는 싸구려 여관이잖아! 에일라 성녀 후보님! 저희 여관이야말로 이 마을에서 가장 싸고 시설 좋은…어억!"

숙박하는 마을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가게를 이용해달라며, 저들끼리 머리채를 붙잡으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여관주인들.

"에일라 성녀 후보님! 부디 천사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집에 위독하신 노모가 계십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숙박하는 마을마다 나타나는, 집안에 위독한 환자가 있다며 부디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달라며 애걸하는 사람들.

"하하하! 차기 성녀가 유력한 성녀 후보라면 몸값을 두둑하게 뜯어낼 수 있겠지!"

"하아. 칼린, 처리하세요."

"알겠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지, 성기사가 호위를 맡는 마차를 막아서는 멍청한 도적들까지.

"자, 감다!"

"으아아아악!"

뭐, 그 바보들이야 칼린이 나서자마자 곧바로 도적단 해체식을 진행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하네.'

어떻게든 나나 천사님을 만나 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로 보낸 날들.

도중에 화병이 나서 쓰러지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뭐, 그것도 이젠 끝이야.'

시네티 마을에서 할 일을 마치면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에 루피아 사제를 다시 데리러 온 일행과 함께 비르겐 교국으로 향할 테니, 나를 보겠다며 피곤하게 달려드는 일은 없어지리라.

[보통 그런 생각을 하면 현실은 반대로 벌어지던데 말이죠….]

'…시끄러워.'

재수 없게 불길한 말을 하는 에일라의 말을 일축한 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시네티 마을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마수 습격 사건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유마가 시네티 마을의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것을 주선하는 것과 엘리의 친구, '리나'를 촌장에게 인도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돕는 것.

어느 쪽이 되었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분위기가 살벌한 환영회가 되겠는데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마을 밖까지 나와 우리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시네티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

"수녀원장님?"

수녀원의 업무로 수녀원장실을 찾은 레이첼 수녀는 문을 두드렸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수녀원장의 문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좁은 수녀원 안에서는 다른 자매들의 일과나 위치를 저절로 익히게 되는 법이었으며, 지금은 분명 리피샤 수녀원장이 수녀원장실에서 업무를 보는 시간.

혹여나 다른 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라도, 30분 이상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었던 리피샤 수녀원장의 엄격한 자기관리를 생각하면, 리피샤 수녀원장이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녀원장님? 실례하겠습니다."

다른 일을 처리한 뒤에 다시 방문했음에도 여전히 응답이 없자, 이상함을 느낀 레이첼 수녀는 나중에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한 뒤, 긴장하며 천천히 수녀원장실의 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보인 풍경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토했는지 입가는 완전히 피범벅이 되었고, 토한 피가 작은 웅덩이를 이룬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모습.

"수녀원장님! 정신차리세요!"

그 충격적인 광경에 기겁한 레이첼 수녀는 급히 리피샤 수녀원장을 향해 달려가 정신차리라며 리피샤 수녀원장의 몸을 흔들었다.

"…레이첼 자매."

다행히도 그녀의 행동이 의미가 있었는지, 몽롱한 눈빛을 한 리피샤 수녀원장이 거의 꺼져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일라 자매를 보내서는 안됩니다."

"네? 수녀원장님 그게 무슨…아니, 그보다 치유를!"

영문모를 소리를 하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레이첼 수녀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정신이 몽롱하여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닙니다. 레이첼 자매. 에일라 자매를 이 수녀원 밖으로 보내서는…."

그러나 어디서 난 힘인지 레이첼 수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은 리피샤 수녀원장은 반드시 이 말을 전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녀원장님? 수녀원장님!"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는지, 리피샤 수녀원장은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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