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화 (4/100)

4화

편전에서 나온 결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직책을 받았고, 과거의 일에 대한 위로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 한구석은 숨이 막히듯 답답했다.

‘누가…… 감히 이 한을 헤아린단 말인가.’

결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세자 시절, 이선이 제 아버지를 얼마나 따르고 존경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숱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보내주던 값진 선물들이 서툰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으니까.

그는 분명 혼란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극은 결국 일어났고, 그 일로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러니 어찌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잊을 수 있을까.

그 참상을. 그 비극을.

“…….”

또 다시 옥죄어오는 가슴에 결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을 비웠다.

그저 참고, 또 참아 묵묵히 견디는 것만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결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내디뎠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멀리서 보이는 한 무리의 인영에 결의 눈빛이 서슬을 품기 시작했다.

맞은편의 관복 무리들도 다가오는 결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빛이라곤 횃불과 시린 달빛뿐이거늘.

흐릿한 윤곽마저 그린 듯 선명해지며 결의 주먹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그의 낮은 호흡이 거칠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서로를 향해 가까워질수록 시린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결은 차라리 그들을 못 본 척하며 지나치려 하였다.

그러나 인사조차 않고 떠나려는 결을 붙잡아 세운 건 다름 아닌 영의정, 남준백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뚝 멈춰 선 결을 향해 비릿한 조소가 박히듯 날아왔다.

“너무 장성하여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하였어.”

얇은 입술이 비틀리듯 말려 올라갔다.

“그래도 눈빛은 어릴 때와 똑같구나.”

“…….”

“제 아비를 꼭 닮았군.”

바득, 결의 입에서 살벌하게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낮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돌린 결이 준백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던 얼굴.

저 독사 같은 얼굴을 보니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대감께서도, 여전하십니다.”

하지만 결은 어떠한 감정도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무(無). 한없이 무감한 얼굴로 준백과 그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안심입니다.”

저들 앞에서 단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도록.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변고가 생긴다던데.”

“……뭐?”

“이토록 한결 같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나의 분노를 먹이 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공포로 스스로를 좀먹을 수 있도록.

결은 마치 감정이 없는 도자기 인형처럼 목소리마저 단조롭게 내뱉었다.

“부디 천수를 누리십시오.”

내 손으로 직접 이 악연을 끊을 때까지 말입니다.

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그의 얼굴은 마치 솜씨 좋은 화공의 그림 같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과 소름이 동시에 일게 하였다.

준백만이 유일하게 그 얼굴을 저주 받은 사람 보듯 할 뿐이었다.

그의 불쾌한 기색을 오롯이 마주하던 결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좌찬성, 한정회는 결과 눈이 마주치자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속이 뒤틀렸다. 전보다 더 많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럼.”

잠시 정회를 바라보던 결은 짧은 목례를 끝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러니 몸을 바짝 낮추고 숨을 죽인 채 기다릴 수밖에.

단숨에 적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을 때까지.

***

“으음…….”

몇 번 몸을 뒤척이던 단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흐릿했던 윤곽이 차츰 선명해졌다.

“헉!”

낯선 풍경에 놀라 일어나기도 잠시.

“아…… 맞다. 이제 심 다점이 아니지.”

곧 결의 집임을 깨닫고 집어삼켰던 숨을 폭 내쉬었다.

한양으로 오는 내내 그러더니. 이곳에서도 적응하려면 며칠 또 있어야 하나 보다.

그래도 폭신한 이불에 한숨 푹 자고 나니 찌뿌드드했던 몸이 오랜만에 개운했다.

꼬르르륵…….

“……배고파.”

잊고 있던 배고픔도 염치없게 고개를 들고 말이다.

이 와중에도 눈치 없는 배꼽시계는 꼬박꼬박 울리니, 참으로 난감하였다.

요 며칠 간 볶은 보리 따위만 먹은 탓이었다.

주린 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단이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이 새벽에 어디서 먹을 걸 구할까 싶다만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게 차라리 배고픔을 잊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을 열던 단이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느껴진 것이다.

“뭐지?”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니 문 뒤에 헝겊으로 덮인 작은 소쿠리가 있었다.

슬쩍 천을 들춰본 단이가 작게 입을 벌렸다.

소쿠리 안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약과가 담겨 있던 것이다.

언젠가 조선서 온 손님이 차와 잘 어울린다며 준 덕에 먹어본 적이 있는 간식이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오묘하여 한동안 생각이 났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맛깔스러운 자태에 단이는 꼴깍 군침을 삼켰다.

‘방 앞에 있었다는 건, 나더러 먹으라고 준 것 맞겠지?’요리조리 주위를 살피기도 잠시.

단이는 곧장 소쿠리 앞에 쭈그려 앉아 약과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진한 단맛에 절로 미간이 좁혀질 정도였다.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허겁지겁 정신없이 먹다가 그만 사레까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켁! 콜록!”

가슴까지 팡팡 두드리며 기침을 하던 찰나.

“……콜록.”

빗자루를 든 행랑아범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하하…….

민망하여라.

단이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또 한 번 콜록, 잔기침을 흘렸다.

그래도 행랑아범이 친절히 가져다준 물 덕분에 간신히 사레를 멈출 수 있었다.

“간밤에 먹으라고 놓아둔 것을 이제 보았구나.”

“제게 주신 게 맞았군요. 행여 남의 것을 먹는 걸까 봐 조금 걱정하였는데…….”

“도련님을 따라왔다면 분명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 같았거든.”

행랑아범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이는 고마운 마음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려무나.”

“네, 아범님.”

“응?”

단이가 부른 호칭에 행랑아범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갑자기 왜 웃으시는 거지. 그냥 감사 인사를 드린 것뿐인데…….

영문을 모르고 갸웃거리는 단이에 행랑아범은 낮게 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냥 덕원 할아버지라고 부르려무나.”

자고로 행랑아범이란 행랑살이하는 늙은 남자 하인을 부르는 말이거늘.

‘행랑’이 이름이고 ‘아범’이 호칭인 줄 알았던 단이가 그만 말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조선말을 잘한다 해도 풍습이나 단어는 모르는 게 훨씬 많은 그녀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괜찮다.”

다행히 덕원은 너그럽게 넘어가주었다.

대충 북방 사투리엔 그런 말이 없나 보다, 하는 것 같았다.

‘까딱 말을 잘못했다간 내가 조선 사람이 아니란 걸 금방 들키겠어.’

말조심, 또 말조심해야지.

단이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단이라고 했지?”

“네, 덕원 할아버지.”

“도련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게냐?”

단이는 심 다점에서 도적들과 결의 군대가 접전했던 것을 말해주었다.

그 일로 심 다점이 불에 타서 갈 곳 없는 저를 결이 거두어주었다고 하였다.

물론 자신이 ‘부모를 따라 조선에서 도망쳐온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널 데리고 오셨던 게로구나.”

가만히 듣던 덕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듯 말하는 덕원에 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작 이야기를 하는 자신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건만.

이 짧은 이야기를 듣고 이유를 알았다고?

단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덕원에게 물었다.

“장군, 아니. 나리께서 왜 저를 거두신 것이어요?”

“응?”

“사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요. 전쟁을 다니시다 보면 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을 텐데, 그때마다 전부 거두셨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하인이 부족해서라기엔 이 집에 다른 하인들이 많고요.”

“…….”

“처음엔 제가 다점 주인이라 다동으로 들이시려는 걸까 했는데, 다동은 아주 어린 아이들만 하는 거잖아요. 전 이미 성인이고요.”

너무도 자신 있게 제 생각을 말하는 단이에 덕원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특히나 저 초롱초롱한 눈빛.

‘나는 절대로 다동이 아닐 것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저 눈빛 앞에서 덕원은 차마 답할 수가 없었다.

‘다동……은 아니긴 하다만.’

저리 부정하는 것을 보면 분명 ‘소문’에 대해 아는 것일 테니.

하지만 침묵이 곧 답이라.

묘한 표정과 함께 아무 말도 않는 덕원에, 명랑했던 단이의 얼굴 위로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에이…… 설마. 아니죠?”

“…….”

“저 다동이에요?!”

단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다동이라니.

북방 귀신이 잡아먹거나 살아 있는 노리개처럼 대한다는 다동이라니!

다동은 어린아이들만 하는 게 아니었어?

조선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설마에게 제대로 뒷덜미를 잡혀버린 단이가 아연실색하였다.

“저…… 그럼 이제 죽나요?”

“뭐?”

“나리께선 절 바로 잡아드실까요? 아니면 마구 갖고 노시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죽이시나요? 저 그렇게 재밌는 사람은 아닌데…….”

단이는 망연자실한 나머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말하면 말할수록 끔찍한 상상이 더욱 생생해지는 터라.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며 묻는 그녀에 덕원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단 도련님께선 널…….”

“일단? 일단 갖고 노실 거라고요? 그럼 제가 뭘 해야 나리께서 그나마 좋아하실까요? 흥이라도 잘 돋우면 좀 더 오래 놓고 봐주실까요오? 흐으윽……!”

결국 두려움을 못 이기고 흐느껴버린 그때.

“서결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딸꾹!”

결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외침 뒤로 우렁찬 딸꾹질이 따라 나왔다.

아, 나는 이제 끝났구나…….

“히잉…….”

단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왕방울만 한 눈물을 또르륵 떨어트렸다.

***

제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넓은 사랑방.

그곳엔 결과 덕원, 그리고 단이가 마주보듯 앉아 있었다.

마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 묵직한 침묵 사이.

들리는 건 간간이 단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뿐이었다.

“……훌쩍.”

또 한 번 훌쩍이는 소리에 결이 덕원에게 눈짓을 하였다.

단이가 왜 저러는지 묻는 표정이었다.

‘그건 도련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덕원이 눈빛으로 한 대답에 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온 다동이나 다비들은 으레 대문을 넘기 전부터 저리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니까.

아무리 나이 많은 노인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궐집이 묫자리가 되었다며 통곡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방의 땅에서 살던 여인까지 저렇게 눈물 콧물 다 흘릴 줄은 몰랐지만.

‘뭐, 생긴 걸 보아하니 신묘년이 아니라 을미년이라 해도 믿겠다만.’

붉게 물든 눈두덩이하며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오물거리는 입술 또한 영락없는 아이 같았다.

이런 여인이 어찌 그런 외지에서 혼자 다점을 운영하고 있던 건지.

이쯤 되면 너무 섣부르게 데려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결은 또 한 번 한숨을 삼키며 단이를 말없이 응시하였다.

하지만 한숨을 삼키든 말든, 그 얼굴마저 무표정하다 못해 차갑기 그지없었으니.

이 순간 단이에겐 야차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북방 귀신, 결이었다.

저 곤란해하는 눈빛마저 언제 잡아먹을까 궁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 무엇이 저보다 더 살벌할까.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숨이 막혀 왔고,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온몸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영원할 것 같던 오랜 침묵 끝.

“행랑아범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드디어 결이 입술을 움직였다.

“너를, 내 다비로 삼으려 한다.”

올 것이 왔구나.

단이는 잠시 눈을 질끈 감으며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다동(茶童)과 다비(茶婢)의 차이는 그저 나이일 뿐, 결국 같은 것이라지.

덕원에게 들은 사실을 떠올리니 절망이 한층 짙어졌다.

제 평탄했던 운명이 어쩌다 이리 다사다난해졌을까.

‘아니야, 그래도 벌써 포기하진 말자. 조선 속담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잖아.’

하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은 단이는 주문처럼 외던 속담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두려움을 내비치면 결은 저를 더욱 함부로 대할 것이다.

저런 악랄한 취미를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보며 희열을 느낄 테니까.

오히려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해야 허를 찌를 수 있는 법이다.

한창 왕 노인에게 장사를 배울 때에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지 않았는가.

진상에게 당하는 것은 하수요, 같은 진상으로 대처하는 것은 중수이나.

‘고수는, 진상의 신임을 얻는다!’

원래 까다롭고 어려운 손님일수록 더욱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하는 법.

주어진 운명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 단이는 이 남자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어찌하겠느냐.”

“…….”

“지금이라도 이 집을 떠나겠느냐.”

결은 마지막 아량이라는 듯 단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대개 심하게 겁을 먹은 사람들은 여기서 떠나겠다는 선택을 했지만…….

“아니요.”

단이는 달랐다.

“나리께서 뜻하신 대로 저를 쓰시어요.”

아니, 단이만이 달랐다.

“저는 나리의 다비가 되겠습니다.”

“…….”

“운명은 피할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최선을 다할 기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마치 전장에라도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결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운명.

그 헛되고도 족쇄 같은, 빌어먹을 두 글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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