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다음날 새벽.
단이는 등청 준비를 마친 결의 앞에서 이전과 같이 차를 내렸다.
짙은 수증기로 인해 상처가 덧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당분간 목욕 시중 일에선 제외가 된 참이었다.
방 안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전날 습격을 받았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목에 두른 천만 아니었어도 단이 역시 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앞에 앉은 결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 여전히 냉랭한 시선.
하여 단이 역시 묵묵히 차만 내릴 수밖에 없었다.
“…….”
하얀 수증기를 따라 시선을 올린 결이 단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날 일로 도망이라도 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이는 꿋꿋이 제시간에 찾아와 여느 때와 같이 차를 우리고 있었다.
원망도, 서운함도 보이지 않는 얼굴빛은 빗장을 걸어 잠근 듯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았다.
내내 바닥만 응시하는 눈빛이 첫날보다는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단이의 얼굴에만 머물러 있던 결의 눈길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목에 둘러진 광목천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천에는 피인지 약초물인지 알 수 없는 붉은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통증이 이는지, 고운 미간이 찡그려지기도 했다.
그 미세한 반응은 고스란히 결의 눈 속에 담겼다.
세 번의 차를 다 마시고 나니, 단이가 평소처럼 다구를 정리해 들곤 꾸벅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끼이익, 탁.
낮게 울린 나뭇결의 소리 끝에 문이 닫혔다.
타박타박 작은 발소리가 사라지자 마침내 결의 눈빛이 검게 물들었다.
수다스럽진 않았어도 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중얼거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심하게 반응을 살피던 단이였다.
그런 아이가 오늘은 한마디의 말도, 한 줌의 시선도 건네지 않은 채 조용히 차만 우리고 나가버렸다.
생기 가득하던 그녀의 눈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왜일까. 이제껏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숱하게 겪어 왔거늘.
이상하게 단이의 상처는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짐이 되기 싫다며 스스로를 지키겠다 말하던 같잖은 용기 때문일까.
아니면 체념하듯 이것 또한 운명이라 말하던 모습 때문일까.
이상하게 저 작은 아이는 자꾸만 제 신경을 옭아매고, 생각할 새도 없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사로잡아야 할 사냥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슨 생각을.’결은 잡생각을 털어내고 이만 밖으로 나갔다.
“이랴!”
준비된 흑마에 오른 그는 박차를 가해 빠르게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어쩌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찰나에 드러난 제 마음으로부터.
***
“아……!”
쨍그랑!
넓적한 찻그릇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단이가 선반 위에 그릇을 놓으려던 순간, 목을 찌르는 통증에 놀라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그 탓에 귀한 차들이 전부 유리 파편과 흙에 섞여 못 쓰게 되고 말았다.
결국 단이는 보선 어멈에게 호되게 혼이 나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차를 다룰 때엔 언제나 긴장하고 집중하라 그리 일렀거늘!”
“소, 송구하옵니다. 상처 때문에 갑자기 손에 힘이 빠져서…….”
“변명하지 말거라. 이곳에서 네 사사로운 사정 따윈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전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보선 어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껏 수많은 다동과 다비를 이곳에서 교육시켜 결에게 보냈지만, 초반에 흔들리는 이들은 결국 도망을 가거나 일을 치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든, 또 무슨 말을 들었든, 행다를 하는 동안에는 그 무엇도 절대로 끼어들어선 안 된다. 설령 사지가 온전치 않더라도 너는 반드시 너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
“그것이, 도련님의 다비 자리다.”
앞으로 이 같은 위험은 숱하게 벌어질 터.
그때마다 매순간 저리 황망해할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것이 나았다.
“감당할 수 없으면 나가거라.”
설풍처럼 냉정한 보선 어멈의 꾸중에도 단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제 잘못을 뉘우칠 뿐이었다.
“앞으로 더 조심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시어요.”
그런 단이를 뜻 모를 시선으로 보던 보선 어멈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늘은 이만해야겠다. 수업을 더 이을 상황이 아닌 것 같구나.”
“송구하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마음껏 보듬어줄 수 없는 위치이기에.
보선 어멈은 착잡한 눈으로 단이의 목을 보며 말했다.
“다른 아이를 불러 청소를 시킬 터이니, 너는 괜히 나서서 손까지 다치지 말고 들어가 쉬거라.”
“네…….”
보선 어멈은 먼저 발길을 돌려 다신당을 나가버렸다.
“하아…….”
단단히 화난 듯한 보선 어멈의 뒷모습에 단이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픈 것도 꾹 참으며 겨우 버텼는데.
한순간 방심을 해서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상황이야 어떠했든 여지없이 제 실수임을 알아 더욱 속이 상했다.
“이 아까운 것을 어쩐담…….”
단이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깨진 그릇을 줍기 시작했다.
보선 어멈은 다른 아이더러 청소를 시키겠다 했지만, 제가 저지른 일을 두고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행여 손까지 다쳐 아예 차를 못 만지게 될까.
단이는 최대한 조심하며 조각을 치우고 바닥을 비질하였다.
지금 쓸어내는 차를 값으로 환산하면 제 한 달치 식량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금을 버리는 기분으로 차를 전부 쓸어냈을 때쯤.
다신당 밖에서 때마침 인기척이 들려왔다.
보선 어멈이 보낸 사람이라 생각한 단이는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진 건 제가 다 치웠으니, 그냥 돌아가셔도…….”
애써 밝게 말하던 목소리 끝이 차츰 흐려졌다.
다신당 앞에 서 있던 이가 낯선 사내인 탓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초피 갖옷과 고급 태사혜, 가슴까지 주렁주렁하게 내려온 수정 갓끈, 거기에 수묵화가 멋스럽게 그려진 합죽선까지.
얼굴 또한 붓으로 그린 듯 화려하게 생긴 사내는 누가 봐도 ‘나 부잣집 도령이오’ 하는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구경하듯 다신당 안을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에 단이는 긴장하며 벌떡 일어났다.
“누, 누구십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던가.
어제도 다신당에 혼자 있다가 화를 당했던 터라, 낯선 사내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난 것이다.
두 손은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 비를 꼭 쥐었다.
그때까지 다신당 안을 휘 둘러보던 사내가 비로소 단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뭇 여인네보다 붉고 선 고운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너로구나.”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사내가 다신당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에 단이가 한 걸음 물러서며 위협하듯 비를 거꾸로 들어 잡았다.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얼른 나가십시오!”
예상치 못한 박대에 놀란 모양인지 사내가 마저 내디디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영문도 모른 채 호통을 들은 게 기분 나쁠 만도 하건만.
사내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이번 다동은 아주 야무진 아이로군.”
그는 곧 단이가 겁을 먹었다는 걸 알고 순순히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러곤 해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듯 친히 두 손을 들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내가 도둑이라도 되는 것 같으냐?”
사내는 경계하는 단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넌지시 건네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쩐지 사람의 경계를 허무는 터라.
바들바들 떨며 비를 쭉 내밀던 단이가 조금이나마 두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뉘일 것 같으냐?”
사내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단이는 혹 결의 가족인가 싶어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 주인과 닮은 구석이라곤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잘생긴 얼굴이려나.
하지만 결이 엄동설한 같이 시리고 날카로운 잘생김이라면, 이 남자는 춘풍화기를 가득 머금은 화려하고도 부드러운 잘생김이었다.
한참이나 사내의 얼굴을 뜯어보던 단이가 우물쭈물하며 답을 내놓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혈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벗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혈연이라기엔 내가 그 녀석보다 훨씬 잘생기지 않았느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자화자찬에 단이는 그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선에선 겸손이 덕이라더니.
겸손이라곤 엿 바꿔 먹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사내의 뻔뻔함에 헛숨까지 나왔다.
하지만 사내가 은근슬쩍 다가오려는 몸짓을 취하자, 단이는 재빨리 다시 비를 높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조곤조곤하게 말하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 말대로 나는 이 집의 주인인 서결과 오랜 벗인, 한성조라 한다.”
나리의 벗이라니.
세상 모든 것을 등진 채 홀로 사시는 듯한 그분께도 벗이 있다던가.
단이는 계속 경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비를 거두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성조를 보았다.
“정말…… 나리의 벗이십니까?”
“믿기지 않는 게로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까칠하고 마음 문 꼭 닫은 놈 옆에, 나처럼 성격 좋고 잘생기고 또 놀기도 잘하는 완벽한 벗이 있다는 게 나 역시 신기하거든.”
성조는 ‘완벽한’이란 말에 힘을 주며 본인 잘난 맛에 심취하였다.
“내가 너무 대인배지. 대인배야, 암.”
아…… 네.
어쩜 듣기에도 민망한 말을 저리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지.
나리 곁에 벗이, 그러니까 ‘저런’ 벗이 있다는 게 더욱 신기했다.
단이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차서 그만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단이가 완전히 경계를 풀었다고 생각했는지, 성조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무튼 반갑다. 네가 새로 들어왔다던 결의 다동이로구나.”
가까이서 본 그는 결만큼이나 큰 키에 아주 곱상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길게 쭉 뻗은 눈매는 자칫 사납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시종일관 버릇처럼 짓고 있는 미소 덕분에 오히려 장난기 다분한 개구쟁이처럼 보였다.
손짓이며 몸짓이며 퍽 가벼워 보이는 것이, 속된 말로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 다동은 이름이 무엇이냐?”
성조는 제 가슴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단이를 놀리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엇보다 다동, 다동 부르는 것이 묘하게 약이 오르는지라.
아까와 달리 새치름한 눈으로 성조를 쳐다본 단이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일부러 목소리를 착 깔며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서결 나리의 새 다비, 단이라고 하옵니다. 조금 전의 결례는 용서해주시어요.”
성조는 허공에 버려진 제 손을 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를 갖추면서도 다동을 다비라 고쳐주는 말씨가 퍽 맹랑하였다.
그는 흥미로운 듯 눈가를 가늘게 여미며 단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옛말에 옷이 날개라더니, 이 아이에겐 옷이 사람 덕을 보았다던가.
깨끗하긴 하나 그저 단조롭기만 한 옷을 입혀 놓았는데도 단아한 미색이 죽기는커녕 한껏 돋보였다.
그만큼 본래 지닌 미색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진위 그 녀석, 미색이라곤 전혀 없다더니.’앳돼 보이긴 해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아리땁게 피어날 여인이었다.
아무래도 북방에 오래 있는 동안 그놈 눈이 어떻게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웬일로 결이 저런 아이를 곁에 두었나.’대개 이제껏 보았던 다비나 다동들이 다부진 편이었기에 단이가 더욱 특별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낯선 사람에게 저리 당차게 나오는 성격도 독특하긴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흥미가 돋는 아이였다.
“그래. 이리 간절히 용서를 구하니, 내 특별히 너의 죄를 사해주마.”
성조는 마치 대단한 자비라도 베풀듯이 말을 이었다.
“무엇이 갖고 싶으냐? 결의 다동이라면 앞으로 나와도 자주 만날 터이니, 내 잘 봐주십사, 하는 뜻으로 너에게 선물을 주마.”
그는 끝까지 단이를 다동이라 부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단이 역시 어리바리하게 휘말릴 성격은 아닌지라.
“제가 나리께 선물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종의 뇌물이라 생각하거라.”
“그렇다면 더더욱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나리께 뇌물을 받을 만한 위치도 아니고, 또 받아서도 안 됩니다.”
“고민도 않고 거절하네, 상처받게.”
일언지하에 거절하니,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푸스스 웃음을 흘리는 성조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는 게 아닌가.
“내가 뉘인 줄 알고.”
뭇 여인보다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훅 다가오니, 놀란 단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으앗……!”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
단이의 허리를 감싼 성조가 그대로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성조의 품에 안기게 된 단이가 숨까지 꾹 참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리 보니, 다비인 것도 같고.”
옅은 다갈색의 눈동자가 깊게 단이의 얼굴을 담았다.
“나에게도 차를 내어주겠느냐.”
“…….”
“차라면, 결보다 내가 그 맛을 더 잘 보아줄 수 있는데.”
숨결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
아찔한 시선이 단이의 두 눈동자를 배회하다 서서히 밑으로 내려간다.
온몸을 간질이는 묘한 분위기에 단이가 그를 밀치려던 그때였다.
“……!”
갑자기 시야가 빠르게 뒤바뀌며 어딘가로 끌려갔다.
손목을 휘어감은 커다란 손에 단이가 시선을 들었다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익숙한 등이 거대한 벽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리…….”
성조의 품에서 단이를 빼낸 결이 그녀를 제 뒤로 감춰버린 것이다.
감히 누구도, 함부로 이 여인을 대할 수 없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