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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6화 (6/100)

6화

곧이어 방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단이는 눈앞에서 일사불란하게 놓이는 물건들을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퍽 비싸 보이는 것들이 즐비하게 놓였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방 안엔 다시 결과 단이만 남게 되었다.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제 차를 우려 보거라.”

결의 말에 단이는 떨리는 눈으로 앞에 놓인 것들을 쭉 살펴보았다.

동그란 모양의 작은 떡차 몇 냥과 물이 든 병, 불이 은근하게 붙은 숯.

그리고 차를 우리는 데 쓰이는 각종 차제구까지.

하나같이 값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진귀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단이에겐 대부분 익숙한 물건들이었지만, 혹여 조선의 다도(茶道)가 따로 있어 제가 실수를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설마…… 실수 한 번 했다고 죽이시진 않겠지.’그렇게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바짝 경직되었다.

‘아니야. 조금 전에 분명 부족한 것을 가르쳐 줄 거라 하셨잖아. 진짜로 죽이실 리가…….’단이는 곁눈질로 결을 힐긋 살폈다.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저분이라면…… 차 한 잔 때문에 사람을 죽일 것도 같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단이는 당장이라도 삐죽거릴 것 같은 아랫입술을 애써 꾹 맞다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단이는 차로에 불을 피워 떡차를 굽기 시작했다.

바싹 말라 향이 짙어진 떡차는 종이에 감싸 두고, 차관을 불 위에 올려 그 안에 물을 부었다.

일순 투명하게 쏟아지는 물에 일순 결이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아, 소……송구하옵니다!”

단이는 지레 겁을 먹고 얼른 일어나 몸으로 물을 가리며 부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겁이 나 가슴이 벌렁벌렁하였다.

차 한번 우리려다 명줄까지 졸아들 지경이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 나서부턴 단이의 손이 더욱 분주해졌다.

차 맷돌처럼 생긴 것이 있었으나 제가 쓰던 것과는 영 다른 모양이라.

어쩔 수 없이 떡차를 직접 손으로 짓이겨 최대한 잘게 부수었다.

그러곤 가루가 된 차를 차부에 넣고 뭉근히 끓인 물을 부었다.

이제부턴 차가 온전히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나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단이는 힐끔 시선을 들어 앞에 앉은 결을 보았다.

결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차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 다점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만져 왔던 차이건만.

저주 걸린 북방 귀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영겁과 같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알맞은 빛깔과 향취로 우러난 차가 찻잔에 담겼다.

가득 채워진 찻잔을 본 결이 단이에게 말했다.

“마셔 보거라.”

“예, 나리.”

단이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씁쓸하면서도 조금은 떫은맛이 혀끝을 지나더니, 뒤이어 은은한 단맛이 이뿌리에 남아 떫었던 혀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제껏 맛보았던 어떤 차보다 신이하고 깊은 맛이었다.

좋은 차를 망치지 않았다는 생각에 단이는 속으로 깊이 안도하였다.

“많이 부족하지만, 성심껏 우렸습니다.”

마침내 단이의 입술을 거친 차가 결의 앞에 놓였다.

결은 무감한 눈으로 차를 내려다보다 이내 탁상 위에 있던 향료를 조금 들어 찻잔에 넣었다.

‘혹시 다향이 부족한가.’단이는 긴장 어린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결이 얇은 찻숟가락으로 향료 섞인 차를 젓기 시작했다.

시선은 단이에게 고정한 채.

스이이, 스이이…….

찻잔 속을 가르는 소리가 그의 손끝에서 천천히 울려 퍼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뜨거운 차를 몇 번이고 가로지르며.

단이는 묘한 감정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맞잡았다.

휘저어지는 게 차가 아니라 꼭 제 몸이 된 느낌이었다.

결은 단이를 보는 것도, 차를 휘젓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별다른 말을 꺼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지독하리만치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사라지는 일 또한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하는 것들을 각인시키듯 보여줄 뿐이었다.

단이에겐 이 시간이 마치 영원 같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서서히 몸을 타고 올라와 목을 감싸 죄어오는 것 같았다.

뿌리칠 수도 없게, 벗어날 수도 없게, 그렇게 아주 서서히.

결은 느릿하게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그의 입술에 가까워질수록, 저릿하고도 오싹한 기운이 온몸으로 더 선명하게 퍼져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만 숨이 차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단이는 저도 모르게 입술 속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떨리는 숨이 제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드디어 찻잔에 결의 선 고운 입술이 닿았다.

이 와중에도 그의 검은색 눈동자는 단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차는 오래 저어진 만큼 다 식어 버렸을까.

아니면 그 뜨겁고도 매혹적인 향을 오래 놔두기 싫었던 걸까.

결은 한 번 댄 입술을 떼지 않고 찻잔을 비웠다.

물론 이 과정 역시 무척이나 느린 시간 속에 이어졌다.

마침내 찻잔 속 차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전부 결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애초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것처럼.

탁.

결이 찻잔을 내려놓자 늘어지듯 흘러가던 시간이 비로소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숨을 참다시피 하던 단이의 입에서도 그제야 빠르게 공기가 드나들었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겨 있다가 겨우 수면 위로 떠오른 기분이었다.

눈에 띄게 안도가 비치는 단이의 얼굴을 보며 결이 입술을 움직였다.

“이만 들고 나가 보거라.”

차 우리는 솜씨가 어땠는지, 차 맛이 어땠는지에 대한 감상은 한마디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렸다간 다시 저 날카로운 눈동자에 갇힐 것만 같았다.

단이는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빠르게 다구들을 정리한 뒤, 공손히 허리를 숙이곤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

문을 닫고 나오기 무섭게 단이의 다리가 허물어졌다.

긴장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만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신이 팔에 힘을 남겨 놓아, 비싼 다구들이 바닥 위로 나뒹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어느새 밝게 떠오른 태양이 눈이 부시도록 지천을 밝히고 있었다.

무사히, 첫 행다를 마쳤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쉰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결이 차를 마시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찻잔을 휘젓던 손, 차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삼켜 버리던 붉은 입술.

그리고 심연 같은 눈빛으로 저를 잠식시킬 듯했던 눈동자.

‘삼켜질 거야……. 난 결국 저 사람에게 삼켜질 거야.’부정할 수 없는 생각 하나가 무의식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단이는, 그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

방으로 돌아온 단이는 하릴없이 앉아만 있었다.

널찍한 방에 혼자 덩그러니 있자니, 자꾸만 잡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차는 나리 입맛에 맞았던 걸까.’행여 맞지 않은 것을 억지로 다 마신 건 아닐지, 뒤늦게 마음이 변하여서 내치시려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이제 와 나가라 한들 갈 곳조차 없지 않은가.

거기에 다비로서의 생활과 한양에서의 생활, 그리고…….

‘조선인으로서의 생활.’과연 정체를 끝까지 들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상대는 십수 년간 이방인을 상대해 온 북방 귀신, 서결이었으니.

증거가 없다 한들 본능처럼 정체를 알아차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한양 어딘가에 심 다점을 아는 이도 분명 있을 터.

재수 없으면 그들에게서 말이 새어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은 내쳐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련만.’폭 한숨을 내쉰 단이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을 때였다.

“단이야.”

문득 밖에서 덕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덕원 할아버지.”

문을 열고 나가니, 덕원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도련님께서 잠시 보자 하시는구나.”

“아, 네!”

잠시간 풀어졌던 몸이 다시 바짝 긴장되었다.

단이는 얼른 신을 꿰어 신고 덕원을 따라나섰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지?’역시 차가 별로였나?

아니면 벌써 교육?

설마 정말로 내치시려는 건…….

결의 방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뒤따라왔다.

“도련님, 단이를 데려왔습니다.”

“들이거라.”

방문이 열리자 결의 대각선 옆 자리에 낯선 여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불혹쯤이나 되었을까.

깡마른 몸에 단이와 비슷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인은 첫인상부터 무척이나 매서운 이였다.

엄동설한에 불어 닥치는 설풍이 꼭 이와 같으리라.

날카로운 눈매와 예리한 눈동자가 저를 샅샅이 훑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단이는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이 아이네.”

결의 짧은 한마디에 여인이 눈가를 가늘게 여미며 더욱 자세히 단이를 보았다.

이미 대강의 소개는 들은 모양인지 그녀는 가타부타 묻는 말이 없었다.

결은 곧 단이에게도 여인을 소개했다.

“앞으로 여기 있는 보선 어멈이 달포 동안 네게 가르침을 줄 것이다. 보선 어멈에게 배우는 동안은 하루에 한 번씩만 차를 올리면 된다.”

“다, 단이라고 하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어요.”

단이는 보선 어멈과 눈을 마주쳤다가 어깨를 흠칫하며 얼른 인사를 드렸다.

마주치는 것조차 무서울 만큼 그녀의 눈빛이 서릿발 같았던 까닭이다.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자잘하게 난 주름들은 보선 어멈을 더욱 깐깐한 여인처럼 보이게 했다.

‘저분이 내 다도 스승…….’태산을 오르려니 암벽이 먼저 가로막는 꼴이구나…….

어째 결에게 차를 올리는 것보다 보선 어멈에게 차를 배우는 것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왕 노인 저리 가랄 만큼 엄해 보이는 그녀의 다부진 표정이 단이의 혹독한 미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이후부터는 정식으로 나의 다비가 되어 일정한 대가를 받고 일하게 될 것이다. 네게는 섭섭지 않을 금액일 것이다.”

“…….”

“또한, 정식 다비가 되고 나서부턴 어디든 반드시 나와 동행해야 할 것이다.”

섭섭지 않은 대가와 북방 귀신과의 동행.

달콤한 것과 쓰디쓴 것을 동시에 삼킨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보선 어멈에게 잘 배워두는 게 좋을 것이다.”

“예. 최선을 다해 배우겠습니다.”

“인사는 이쯤하면 된 것 같으니, 보선 어멈은 이만 나가 보게.”

“예, 도련님.”

그때까지 말없이 단이만 쳐다보던 보선 어멈은 결에게 인사를 올리곤 밖으로 나갔다.

저는 안 보내주시어요……?

단이는 나가는 보선 어멈의 뒤꽁무니만 애처롭게 쳐다보다 입술을 꾹 맞다물며 결을 보았다.

어찌 저만 따로 남겨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받거라.”

그런데 결이 내민 것은 뜻밖이었다.

홍색 술이 달린 화려한 무늬의 은 막대였는데, 겉보기엔 꼭 검집같이 보였다.

뚜껑을 열자 과연 기다란 날이 드러났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살짝만 스쳐도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신이한 모양의 소검에 단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은장도다.”

“어찌 이것을 제게…….”

결은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을 은장도에 두며 말했다.

“나의 다비가 되는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평온치는 않을 것이다.”

말이 주는 무게가 단이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결은 그저 평온치 않다고 말했지만, 단이는 그 안에 든 속뜻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이 집에서 일하는 동안 너의 눈은 누구보다 빨라야 하고, 너의 귀는 누구보다 열려 있어야 할 것이나.”

잠시 틈을 놓은 결이 마지막 말을 이어 붙였다.

“너의 입은, 누구보다 무거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주 당연한, 어쩌면 아주 막중한 책임이었다.

늘 생사에 기로에 서 있는 결인 만큼, 그의 곁에 항상 함께하여야 하는 다비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단이는 저도 모르게 숨조차 조심스럽게 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단도는 무엇에 쓰는 용도입니까?”

“너는 무엇에 쓰겠느냐.”

시험일까. 혹은 그저 하문일까.

단이는 제 앞에 놓인 은장도를 손에 쥐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짙은 차향이 묵직하게 폐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좋든 싫든 알게 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중엔 절대로 밖에 새어 나가선 안 될 중요한 것도 있으리라.

그걸 아는 적들은 감당하기 힘든 결 대신 비교적 쉬운 그녀를 노릴 터.

하지만 단이의 가슴속엔 이상한 믿음 하나가 있었다.

무슨 상황에서든, 결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어쩌면 심 다점에서의 일들이 그녀에게 무한한 신뢰를 심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 정도 각오와 믿음 없이 무슨 일을 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북방 귀신의 다비가 되는 일인데.

단이는 은장도를 쥔 손에 꾹 힘을 준 채 결을 마주보았다.

“혹여, 위협하는 적을 만나게 된다면…….”

나리께서 구해주셨을 때부터 이 목숨은 나리의 것이 되었으므로.

“저는 목숨을 바쳐, 나리를 지킬 것이어요.”

저는 이제 나리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니.

“…….”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결의 눈동자가 그 말에 처음으로 옅은 동요를 보였다.

차칼로 도적 하나 상대하지 못하던 단이의 참으로 위풍당당한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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