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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14화 (14/100)

14화

“뭐 하는 거지, 여기서.”

결이 단이를 조금 더 제 뒤로 감추며 물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성조가 이내 입가를 길게 늘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은가. 말만 하고 안 부르면 내가 직접 쳐들어오겠다고.”

“겨우 며칠이나 지났다고.”

“나한텐 영겁 같았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시치미를 뗀 성조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결 뒤에 숨겨진 단이를 보았다.

묘한 이채를 품은 눈가가 웃음기를 띠며 가늘게 늘어졌다.

“그래도 걱정은 됐나 보이. 내가 자네 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여기로 달려온 걸 보면 말이야.”

그 말에 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일부러 그의 귀에 들어가게끔 훈련원 군사 하나에게 말을 흘려 놓았으니.

괜히 골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결의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출신이 불분명하고 미색이 뛰어난 다비.

그것도 북방 귀신 결에게 직접 입을 맞추어 물을 마시게 한 배짱 두둑한 여인.

그런 여인을 결이 어찌 대하는지 호기심이 생긴 성조였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 외였다.

‘저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남에 대한 관심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결이, 고작 다비 하나 때문에 일도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타고 나길 풍류가요, 나쁘게 말하면 호색한이라.

여염집 아낙부터 별당의 아낙까지 그의 시선 한 줌에 치마를 부여잡으니, 지키고자 하는 여인이 있다면 감히 성조 앞에 보이지 말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성조가 주인 없는 집으로 향했다는데 어찌 가만히 버티고 있겠는가.

‘당장 저 손목을 잡고 있는 것도 그러하고.’이만하면 오늘은 볼 장 다 본 셈이었다.

성조는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고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주었다.

“진정하게. 내 오늘은 그저 구경만 하러 온 것이니.”

빙긋이 웃는 얼굴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했다.

그때까지 결의 뒤에 숨어 있던 단이가 참고 참다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리, 이제 손은…….”

커다란 손에 잡힌 손목이 얼얼했던 것이다.

그 딴에는 나름 살짝 쥔 것이었으나, 평생 검과 활을 잡아온 악력을 가냘픈 단이의 손목이 감당할 리 없었다.

뒤늦게 알아챈 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네 방으로 가거라.”

그러곤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이에게 말하였다.

“왜? 이제 슬슬 차 마실 시간도 되었을 텐데, 함께 데리고 가서 차나 마시는 게 어떻겠나.”

“아직 견습에 불과한 아이다.”

“원래 견습일수록 자주 해보아야 손에 익는 법일세. 새 다동의 실력도 내 눈으로 좀 보고 싶은데. 응?”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부러 그러는 것인지.

단이도 알아챌 정도로 지금 결의 심기가 좋지 않거늘, 성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방실방실 웃으며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나 단호하기론 만만찮은 결이라.

그는 궐문 앞 수문장처럼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이만 돌아가. 네 무단이탈에 휘말릴 생각 없어.”

“어허이, 무단이탈이라니?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지금 공무 중일세. 새로 온 판관께서 지내시는 곳이 평안한지, 혹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관리하는 것도 다 내 소관이란 말이지.”

“관복까지 벗고?”

“암행이라 치세.”

말이라도 못하면 모를까.

땡땡이 치고 벗의 집에 놀러 왔다는 말을 청산유수 그럴싸하게 포장해 놓으니, 넋 놓고 있다간 유야무야 넘어가기 딱 좋았다.

뻔뻔한 성조를 말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건지, 결국 결이 직접 그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독수리 병아리 낚아채듯 뒷덜미를 잡힌 성조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발끝으로 버텼다.

“어, 어어!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이보게 결, 서결?! 이것 좀 놔주게!”

“남은 말은 육조거리 가서 해라. 실컷 들어줄 테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네 다동 앞에서 이리 채신머리없게 끌려가는 건 좀 그렇잖은가……!”

“너한테도 챙길 처신이 있다는 게 놀랍군.”

결에게 질질 끌려가던 성조가 단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거기, 다동! 내 지금은 이리 가지만 다음번에 꼭 다시 오마! 그땐 내게 차를 내려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꼬오옥……!”

그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애처롭게 퍼졌다.

홀로 다신당에 남은 단이는 폭풍우가 지나간 듯한 기분에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허…… 참.”

심 다점 최연소 단골이었던 일란도 저렇게까지 촐싹거리진 않았는데.

공무라고 말한 걸 보면 그도 조선의 관원이란 뜻일 텐데, 참으로 철없는 양반이다 싶었다.

“나라님이 오신다 해도 서결 나리의 허락 없이는 절대 차를 못 내려드립니다.”

단이는 마지막까지 저를 다동이라 부르던 성조를 향해 소심하게 혀를 날름 내밀었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벗이라는 게 신기하면서도, 혹여 방금 전 일로 결이 괜한 오해를 하진 않을까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이상한 짓을 한 게 절대 아닌데…….”

한량 같은 나리의 희롱 때문에 제 입장만 난처해졌다.

단이는 입술을 비죽이며 원망스럽게 허공을 보았다.

“흥, 차를 내려드리나 봐라. 절대 안 드릴 거야.”

다음이고 뭐고,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

“알겠네, 알겠어! 다시 안 돌아갈 테니 이것만 좀 놓아주게, 응?”

대문 옆 마구간까지 결에게 끌려가던 성조가 사정사정하였다.

어차피 달아난다 한들 곧 제 손에 잡힐 터라.

걸음을 멈춘 결은 마뜩잖은 눈으로 성조를 보다 이내 옷깃을 놓아주었다.

“어후…… 두 번 나댔다간 목이 졸리겠군. 아이고, 주름 다 졌다.”

구겨진 비단옷을 아까워하며 조심조심 편 성조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나한테 그 다동 보이는 게 그리도 아까웠나?”

“뭔 소리야.”

“내가 자네 집 갔다는 소식에 눈썹 휘날리도록 왔지 않은가. 내 아주 섭섭하이.”

“또 쓸데없는 소리.”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리 급하게 날 잡으러 왔는가?”

“정랑께서 널 찾으셨다. 오찬례 시간이 다가오는데 네가 안 보인다 하시더군.”

“오찬례? ……헉! 아이코, 이런.”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조가 과장되게 숨을 집어삼켰다.

기회를 틈타 결의 집에 몰래 쳐들어갈 생각에 중요한 행사를 잊어버린 모양새였다.

다른 관원이었다면 부리나케 뛰어가도 모자랄 상황이건만…….

“이 정신머리가 봄이 오기도 전에 오락가락하는군, 하하.”

성조는 되레 태연자약하게 웃기만 하였다.

마치 일부러 그랬다는 듯이.

“지금이라도 가는 게 좋지 않나.”

“아침 먹은 것이 탈나서 종일 뒷간 가 있었다 하지, 뭐.”

그러곤 여유까지 부리며 느긋하게 마구간을 향해 걸어갔다.

아비 권세 등에 업고 건방을 떤다던 우스갯소리가 농이 아니었나.

하지만 다그친다고 들을 위인도 아니었기에, 결은 더 이상 군말 없이 그와 함께 말에 올랐다.

성조는 대문을 나와서도 세월아 네월아 유랑하듯 말을 몰았다.

이 겨울에 볼 게 뭐 있다고 그리 미적거리는지.

한가롭게 휘파람까지 불며 눈 쌓인 저잣거리를 구경하는 그였다.

그렇게 추위에 말의 입김이 희뿌옇게 번져올 때쯤, 성조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 다비 말일세.”

내내 앞만 향해 있던 결의 시선이 처음으로 성조에게 향했다.

다비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보였다.

그 시선에 성조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제법 미색이 있는 아이던데. 이번엔 용모도 제법 고려한 것인가? 다비로만 있기엔 퍽 아까운 얼굴이던데…….”

그 순간 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어쩐지 ‘감히 어린아이에게 무슨 말을’이란 뜻 같았다.

아니, 외모는 좀 어려 보이긴 해도 신묘년이면 당장 혼인을 해도 이상치 않을 나이건만.

저리 천하의 도둑놈 보듯 할 건 또 뭔가?

표정으로 심한 욕을 들은 기분에 성조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다신당에서만 해도 단이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는데.

‘설마……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가?’직접 다비로 데려온 만큼 나이를 모를 리는 없고.

아직 여물지 못한 외양 탓에 유달리 어리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놈, 겉은 저래 보여도 어린아이들에겐 쩔쩔 매는 놈이니…….’성조는 복잡해지는 마음을 숨기며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여연에서부터 데려왔다고 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치원에서 데리고 왔다.”

“치원?”

“압록강 북부에 이름 없이 버려진 벌판 하나가 있다. 여연 주민들은 그곳을 치원이라 부르더군.”

“그럼 저 아인 조선인이 아닌 겐가?”

“군역을 피해 가족들과 달아났다는 말만 들었다.”

“흐음…… 그랬군.”

성조는 뜻 모를 신음을 흘리며 눈가를 가늘게 떴다.

‘일단 나한테 출신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감싸겠단 생각은 아닌 듯한데.’그렇다고 단이에게 사심이 없다고 보기에도, 혹 있다고 보기에도 아직 일렀다.

원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라 어디 쉽게 떠볼 수가 있어야지.

‘뭐, 그래도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관직 제수까지 받은 만큼, 결이 이곳 한양에 머무는 시간은 제법 길 것이다.

그동안 결의 속마음을 찬찬히 알아보아도 충분할 터.

‘그 조그만 녀석 보는 재미도 꽤 있을 것 같고.’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순진하게 반응을 보이니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성조는 별 다른 의도 없이 물었다.

“한데 그 아이 목은 왜 그런 건가? 보아하니 최근에 목을 다친 것 같던데. 찻잎 써는 칼로 칼춤이라도 추었다던가?”

나름 웃기고자 한 말인데, 별안간 결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무거운 공기가 주위를 둘러쌌다.

천천히 말을 세운 결이 성조에게만 들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간밤에, 누군가 자객들을 보냈더군.”

함께 말을 세운 성조가 웃음기를 지우고 결을 보았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엔 결 못지않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알아낸 건 있는가?”

“일단 한 놈을 포획해두긴 했는데, 생각보다 입 여는 게 쉽지 않아.”

“자네에게 보내는 자이니 더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모양이로군.”

“하나같이 같은 문신이 있었다. 그게 아마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문신이라……. 어쩐지 예사 조직이 아닌 느낌이야.”

성조가 심각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결은 누군가라며 익명을 지칭하였지만, 실은 두 사람 다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왜들 자네를 가만두지 않는 것인지…….”

분명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님에도 성조는 죄책감이 들었다.

억지로 들어온 한양 땅에서조차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는 벗의 삶이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자신의 가문이, 벗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성조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자책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결에게 말했다.

“그 문양, 내게도 알려주게. 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열방으로 알아봄세.”

“무리할 필요 없다. 네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런 말 하지 말게.”

굳어진 눈동자가 오롯이 결을 향했다.

말 머리를 돌린 성조가 결을 똑바로 마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자네에게 일어난 일은 곧 내 일이야.”

“…….”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어.”

결에게 건네는 진심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 사이는 변치 않을 것이라고.

내가 여전히 너를 친형제나 다름없이 생각하는 것처럼, 너 또한 그럴 것이라고.

성조는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설령 이번 일에 제 가문이 엮여 있다 하더라도 성조는 끝까지 결을 도울 생각이었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결에게 진 마음의 빚은 다 갚아야 한다.

“우린…… 벗이잖은가.”

그래야 이 지독하리만치 깊은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에.

성조는 억지로 입가를 늘이며 부러 능글맞게 말했다.

“아무 염려 말게. 자네 일이라면 내 언제든 두 팔 걷고 나설 수 있으니.”

“……고맙다.”

안 웃느니만 못한 미소였지만, 결은 부러 모른 척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 한들 배후를 명백히 밝혀내기란 쉽지 않을 터이니.

양날의 검을 쥐면서까지 제 편에 서겠다는 성조의 마음을 애써 뿌리칠 필요는 없었다.

심각해진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고자 함이었을까.

다시 길을 향하며 성조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래 봬도 몸에 상처 난 것이 퍽 속상할 터인데, 자네 성격에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을 테지.”

정곡을 찔린 결은 역시나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단이의 상처와 바들바들 떨던 작은 손이 결의 머릿속을 스쳤다.

“빈말이라도 한마디해주게. 많이 무서웠을 테니.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리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그래야지.”

자신 없는 대답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객에 관한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지금은 오로지 단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성조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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