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둑해진 뒤였다.
결은 마구간에 흑마를 매어두고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던 걸음이 일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낮에 성조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저래 봬도 몸에 상처 난 것이 퍽 속상했을 터인데…….’
‘빈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게. 많이 무서웠을 테니.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리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고작 괜찮냐고 묻는 게 무어 어렵다고 이리 망설이고 있는 건지.
고심하던 결이 발길을 돌려 단이의 방으로 향했다.
종일 보선 어멈에게 교육을 받느라 많이 고단했던 걸까.
단이의 방은 빛 한 점 없이 어둠에 덮여 있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그의 하루 일과에 맞춰 새벽부터 움직이던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래. 이제 와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단이에겐 그저 속없는 인사치레처럼 들릴 텐데.
행여 원망 어린 눈빛을 또 마주하게 될까 봐 결은 주저하였다.
차라리 무심할지언정 그 눈빛을 또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저 아이가 뭐라고…….’
시선 하나에 이리도 흔들리는 건지.
어찌 저 아이 앞에선 이리 작은 것 하나까지 신경을 쓰게 되는 건지.
제 상처는 훨씬 더 깊으면서, 겨우 담뱃재와 엉겅퀴로 지혈만 해놓은 주제에.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이 낯선 상황과 감정들이 결은 불편하였다.
전장에서 칼과 화살은 무수하게 다뤄봤지만, 마음 하나 다루는 것은 이렇게나 서툰 까닭이었다.
결국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나리……?”
예기치 못하게 마주친 단이에 결이 잠시 당황하였다.
단이는 한 팔에 향료와 떡차가 든 소쿠리를 들고 있었다.
이 시각까지 다신당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황하긴 단이도 마찬가지라.
“아! 이건 제가 마시려고 가져온 게 아니라, 오늘 보선 아주머니께 배웠던 걸 다시 복습해 보려고…….”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무엇을 잘못하였다고 또 용서부터 구하는 것인지.
묵직한 무언가가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말없이 단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던 결이 시선을 내려 그녀의 목을 보았다.
가늘고 긴 목에 둘러진 무명천엔 어제와 마찬가지로 검붉게 굳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것인가. 혹 덧나고 있는 것인가. 약은 제대로 된 걸 써야 할 텐데.
많이, 아프진 않을까.
온갖 걱정이 밀려들어 저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결은 제멋대로 단이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두 주먹 안에 꾹 감추며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무수히 많은 생각 끝에 전한 짧은 한마디.
그 물음에 고개를 든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걱정의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저 빈말 정도로 생각하기엔 어둡게 변한 그의 눈동자가 오롯이 우려의 뜻을 담고 있는 터라.
무의식중에 목 언저리를 손끝으로 훑은 단이가 얼떨떨한 얼굴로 답하였다.
“네……. 괜찮습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통증이 이는지, 단이가 무의식중에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그런 단이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결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끝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채 전하지 못한 복잡한 생각들이 그의 입안에서 끈적하게 고여 갔다.
“그래. 쉬거라.”
결국 짧은 인사만 남긴 채 그녀를 지나쳐 가버릴 뿐이었다.
쑥스러워 저러시는 것처럼 보인다면, 단순한 착각인 걸까.
마주 인사할 겨를도 없이 저만치 멀어지는 결을 보며 단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일부러 여기까지 오신 건가?’그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
그리 생각하니 내내 움츠러들었던 가슴 한 구석에 순간 작은 온기가 번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비가 다친 것 따위, 전혀 신경도 안 쓰고 계실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니셨구나…….”
얼어 있던 가슴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봄 햇살에 겨울 눈 녹듯, 결이 건넨 짧은 걱정이 응어리졌던 마음을 따스하게 녹이기 시작했다.
***
퇴청을 한 지는 한참이나 지났건만.
성조는 여태 운종가를 배회하며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상인들도 죄 상점을 닫고 돌아가 휑하기만 한 거리.
말발굽 소리만 그 길을 하염없이 맴돌 뿐이었다.
초점을 잃은 눈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객……. 자객이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둠에 묻혀 바닥으로 침전했다.
죄책감과 불안함.
그리고 만약이라는 두려움이 한데 뒤섞여 그를 괴롭혔다.
그럴 리 없을 거라는 생각은 스스로조차 믿지 못하여 허울뿐인 애원으로 변했다.
“참…… 재미없게 돌아가네.”
쓸쓸하게 헛웃음을 치니, 주인을 닮아 곱상하게 생긴 말이 불만스럽게 바닥을 툭툭 차댔다.
마치 언제까지 같은 자리만 계속 맴돌 거냐는 투정 같았다.
성조는 힘없이 웃음을 흘리며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제 그만 가고 싶으냐?”
성조의 손길에 답하듯 말이 윤기 나는 갈기를 흔들며 투레질을 했다.
“그래, 가자.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고생이구나.”
성조가 고삐를 잡고 정해진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간 달리던 말은 곧 어느 대궐 같은 집 앞에 멈춰 섰다.
성조가 말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널찍한 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청지기가 그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데려가서 여물이랑 물 좀 먹이고 쉬게 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말고삐를 넘긴 성조가 무감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막 중문을 걸어 나온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전보다 더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성조가 마지못해 허리를 숙였다.
“……퇴청하셨습니까, 아버지.”
아버지, 한정회였다.
정회 역시 감정이라곤 없이 퍼석하게 마른 눈으로 성조를 보았다.
“다시 나갈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반적인 부자 사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한심. 혹은 안타까움.
아들을 향한 아비의 눈에서 읽히는 건 고작 이 정도였다.
좁힐 수 없는 간극 속에서 결국 정회가 먼저 눈길을 돌려 아들을 지나쳤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등을 향해 성조가 입을 열었다.
“며칠 전 결에게 불청객이 왔다 갔답니다.”
아들에게서 멀어지던 정회가 멈칫 걸음을 세웠다.
굳은 듯 움직이지 않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성조를 바라보았다.
한층 더 서늘해진 얼굴은 어떠한 속내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잘 돌려보냈다더냐.”
“그런 듯합니다.”
날카롭게 벼린 성조의 눈매가 은밀히 겨냥하듯 정회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객 하나가 예기치 못하게 오래 머물기로 하여서, 좀 곤란해하는 눈치긴 하지만 말입니다.”
제 말에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세세히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새로 들인 다비가 그 객 때문에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했다더군요.”
“소문은 들었다. 여연에서 데리고 왔다던 그 계집.”
“…….”
“계집종 하나 다친 게 무어 대수라고.”
흘리듯 내뱉은 말에 성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에게 다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정회도 모르지 않을 터.
그런데도 저리 말하니, 성조로선 더욱 속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일’을 알고 계신 아버지가.
“결에게 다비는 그저 그런 계집종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나약함이다.”
단단히 응집된 목소리가 성조를 나무라듯 날아들었다.
정회는 성조를 똑바로 마주 보며 처음으로 들끓는 감정을 내비쳤다.
“없어선 안 될 존재를 지니고 있는 그것이, 바로 나약함이란 말이다.”
한심하다 꾸짖는 것 같기도 했고, 그만 끊어내라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지독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르겠다.
이리 틀어져버린 관계에 대한.
차오른 숨을 무겁게 내리누른 정회가 그대로 뒤돌아서 대문을 나섰다.
끼이익, 탁. 대문이 거친 울음을 내며 닫혔다.
성조는 굳게 닫힌 대문을 뜻 모를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처음으로 그의 눈에 원망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정녕, 모르고 계셨습니까.’아니면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도 가만히 계셨습니까.
또, 그때와 같이.
결코 물을 수 없는 질문이 잔인하게 가슴을 할퀴고 사라졌다.
죄책감이 또 한 층 깊이 심연을 파내었다.
***
이튿날, 이른 새벽.
단이는 결이 소세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 찻상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나리, 차를 올리겠습니다.”
“들어오거라.”
스스럼없이 문을 열었던 단이는 순간 흠칫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는지 결이 막 적삼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를 감싼 붕대가 찰나의 간격으로 그 안에 숨어들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개의치 말고 차를 우리거라.”
“예, 나리.”
단이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를 내릴 준비를 했다.
사그락사그락 하는 비단 천의 소리가 은근하게 귀를 간지럽혔다.
아슬아슬함과 위험함, 그 사이의 어딘가.
일전에 정방에서 느꼈던 위압감이 다시금 단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저를 내려다보는 결의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다.
전날 제 상처를 걱정해주던 결의 모습 역시 단이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한몫했다.
‘다른 생각 말고, 지금은 차에만 집중하자.’단이는 자꾸만 결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붙잡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제는 보선 어멈에게 배운 대로 행다를 하는 게 손에 익은 터라.
첫날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이게 차를 내린 단이가 첫잔에 입을 대었다.
그러곤 자신의 숨결이 남아 있는 찻잔을 그대로 결에게 올렸다.
천천히 차를 비운 결이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단이는 그 안에 짙게 향이 우러난 차를 채워 다시 결에게 건넸다.
그렇게 석 잔의 차를 마신 그가 깔끔하게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다행히 차가 입맛에 잘 맞았던 모양이다.
안도하며 차제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돌연 결의 음성이 단이의 발목을 잡았다.
“의원은, 또 다녀갔더냐.”
어제에 이어 두 번째 건네는 걱정이었다.
단이는 큰 눈을 깜빡이다 얼른 대답하였다.
“의원께선 다른 곳으로 출타를 나가셔서, 당분간은 상처를 봐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치료는.”
“주신 약초를 때마다 바르고 있는데, 약이 금방 떨어져서 곧 약방에 가려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결의 낯빛이 사뭇 어두워졌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목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혹 제가 말실수를 한 걸까.
갑자기 긴장이 밀려들어 단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결은 곧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알겠다. 나가보거라.”
“예, 나리.”
단이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북방 귀신의 앞이라.
한 번씩 정적이 찾아올 때면 습관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곤 했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는 거겠지.’나리께서도 조금씩 나를 인정해주시는 것 같고.
무관심과 언짢음, 그 어딘가에 있던 눈빛이 이제는 편안하게 바뀌는 듯하니.
“아야…….”
순간 목에서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분명 의원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기분이다.
이따금 진물이 나와 천 벗기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뭐, 이것도 다 낫는 과정이겠지.’
낮게 숨을 내쉰 단이는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다신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제구를 다 씻고 나니 물기를 닦을 만한 천이 보이지 않았다.
“아, 어제 헝겊을 다 빨았구나.”
이를 어쩐담.
고민하던 단이의 머릿속에 문득 정방이 떠올랐다.
혹시 수건이라도 한 장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정방에 막 다다른 그때.
“아까 등청하실 때 봤어? 말에 오르실 때 보니까 고삐도 제대로 잡기 힘드신 것 같던데…….”
“오늘도 수건에 피가 잔뜩 묻어나오더라니까.”
“그런데도 의원은 안 부르시고 계속 지혈초만 쓰시니…….”
“공남이 말로는, 그 단이란 다비만 아니었어도 나리께서 안 다치셨을 거래.”
“정말?”
“그렇다니까. 그날 다비 구하시려다 그렇게 되신 거라던데.”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정방에서 종들이 나누는 대화에 단이의 안색이 굳고 말았다.
단이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대화만 계속 들었다.
“그런데도 그 다비한테 말하지 말라 하셨다며?”
“그래도 혼자 모르고 있는 건 좀 너무하다. 누구 때문에 다친 건데.”
나리께서 나를 구하려다 다치셨다니.
게다가 내가 모르도록 종들의 입단속까지 시키셨다니.
그날 나리께선 아무렇지도 않아 하셨는데.
‘심지어 오늘도…….’
문득 단이의 머릿속에 옷을 갈아입다 언뜻 미간을 찌푸리는 결이 떠올랐다.
아까는 제 손 너머로 물이 보인 건가 싶어 더욱 조심하였는데.
‘설마…….’
물 때문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었던 걸까.
단이의 입술이 옅게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