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단이가 결의 집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되었다.
그 사이 단이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결의 집에서 생활하는 건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생 누릴 호사를 이 짧은 새에 전부 누리는 기분이었다.
좋은 옷과 임금님 수랏상 부럽지 않은 맛있는 밥, 누군가 몰래 침입하거나 위협하지 않는 안전.
치원에서 홀로 심 다점을 운영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락한 생활이었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차를, 그것도 심 다점에서조차 쉬이 구경할 수 없던 최상품의 차를 마음껏 다룰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보선 어멈에게 새로 배우는 다도는 왕 노인에게 주먹구구식으로 배웠던 것과 달리 체계적이었다.
비록 매일같이 혼나긴 했지만, 엄한 꾸중도 배움의 즐거움을 꺾진 못했다.
‘오늘도 차 드시고 바로 나가셨나 보네.’
이른 아침을 먹고 다신당으로 향하던 단이는 텅 빈 사랑채 섬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단이가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
결은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을 보는 건 기껏해야 하루에 한 번 차를 올릴 때와 목욕 시중을 도울 때뿐.
그마저도 차 우리는 시간은 짧고 정방에는 다른 사람도 많은 터라, 첫날처럼 곤란을 겪을 일은 거의 없었다.
묘하게, 그날 이후로 결이 자신을 피하는 듯도 했고.
없는 사람인 척 무시를 한다거나 눈칫밥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차관……. 그래, 꼭 차관을 보는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필요할 땐 곁에 두지만 필요하지 않을 땐 쳐다도 보지 않는.
그토록 싫어하는 물이 가득 담긴 차관처럼.
“……휴.”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아 어깨에 힘이 빠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초에 이 집에 올 때부터 자신의 쓰임은 차 우리는 것이 전부였던 것을.
‘그래도 대충하기는 정말 싫은걸.’
그럼에도 사람 성정이란 게 쉬이 바뀌지 않는 터라.
남들은 어떻게든 북방 귀신의 눈에 들지 않으려 피해 다니기 일쑤라던데, 목숨을 구해준 은혜와 뭐든 열심히 하려는 책임감이 단이를 체념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두려움조차 뛰어넘을 만큼.
가진 능력으로나마 그 은혜를 갚고 싶어서.
그리고 제 손으로 우린 차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단이는 오늘도 결에게 맞는 차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특히 남들에 비해 후각이 예민한 그녀는 요즘 향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차의 특성상 자주 마실수록 몸속의 기름이 빠지고 진이 쇠하게 되는 터라.
최대한 독한 성정을 죽이면서도 향은 극대화하여 결이 마시기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단이는 요즘 결의 반응을 읽는 법도 하나씩 터득해가는 중이었다.
오래전 왕 노인이 이르길, 조선 사람에게 차란 기호음료가 아니라 약용이라는 인식이 강하더랬다.
약맛을 두고 좋다 싫다 하는 사람은 없으니, 어쩌면 그 때문에 결이 차 맛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서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의 호불호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가 입에 맞으면 세 잔을 마시는 속도가 전보다 빠르다든지, 물 내음이 덜 지워졌거나 맛이 너무 떫으면 향료를 추가하거나 마지막 잔을 조금 남긴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 미세한 차이를 눈여겨보며 단이는 결의 입맛에 맞는 차를 하나둘씩 알아갔다.
정작 이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괜찮아. 내 노력, 나만 알면 됐지.’
단이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만 여전히 익혀야 할 것은 산더미라.
매일 늦은 밤까지 배운 것을 되짚어봐야 하는 게 조금 힘들 뿐이었다.
“감국과 창이자는 풍에 좋고, 계피와 회향은 추울 때, 백단향과 오매는 더울 때, 황련은 열날 때고……. 아, 용뇌도 열날 때구나.”
오늘도 단이는 늦은 밤까지 보선 어멈에게 배운 것들을 홀로 다신당에서 익히고 있었다.
손에는 낮 동안 배운 것을 적어둔 종이를 든 채, 각종 차제구와 차의 종류를 손으로 짚어가며 기록한 글과 맞추어보곤 했다.
손바닥만 한 자투리 종이에 어찌나 빼곡하게 적어 놓았는지, 개중엔 먹이 번져 서로 엉겨버린 글씨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깨알 같은 기록을 외우길 한참.
“…….”
문득 귀를 건드리는 낯선 소리에 단이가 종이에서 눈을 떼었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걸까.
가뜩이나 어둠 속에서 작은 호롱불에만 의지해 으스스한데, 이상한 소리까지 들리니 오싹함이 더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단이는 떡차가 든 함과 차제구들을 정리하고 다신당을 나섰다.
그런데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때.
“어……?”
곳곳을 지키고 서 있던 장정 몇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주춤거린 순간, 막 또 한 명의 장정을 해친 검은 복면의 사내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헉!”
사내와 눈이 마주친 단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마치 얼음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밀려드는 건 오로지 끝없는 공포뿐.
축 늘어진 장정의 멱살을 밀치듯 놓은 사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피 묻은 단도가 흐린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다가오는 걸음의 목적은 분명했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두려움이 단이의 목을 더 죄어왔다.
“사, 살려주시어요……. 제발…….”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에도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사내가 우악스럽게 단이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꺄악!”
반사적으로 지른 비명이 밤하늘로 흩어졌다.
사내는 매섭게 단이를 노려보며 단도를 높이 들어올렸다.
날카로운 검이 쐐액 공중을 가르며 내려오던 순간.
휘익, 탁!
빠르게 날아온 무언가로 인해 사내가 들고 있던 단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인영이 보였다.
바로 결이었다.
“나, 나리…….”
단이는 울먹이며 활을 들고 있는 결을 보았다.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그의 어깨가 낮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의 옷 곳곳에 튄 핏자국과 등 뒤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화살은 그가 이곳까지 오며 처리한 자객의 수를 방증했다.
결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도 않은지, 흔들림 하나 없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결의 등장에 당황한 건 반대로 사내였다.
“움직이면 이 계집은 죽는다!”
“읏!”
뒤에서 단이를 결박한 사내가 또 다른 단도를 꺼내 그녀의 목에 대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사람 하나를 해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시린 쇠붙이의 냉기가 금방이라도 목을 파고들 것처럼 아찔하게 느껴졌다.
“사, 살려주시어요. 살려주시어요, 나리…….”
단이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결을 향해 애원했다.
그러나 그 간절함이 결에겐 차마 닿지 못한 것일까.
까딱 잘못했다간 단이가 위태로워질 일촉즉발의 순간이건만, 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등 뒤에서 하나 남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멈춰!”
사내가 단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경고했다.
그러나 그깟 협박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결은 활시위를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날아들 것만 같은 화살에 사내도 두려웠던 모양이다.
“읏……!”
결국 단도의 날이 단이의 목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었다.
소름끼치는 통증과 함께 날을 타고 흐른 피가 옷 위로 붉게 스며들었다.
“흐윽…….”
선연하게 살갗을 파고드는 아픔에 단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럼에도 결은 동요하기는커녕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계집을 정녕 죽일 셈이냐!”
협박하는 사내의 말에 결의 입에서 처음으로 낮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곧 서늘한 음성이 주변 공기를 전부 얼렸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북풍한설보다 더 차가운 눈동자가 단이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가 나의 약점이 될 거라 생각했느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세차게 떨리는 눈으로 결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일말의 동정도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일 거면 빨리 죽여라.”
“…….”
“아깝긴 하지만, 원한다면 네 저승길 동무로 내어줄 테니.”
결의 흔들림 없는 모습에 사내가 잘못된 패임을 깨닫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은 단이는 다물지 못한 턱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결의 심리전이라는 걸.
공포에 물든 단이의 머릿속엔 결이 저를 버리려 한다는 생각만 점점 커졌다.
“아니면, 내가 함께 죽여주랴.”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던 마지막 희망 줄이 툭 끊어진 순간이었다.
아무리 한낱 다비에 불과한들, 어찌 사람을 두고 저리 말할 수 있다던가.
심 다점에서의 은혜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나 보다.
이리도 쉽게 죽이려는 걸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이 온몸을 뒤덮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순 없어.’절망이 극에 달해 체념이 된 걸까.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겠단 생각에 단이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결이 저를 안전하게 구해주리란 믿음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였다.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던 중, 일순 품속에서 미세하게 절그럭거리는 느낌이 났다.
‘은장도!’결에게 받은 뒤로 매일같이 장신구처럼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것이었다.
‘너는 너 자신이나 지키거라. 나는 내가 지킬 터이니.’ 냉랭했던 그때의 목소리가 단이의 마음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그래. 저분은 이런 상황이 올 줄 이미 알고 계셨던 거다.
그때가 되면 언제든 날 버릴 것이니, 내 몸은 나 스스로 지키라고 이걸 주신 거다.
턱에 꾹 힘을 준 단이는 사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히 움직여 은장도를 손에 꼭 쥐었다.
‘할 수 있어.’바르르 떨리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단이는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았다.
성공하면 살겠지만, 실패하면 즉시 죽게 될 터.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잘 노려야 한다.
“젠장……!”
절벽에 몰린 사내가 혼란에 빠진 듯 흔들리는 게 보였다.
‘지금!’
단이는 빠르게 은장도를 빼내어 있는 힘껏 사내의 허벅지를 찔렀다.
“아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을 뒤튼 사내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려했다.
그 순간 쏜살처럼 달려온 결이 재빨리 단이를 품에 안아 몸을 돌렸다.
촤악!
사내가 휘두른 날붙이가 결의 어깨 뒤를 사납게 헤집었다.
일순 숨이 막힐 만큼 엄청난 고통이 결을 덮쳐 왔다.
자신이 몸으로 막지 않았다면, 단이의 몸에 고스란히 새겨졌을 아픔이었다.
한 품에 다 들어올 만큼 작고도 여린 이 아이에게.
“…….”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킨 결은 단이가 안전할 수 있도록 멀리 밀쳐냈다.
그러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빼앗아 순식간에 사내의 팔과 두 다리를 베어버렸다.
“으아악!”
아예 도망칠 수조차 없게끔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극에 달한 고통으로 인해서인지 사내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피는 많이 흘렸을지언정 죽지 않을 만큼만 베었으니, 추후 심문하는 데엔 문제가 없으리라.
“이놈은 광에 데려가 묶어 두고, 진위에게 기별하여 속히 오게 하라.”
“예!”
뒷수습을 마치고 온 장정들이 신속하게 사내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자객을 데리고 멀어지는 이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결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단이는 목 옆쪽을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손 틈새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옷까지 붉게 적시는 게 눈에 보였다.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떠는 어깨에 결의 눈동자가 더욱 어두워졌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딘 그가 단이의 앞에 섰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하였다.”
“…….”
“가만히 있었으면 내 알아서 너를 구했을 것을.”
하나 따스한 말 한마디 할 줄을 몰라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기만 했다.
어리석게도.
힘겹게 올라온 애처로운 눈길이 결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스스로…… 살아남으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며칠간 제 속을 헤집어놓던 그 눈이 지금은 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조차 마음껏 드러내지 못해 울음과 함께 애써 꾹꾹 눌러 담으며.
분명 자백을 받아낼 자객도 생포하였고, 이 정도면 그리 피해가 큰 것도 아닌데.
저 눈을 보니 이상하게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뒤엉켜 바닥으로 침전한다.
꼭, 훗날 후회할 일을 남길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