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5화 (5/100)

5화

“저는 나리의 다비가 되겠습니다.”

“…….”

“운명은 피할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최선을 다할 기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단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거창한 말이지만, 나리께 은혜를 갚고 싶다는 뜻이옵니다.”

운명…… 운명이라.

단이가 내뱉은 그 두 글자에 결의 눈동자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문득 귓가에 환청처럼 늙은이의 목소리가 스쳤다.

‘도련님의 운명이 거기에 있을 겁니다.’

목소리를 따라 악몽처럼 처참했던 ‘그 일’이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히 떠올랐다.

10년도 훨씬 더 된 오래 전 그날.

‘아이고 세상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하던 때였다.

나이는 어려도 집안의 장남이라.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이 식구들을 챙기겠노라, 그리 다짐하던 때였다.

그날도 눈물 자국이 하얗게 붙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더랬다.

사방이 캄캄하여 손을 뻗으니,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장롱 문이 열렸다.

자신이 눈을 뜬 곳은 엉뚱하게도 행랑아범의 방이었다.

왜 내가 이 방에 있는 걸까.

게다가 바닥도 아닌 좁디좁은 장롱에서.

한번 잠에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이 드니, 아무래도 자신이 자는 사이에 누군가 고약한 장난을 친 듯싶었다.

그 순간 아득했던 곡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아이고오, 아이고…….’

‘아이고오, 마니임!’

세상이 떠나가라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에 어린 결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혹 며칠 제대로 드시지 못한 어머니가 쓰러지시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시겠다던 광증이 또 도진 걸까.

어린 결은 어머니, 외치며 헐레벌떡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신도 제대로 신지 않고 달려 나갔다.

‘어머니…….’

차라리 광증이면 좋았을 것을.

쓰러지신 거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살아만 계셨다면 좋았을 것을.

결은 맨발로 흙길을 걸어 몰려든 가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서 씨 가문이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부터 있었다던 연못이었다.

여름이면 잉어가 헤엄치고, 겨울이면 얼음이 하얗고 도톰하게 얼어, 사시사철 어머니가 참 좋아하셨던 연못.

그곳에 어머니가 계셨다.

맑고 투명하던 연못물을 붉디붉게 물들이신 채.

무엇이 그리 서러워 눈도 못 감으시고.

그 주위로 자신의 어린 누이와 남동생들, 그리고 할아버지와 다른 친척 몇이 함께 있었다.

모두 끔찍한 모습으로 그곳에 잠겨 있었다.

결의 새까만 눈동자에 붉은 핏빛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도련님, 도련니임!’

저를 부르는 비명을 끝으로 결은 의식을 잃었다.

그날 뒤로 그는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찰랑거리는 물만 보아도 구역질이 오르고 발작을 일으켰다.

맑고 투명한 물일수록 증상은 더했다.

미음이나 죽이라도 먹일라치면 전부 게워내어, 볶은 곡물이나 과일만 겨우 조금 먹을 뿐이었다.

결은 그렇게 잔혹한 저주 속에서 나날이 생기를 잃어만 갔다.

소식을 듣고 평안도에서 병마절도사로 있던 외숙부 민지청이 내려왔다.

용하다는 의원이며 비싼 약재며 다 써보았지만 조금의 차도도 없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해괴망측한 병에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걸까.

모두가 희망을 내려놓은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묘한 점쟁이가 결을 찾아왔다.

‘이 댁 도련님께서 참으로 깊은 병에 드셨군요.’

허락도 없이 다짜고짜 대문을 넘어온 그는 노파인지 노옹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요상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듯 구는 점쟁이의 태도에 지청은 그를 안으로 들였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병색 짙은 아이를 보며 점쟁이는 쯧쯧 혀를 찼다.

‘이리 속병이 깊이 들었으니 앓아누울 수밖에.’

‘원인이 무엇인가.’

‘비옥한 땅과 뿌리 깊은 나무를 지니셨으나, 더러운 흙이 쏟아져 물길이 막혔습니다. 물은 곧 생명이온데 생명이 깃들지를 못하니, 땅이 가물고 뿌리가 말라 가지가 뻗지를 못하지요.’

‘방도가 있겠는가.’

‘다동이나 다비를 들이십시오. 그래야 도련님이 사십니다.’

점쟁이는 결을 살릴 방법이 차라고 하였다.

심지어 반드시 신묘년에 태어난 사람이 내린 차여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물조차 마시지 못하는 아이에게 차를 먹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점쟁이의 해결책에 지청은 노발대발하였다.

‘못 믿으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보여드립지요.’

점쟁이는 가노들을 죄 모아놓고 주름진 눈으로 쭉 훑어보더니, 웬 늙은 여종 하나를 가리켜 아무 차나 내오도록 지시하였다.

여종은 머뭇거리다 이내 귤피로 차를 진하게 우려 왔다.

연노랑 빛깔의 귤피차가 곧 결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발작을 일으키며 잔을 뒤엎겠지.’

하지만 지청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여종이 내온 차를 결이 거짓말처럼 전부 마신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물을 찾아 헤맨 사람처럼 결은 허겁지겁 찻잔을 비워냈다.

갈증을 이기지 못한 탓이라고 하기엔, 뒤이어 옆에 둔 물에는 눈까지 뒤집으며 거부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내온 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시기까지.

‘반드시 신묘년생이어야 합니다. 도련님의 운명이 거기에 있을 겁니다.’

점쟁이는 저주를 푸는 유일한 주문처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곤 집을 떠났다.

그날부터 결의 곁에는 항상 다동이나 다비가 함께였다.

신기하게도 결은 오로지 신묘년에 태어난 이가 내린 차만 마실 수 있었다.

다른 이의 손을 빌린 차는 마시기 무섭게 전부 게워내곤 하니, 아예 눈앞에서 직접 차를 내리도록 하였다.

나이 지긋한 노파였던 다비는 언제부턴가 어린 다동이 되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차를 내렸다.

“이 정도 각오라면, 나리의 다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 앉은 저 여인.

60년의 굴레를 돌아 신묘년에 태어난 저 여인은, 운명 앞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다비가 되겠노라 하고 있었다.

그 신선한 태도에 결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조금 전 눈물 콧물 다 보이던 모습과는 심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결은 그런 단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물었다.

“나에 대해 떠도는 풍문은 이미 들었을 테지.”

단이는 슬쩍 얼굴을 붉히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 역시 아까의 추태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괜히 겁부터 먹어서 이게 무슨 창피람.’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맞물다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께서 계시던 곳이 저의 다점과 멀지 않아…… 종종 손님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내가 어린아이를 다동으로 들여 죽인다고 말이지.”

결은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한데도, 나의 다비가 되겠다?”

시험하듯 되묻는 말에 단이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혹시 심기를 거슬렸나 싶어 슬쩍 고개를 드니, 생각보다 그의 표정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단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재차 같은 답을 내놓았다.

“예. 저는 나리의 다비가 되겠습니다.”

“어찌하여?”

“나리께선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까요.”

어차피 결이 아니었다면 도적의 손에 죽었을 목숨이었다.

결 덕분에 살아났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것뿐이다.

은혜와 원수는 받은 만큼 되갚으라던 왕 노인의 가르침처럼.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나리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결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아주 조금은 기특하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있던 덕원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니, 내내 목이 조이는 듯했던 긴장이 그제야 옅게 풀어졌다.

“그럼 대강 결정이 난 듯하니, 쇤네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마저 말씀 나누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도련님.”

덕원은 단이를 안심시키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생각했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덕원이 나가고 나니 방 안은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전처럼 살벌한 기운은 없는 터라.

‘일단 신임은 얻은 것 같으니 한시름 놓아도 되나.’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단이의 머릿속에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줄곧 궁금했던 한 가지.

‘만약 내가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를 어떻게 하셨을까.’조금 위험한 질문이긴 하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미리 알아놔야 할 문제였다.

정체가 발각될 경우 벌어질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 더 경각심을 가질 테니까.

“저어……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결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이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일 제가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하셨을 것입니까?”

한순간 공기의 흐름이 이질적으로 변했다.

결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한 탓이었다.

역시 괜한 걸 물은 걸까.

그의 눈빛을 보기 무섭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설마 벌써 눈치채신 건 아니겠지……?’단이는 최대한 겁먹은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결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서늘해진 것 같다면, 단순한 기분 탓일까.

그런데 당장이라도 심문할 것 같았던 결은 의외로 빠른 대답을 내놓았다.

“죽였겠지.”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문제라는 듯.

“살릴 이유가 없으니.”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오싹 훑고 지나갔다.

어쩌면 아주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는 조선의 북방 경계선을 지키며 넘어오는 이방인들을 모두 죽이는 게 일이었으니.

설령 단이가 조선으로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들, 그녀가 있던 땅은 충분히 경계할 만한 위치였다.

조선인. 혹은 이방인.

결에게 있어 사람은 그렇게밖에 분류되지 않으리라.

그가 잔혹한 북방 귀신이라 불리는 게 새삼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답이 되었느냐.”

“예? 아…… 네.”

그러니 살고 싶다면, 가능한 오래도록 이방인임을 들키지 말 것.

그의 검날은 이방인에게 아주 잔인하니.

들키는 순간 저 사내의 손에 죽게 되는 건 예정된 수순인 것이다.

단이는 속으로 다짐, 또 다짐하였다.

“하면…… 앞으로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나리께서 원하실 때마다 차를 내오면 될까요?”

분위기라도 전환하고자 얼른 제가 해야 할 일을 물었다.

다행히 결은 조금 전의 일을 문제 삼지 않고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너는 앞으로 하루에 다섯 번씩, 매일 같은 시간에 차를 내와야 한다.”

오경삼점에 파루가 울리면 첫 번째 차를 우리고, 진초시에 두 번째 차를 우리고, 정오시에 세 번째 차를, 유정시에 네 번째 차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경이 시작되는 해초시에 다섯 번째 차를 우리는 것이다.

칼같이 딱딱 떨어지는 시간대에 단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어떻게 정해진 시간에만 물을 마신담? 시시때때로 갈증이 나는 게 사람 목인데.’심지어 몸을 쓰는 사람이라 더욱 자주 목이 마를 텐데.

참으로 요상한 규칙이었다.

“그럼 나리께서 그 시각에 계시지 않을 때는요?”

“그래도 차는 내리거라. 어차피 너와 내가 떨어져 있는 시간은 거의 없긴 하겠지만.”

그 말인즉, 결이 가는 곳마다 그녀도 따라가야 함을 의미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다비로 지내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님을 뜻했고,

“차는 항상 내가 보는 앞에서, 네 손으로 직접 우려내야 한다.”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이며,

“차를 올릴 땐 네가 먼저 한 모금 마셔 독이 없음을 보이고.”

또한 위험한 데다…….

“그 잔 그대로, 내가 마실 것이다.”

조금, 아찔하게까지 느껴졌다.

“제가 입에 댄 잔을, 나리께서요?”

“차에 독이 없다 하여, 잔에도 독이 없다 장담할 순 없을 테니까.”

입까지 맞춰 물을 마시게 한 사이에 잔 나누는 것이 무어 대수냐 싶다만, 그래도 유난스럽게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저 사람은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자신이 부리는 사람마저 믿지 못해 이리 철저한 규칙을 세우다니.

단이로선 그 이유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안팎으로 결을 해하려는 적이 많으니, 이 정도는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북방 귀신의 다동으로 들어가면 전부 죽어서 나온다는 말도 다 이 때문이라.

이외에도 단이가 지켜야 할 건 많았다.

정해진 시간보다 너무 이르거나 늦어선 안 되고, 결의 허락 없인 누구에게도 차를 내주어선 안 되고, 차가 너무 맑아서도 안 되며, 또 다비로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에 호기심을 갖거나 외부에 발설해서도 안 된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온통 안 되는 것투성이에 단이는 말로 숨통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왕 노인만큼 더 까다로운 사람이 있을까 했더니, 그게 바로 결인가 보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단이는 속으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가 말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하나 고비는 생각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다.

“그럼 이제 차를 내와 보거라.”

“버, 벌써요?”

서늘한 눈초리가 단이의 얼굴에 와 닿았다.

벼린 칼처럼 예리해진 눈매 사이로 바짝 조인 눈동자가 보였다.

“벌써라니.”

바닥에 깔리듯 낮은 목소리가 단이의 숨통까지 짓눌렀다.

“이 집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 그것이거늘.”

결은 서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네가 우려내는 차가 어떤 맛인지를 알아야, 네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알 것 아니겠느냐.”

팽팽해진 목근육과 툭 불거진 목울대가 겁먹은 그녀를 조롱하듯 눈길을 끌었다.

묘하게 퇴폐적이고도 위험해 보이는 모습.

“나의 다비는…….”

마치 당장이라도 눈앞의 먹잇감을 덮쳐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자리니.”

사나운 맹수의 눈빛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