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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12화 (12/100)

12화

눈물에 젖어든 단이의 눈동자가 결에게 향했다.

“나리 곁에 있으려면…… 앞으로 이런 일을 계속 각오해야 합니까?”

그녀의 질문은 어떠한 힐난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결은 동요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이제라도 그만두고 싶은 것이냐.”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단이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리께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살아남고자 함입니다.”

그것이 더욱 결의 마음을 할퀴었다.

“이 또한 제 운명이라면…… 앞으로 나리께 약점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상황에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저 여인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 무모한 책임감이 너무도 무거워서.

내비친 원망마저 바스러질 듯 연약해서.

그 연약함이, 제 속을 더 깊이 찔러서.

“……의원을 불러줄 테니 가서 치료를 받거라.”

결은 더 이상 단이를 마주하지 못하고 먼저 발길을 돌려버렸다.

냉정하게 돌아선 발에 단이의 얼굴이 더욱 허망함으로 물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괜찮으냐는 걱정 한마디 없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그는 그렇게 등을 돌려버렸다.

“흐흑, 흑……!”

그 모습이 서운하고도 서러워, 단이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저분에게 대체 뭘 기대한 걸까.

뭘 기대했기에 이리도 마음이 아프고, 뭘 바랐기에 이리도 서운한 걸까.

대체 무슨 마음이기에, 그럼에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희뿌옇게 변한 시야 너머 붉은 피로 물든 결의 등이 흐릿하게 번져갔다.

***

“아…….”

상처에 짓이긴 약초를 얹자 통증이 더욱 선연해졌다.

단이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아픔을 참으며 치료를 받았다.

의원은 단이의 목에 광목천을 돌돌 두른 뒤 매듭을 지어주었다.

“다 되었습니다. 당분간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의원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을 배웅한 덕원이 다시 단이에게 돌아왔다.

많이 놀랐던 모양인지 단이는 어깨가 축 처진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괜찮은 게냐?”

덕원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단이의 커다란 눈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저런 얼굴이 될꼬.

덕원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초점 흐린 눈으로 덕원을 보듯, 허공을 보듯 하던 단이가 입을 열었다.

“나리께서…… 저를 저승길 동무로 내어주겠다 하시었어요.”

말을 꺼낸 목소리는 모든 것을 잃은 듯 허무하기만 했다.

“죽일 거면 빨리 죽이라면서, 저는 나리의 약점이 되지 않는다면서…….”

아니면, 나리의 손으로 함께 죽여주겠다면서.

뒷말은 차마 설움이 북받쳐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단이는 입술을 꾹 맞다문 채 바닥만 쳐다보았다.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까지 간 건 사실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드물지만 심 다점에 있을 적에도 겪어본 적 있는 일이었으니까.

단이가 이토록 상심한 것은 결 때문이었다.

그녀를 너무도 쉽게 버리려 했던 그의 모습 때문에.

알고 있었다. 결에게 자신은 그저 들인 지 얼마 안 된, 수많은 아랫사람 중 하나일 뿐임을.

다비로서 자질이 되지 않으면 당장 내쳐질 수도 있고, 저보다 더 뛰어난 다비가 이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음을.

조선인이 아니라는 게 발각된다면 정말 그의 손에 죽을 수도 있겠지.

천한 신분에 출신도 불분명한 이를 어찌 아끼겠는가.

겨우, 다비인 것을.

‘아는데, 정말 다 아는데도…….’이상하게 서러운 마음이 풀리질 않는다.

언제든지 쉽게 버려질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

“제가 죽었다 한들…… 나리께선 아무렇지도 않으셨겠지요.”

어쩌면 그동안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겉보기엔 냉철하게 보여도 결은 어떤 상황에서든 제 사람들을 지킬 것이라고.

내가 그의 사람일 거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단이는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은 누구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북방 귀신이라는 게 다시금 실감이 났다.

“단이야.”

잔뜩 심란해하는 단이를 덕원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너무 원망치 말거라. 워낙 이런 일을 숱하게 겪으신 까닭이야.”

“…….”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으셨거든.”

덕원은 자세한 내막까진 말해주지 않았지만, 착잡하게 가라앉은 표정에서 과거에 피치 못할 일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도련님께서 너를 버리시려 했던 건 절대 아니었을 게다.”

“하지만…… 분명 저를 죽이라 하시었어요.”

“도련님께는 그게 너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던 게야.”

“지키기 위한 방법이요?”

“그래. 때론 지키고자 할수록, 더 위험해지는 것들이 있는 법이거든.”

지키고자 할수록 더 위험해진다니.

위험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면 당연히 안전해지는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나 덕원은 더 이상의 말은 아끼고 그만 쉬라며 방을 나갔다.

‘지키고자 할수록…… 위험해진다고.’혼자 남겨진 단이는 덕원이 해준 말을 곱씹어 보았다.

확실히 결이 아무 동요도 보이지 않으니 자신을 인질로 삼았던 사내가 당황하긴 했었다.

‘하지만 까닥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단이는 여전히 욱신거리는 목의 상처를 느끼며 생각했다.

북방 귀신이라 불릴 만큼 잔혹한 장수이니, 그간 사람 죽는 것도 숱하게 보아왔겠지.

덕원의 말대로 그만큼 많은 사람을 잃었을 테고.

‘어쩌면…… 아주 가까운 사람까지도.’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단이가 고개를 들어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순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이 넓은 집터 그 어느 곳에도, 결의 가족은 없다는 것을.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사람 수에 비해 과하다 싶게 넓었던 집터, 아무도 기거하지 않는데 정성스럽게 쓸고 닦이던 별채들.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으셨거든.’

덕원의 목소리가 그제야 귓가를 맴돌았다.

한 사람이라도 마땅히 있어야 할 결의 가족은 이곳 어디에서도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뒤숭숭해졌다.

서운하고 무서웠던 마음과는 별개로, 잠시나마 결을 원망했던 게 조금 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신을 구해준 건 결이었으니.

목에 둘러놓은 광목천의 까슬까슬한 느낌과 아까의 위험천만했던 상황들, 두려움과 공포, 절망.

그리고 핏빛 속에서 서늘하게 저를 바라보던 결의 얼굴이 차례로 감각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원망과 미안함,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제 속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올 뿐이라.

커다란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었다.

‘어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단이는 지친 몸을 바닥에 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눈가에 아프게 굳어만 갔다.

***

“누가 너희들을 보낸 것이냐. 바른대로 고하라.”

“허억, 헉…….”

진위의 물음에 자객은 거친 숨만 내뱉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은 한발 물러선 채 차가운 시선으로 자객을 응시했다.

복면과 윗옷을 벗겨 훤히 드러난 그의 몸은 이미 무참한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문초하는 동안 알아낸 것이라곤 왼팔에 독특한 문양의 문신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른 자객들의 몸에도 동일하게 발견된 것이었다.

“어찌 할까요, 장군.”

문초 끝에 기진한 자객을 두고 진위가 물었다.

이대로라면 밤이 새도록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게 될 것 같았다.

“재갈을 물려라. 추후에라도 나오는 게 있겠지.”

“예.”

진위가 자객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동안, 결은 자객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검은 먹으로 진하게 새긴 문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둥그런 원 안에 여러 개의 톱니가 칼날처럼 뻗어 있고, 그 가운데 용을 형상화한 듯한 무늬가 자리한 문양이었다.

언뜻 보기엔 흉배의 문양 같기도 하였고, 혹 어느 가문의 문양 같기도 하였다.

분명한 건 이 자객단만의 고유한 표식일 터.

아무래도 저 문양에 대해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 끝에, 남준백과의 연결고리가 있을 테니.’결의 눈동자가 지독하리만치 검게 물들었다.

뱀의 그것과도 같은 준백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이는 듯했다.

‘이제야 제가 돌아온 것이 두려워지셨습니까.’더욱더 두려워하십시오.

그 두려움에 서서히 좀먹혀 발버둥 치십시오.

당신이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그 목을 죄어갈 테니.

문양을 머릿속에 새긴 결의 시야에 문득 자객이 들고 있던 단도가 들어왔다.

저를 협박하며 단이를 상처 입혔던 바로 그 단도였다.

결은 걸음을 옮겨 자객의 단도를 집어 들었다.

날 곳곳에 검붉게 굳은 핏자국이 아까의 참상을 상기시켰다.

더불어 단이의 원망 어린 눈마저도.

“…….”

긴 손가락이 칼자루를 단단히 말아 쥐었다.

낮고도 소름끼치는 발소리가 저벅저벅 자객에게로 향했다.

축 늘어트린 고개에 그의 목 옆선이 훤히 드러났다.

결은 자객의 머리를 잡고 단도를 목에 대었다.

날카로운 단도 끝이 천천히 살갗을 가로질러 긴 상처를 내었다.

딱, 단이의 목에 생긴 상처만큼이었다.

“으읍, 으으윽……!”

생살을 찢는 고통에 자객이 다시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결에게 머리를 잡힌 데다 재갈이 입을 틀어막은 탓에 비명조차 마음껏 지를 수 없었다.

“가소롭게 날 협박하려 하였느냐.”

“끄으…….”

“감히, 그 아이로.”

내내 고요하던 분노가 한순간 끓어올라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당장 놈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으나 훗날을 위해선 참아야 했다.

“장군……?”

“나가지.”

아무렇게나 단도를 내던져버린 결이 먼저 광을 나섰다.

이미 문초도 끝난 데다 웬만해선 이런 일에 직접 나서지 않는 결이었기에, 그의 행동이 의아한 진위였다.

그러나 결 또한 제 마음을 알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찌하여 이리도 화가 나는가.

겨우 자객 따위가 나를 겁박하려 들어서?

아니면 고작 다비 정도로 내가 흔들릴 거라 생각해서?

모르겠다. 이 분노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이의 눈물진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릴 따름이었다.

‘나리께…… 약점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 여린 것이 남긴 마지막 말과 함께.

약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제 약점이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말인지 분명치 않았다.

아무래도 후자의 뜻에 더 가깝겠지.

제 입으로 말한 그대로이니.

“장군, 어깨에 상처가…….”

뒤따라오던 진위가 뒤늦게 결의 상처를 발견했다.

얼핏 보아도 제법 깊어 보이는 상처라.

겨우 자객 하나에 당할 결이 아니기에 진위로선 놀랄 만도 했다.

설마 그만큼 엄청난 수의 자객들이 몰려왔던 걸까.

심각해진 진위가 분에 차오른 목소리로 말하였다.

“전하께서 친히 제수하신 장군께 자객단을 보내다니요. 이는 명백히 불온한 의도이옵니다! 당장 병조에 고하여서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수사하도록 함이…….”

“되었다.”

결은 흥분한 진위의 말을 담담하게 끊어내었다.

“이 정도는 술만 부어도 낫는다.”

“하오나 장군!”

“이만 돌아가라.”

결의 음성이 단호했다.

밤중에 자객들의 습격을 받은 것도 놀랄 일인데, 거기에 상처까지 입었으니 쉬이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진위는 걱정 어린 눈으로 보다가 나지막이 말을 더했다.

“아까 보니 의원을 부르신 듯한데, 치료는 꼭 받으십시오.”

마지막까지 걱정하던 진위를 돌려보낸 후.

결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여연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생사를 오갔거늘. 고작 보름 정도 안온하게 몸을 쉬었다고 이리도 지쳤단 말인가.

발걸음이 무거워 길을 걷는 것조차 편치 않았다.

어쩌면 발이 아니라 마음이 무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멈춘 곳이 단이의 방 근처인 것을 보면.

의원은 이미 돌아갔는지 저 멀리 섬돌 위에는 단이의 작은 신만 놓여 있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가, 아니면 불을 켜둔 채 잠에 든 것인가.

밝은 창호지 너머로는 아무런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애꿎은 잔상만 눈앞에 더욱 선명해졌다.

하얀 목덜미에 새겨졌던 붉은 상처와 물빛 어린 눈망울이 차례로 허공을 스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뜻을 알 수 없는 낯선 감정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걱정인 듯도 하였고, 죄책감인 듯도 하였다.

그러나 결은 끝내 단이에게 괜찮으냐 한마디 물어볼 수 없었다.

검을 맞부딪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 더 어려운 까닭이었다.

언제 죽어 사라질지 모르는 처지에 인연이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런데 왜 저 아이에겐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저와는 달리 너무 작고 여린 탓인가 보다.

작은 상처에도 쉬이 바스라질 것만 같아서.

그런 그녀가, 너무 위험한 제 곁에 있어서.

한참 동안 단이의 방을 바라보던 결은 결국 노란 불빛이 훅 꺼지고 나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눈 바닥에 깊이 새겨진 그의 발걸음이 죄책감처럼 그 자리에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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