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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16화 (16/100)

16화

‘정말로…… 나 때문에 다치신 건가?’

방황하던 시선이 곧 뒤로 향했다.

단이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덕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덕원 할아버지, 정말이어요? 정말 나리께서 절 구하시려다 다치셨어요?”

다짜고짜 팔을 붙잡고 묻는 단이에 덕원이 놀라 쉬이 답하지 못했다.

하나 침묵은 곧 긍정이라.

입술을 꾹 맞다문 단이가 눈시울을 붉혔다.

“저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나리께서 저를 버리려 하셨다고 원망만 했는데…….”

구해준 것보다 모질게 말한 것을 더 마음에 담고, 차가웠던 그의 시선만 기억하였다.

돌이켜 보니 구해주어 감사하다는 말 또한 한 적이 없었다.

심 다점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그런 주제에 걱정 한마디 건넸다고 혼자 마음이 풀어져선 좋아하던 꼴이라니.

처음부터 끝까지 제 생각만 했다는 사실이 단이를 더욱 죄스럽게 만들었다.

뒤늦은 후회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색이라도 해주시지……. 아니, 차라리 먼저 괜찮으시냐 여쭈어볼걸…….”

“물어보았어도, 도련님은 네게 아무 말씀 안 하셨을 게다.”

덕원은 조심스럽게 단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였다.

“남의 아픔을 위로하는 데에도 서투시지만, 본인의 아픔은 아예 드러내시지 못하는 분이거든.”

그 말을 들으니 잠깐이나마 결을 원망했던 스스로가 더욱 부끄러워졌다.

단이는 글썽이는 눈으로 덕원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하면 좋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리께선 제가 알게 되는 걸 바라시지 않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단이를 보며 덕원이 부드럽게 입가를 늘였다.

“네가 옳다고 생각되는 대로 하려무나. 도련님은 그걸 바라실 테니.”

일렁이는 눈망울이 이윽고 한 가지 생각으로 물들었다.

***

진위와 함께 훈련원으로 향하던 결이 갑자기 말을 멈춰 세웠다.

“……장군?”

갑자기 멈춘 결에 진위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불현듯 결이 말 머리를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장군!”

“잠시 들를 곳이 있다.”

결은 지체 없이 말을 몰아 어딘가로 향했다.

이윽고 흑마가 멈춘 곳은 어느 약방 앞이었다.

웬만큼 상처가 깊어도 내색을 않던 결이기에, 스스로 약방까지 온 것을 보고 진위가 사색이 되었다.

“설마 또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다.”

“예? 그럼 어찌…….”

결은 진위의 물음에 일일이 답하지 않고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늙은 약방 주인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였다.

“이곳에서 파는 고약이 자상과 염증에 특효라던데.”

“자상 고약…… 예, 있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약방 주인이 느릿한 걸음으로 손바닥만 한 작은 도자 항아리를 가져와 결에게 보였다.

뚜껑을 열자 붉은빛의 고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석류화를 짓이긴 것에 석회와 백교향, 황단 등의 가루를 넣은 것이옵니다. 하루 세 번씩 환부에 바르고 광목으로 둘러놓으면 지혈과 진통에 좋고, 흉도 덜 지게 됩지요. 이제 딱 하나 남았는데, 운이 좋으십니다.”

고약 단지를 받아든 결은 별다른 말 없이 돈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를 받아든 약방 주인이 놀란 눈을 끔뻑이며 결을 보았다.

엽전의 무게가 주름진 마른 손을 버겁게 하고 있었다.

“나으리, 그 약은 이 정도의 값이 아니온데…….”

“내게는 그만한 값이니 받거라.”

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즉시 약방을 나가버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양쪽을 번갈아보던 진위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장군.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도 고약 값으론 너무 과한 듯합니다.”

“쇳독 때문에 상처가 많이 곪은 것 같다.”

그 말에 진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방치하신다 싶더니 결국……. 얼른 훈련원으로 가시지요. 제가 상처를 봐드리겠습니다.”

“나 말고.”

결이 능숙하게 흑마에 올라 말했다.

“내 다비 말이다.”

“……예?”

진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결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본인의 상처는커녕 부하 장수들의 상처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게 바로 결이었거늘.

그런 그가 한낱 다비가 다친 일로 고약을 샀다.

그것도 제값의 몇 배가 넘는 돈을 지불하고서.

수년간 결을 보필해왔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설마…….’의아한 진위의 눈이 어느새 말을 몰아 골목을 빠져나가는 결에게 가닿았다.

***

그날 밤.

퇴청한 결에게서 웬일로 또 한 번 차를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껏 하루에 한 번씩만 행다를 했던 단이는 부랴부랴 다구를 챙겨 그의 방으로 향했다.

보선 어멈의 말로는 정식 다비가 될 날이 다가오니 슬슬 횟수를 늘리려는 것 같단다.

그녀 역시도 조금 의아해하는 눈치긴 했지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되지?’낮 동안 해야 할 말들을 이것저것 생각해 놓았건만.

막상 때가 되니 종일 정리해두었던 말들이 뒤죽박죽 엉켜 복잡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미적거리는 사이 어느새 결의 방이 눈앞에 보였다.

“나리, 차를 올리겠습니다.”

“들어오거라.”

단이는 정리되지 않는 말들을 꾹 삼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해진 수순대로 차를 우리는 동안 고요한 침묵이 주위를 맴돌았다.

여느 때와 같은 정적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속이 시끄러운 순간이었다.

이윽고 알맞게 우린 차의 기미를 확인한 단이가 결의 앞에 찻잔을 놓았다.

결은 새벽 때와 마찬가지로 총 석 잔의 차를 비워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입안으로 흘려보낸 결이 찻잔을 내려놓곤 잠시 단이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한없이 고요하고 어두워 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아이라고 생각하실까.

아니면 애초에 아무 기대도 안 하셔서 실망이랄 것도 없으실까.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단이는 무거워지는 마음을 감당키 어려웠다.

“……나리.”

입을 열기 무섭게 목이 메어왔다.

뭘 잘했다고 눈물부터 나는지.

울음을 꾹 삼킨 단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내내 입속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나리.”

조금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단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하니, 결은 영문을 알지 못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이는 옷소매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절 구해주시려다 다치셨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

“보은은 못할망정, 절 버리시려는 줄 알고 원망만 하였는데…….”

말을 하고 보니 스스로가 더 못난 사람 같았다.

부끄럽고 창피하여 눈물이 범람하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송구하옵니다…….”

그러자 결이 작게 숨을 내쉬곤 나직이 물었다.

“상처는 어떠하냐.”

“나리께서 입으신 상처에 비하면,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훌쩍이는 단이의 목소리 뒤로 결의 묵직한 음성이 따라왔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상처는 없다.”

“…….”

“숨길 수 있는 상처와 숨길 수 없는 상처만 있을 뿐.”

결의 눈동자가 단이의 목으로 향했다.

목에 둘러진 광목천은 상처의 깊이를 알려주듯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질 만큼.

“다행히 나는 숨길 수 있는 상처였고…….”

이 와중에 네가 나의 상처를 알지 못하여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면.

“너는, 아닌 듯하군.”

정말로 내가 이상해지는 걸까.

아니면 네 앞에서만 이상해지는 걸까.

생각을 지워버린 결은 품속에서 고약 단지를 꺼냈다.

“가까이 오거라.”

훌쩍이던 단이가 한 번 더 눈을 닦곤 엉거주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결이 꺼낸 단지 안에는 굳은 기름 같은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고약이다. 덧난 자상에는 이게 제일이라더군.”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일렁였다.

구해줘도 인사는커녕 원망만 한 자신이 뭐가 어여쁘다고 저런 약까지 사왔는지.

그 생각에 더욱 결을 볼 낯이 없어졌다.

“천을 풀거라. 그 상태로 놔두었다간 상처가 더 곪을 것이다.”

결이 손수 고약을 덜며 말하였다.

직접 발라주려는 모양이었다.

단이는 죄송한 마음과 염치 때문에 선뜻 상처를 보일 수가 없었다.

“아, 아니어요. 약은 제가 바르겠습니다.”

“그 손으로 말이냐.”

결의 눈짓에 아래를 보니, 떡차 부스러기와 숯의 재로 인해 손끝이 거뭇하게 더러워져 있었다.

손가락을 말아 쥔 단이가 우물쭈물하며 말하였다.

“하면 나리의 상처에 먼저 바르시고, 남은 것을 제게 주시어요.”

“난 괜찮다.”

“하지만 나리께서도 상처가 깊으시다고…….”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보여주고.”

결이 당장이라도 벗어 보일 것처럼 옷깃을 잡았다.

놀란 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어요! 나리께서 괜찮으시다면 괜찮은 거겠죠. 제가 어찌 감히…….”

얼굴은 이미 그의 벗은 몸을 본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단이를 향해 결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럼 천을 풀거라.”

저를 위해 손수 약까지 구해왔는데, 계속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이는 어쩔 수 없이 결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목에 두른 광목천을 풀고 상처가 잘 보이게끔 옆으로 돌아앉았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처는 아물다 벌어지기를 반복하여 그새 염증까지 난 상태였다.

작은 부스럼에도 괴로운 법이거늘, 이 아인 이걸 어찌 참은 것인지.

미간을 구긴 결이 상처 위로 조심스럽게 고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예민한 상처 위로 닿은 손길에 단이가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읏…….”

“아프냐.”

“……괜찮습니다. 참을 만합니다.”

결은 조금 더 손에 힘을 풀어 고약을 발라주었다.

그의 손끝은 굳은살과 상처로 인해 온통 거칠었다.

하지만 손길만큼은 무척이나 따스하고 조심스러웠다.

상처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인지 결의 얼굴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한순간 가까워진 거리에 단이는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피가 죄 얼굴로 몰려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고약에 신이한 것이 섞여 들어갔는가.

아니면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 향에 마음이 멋대로 봄이라 착각하였는가.

난생 처음 겪어보는 묘한 감정이 단이의 가슴 속에 뭉근히 피어올랐다.

그 감정이 몸 곳곳에 스며들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하였다.

숨을 크게 쉬기 어려웠고 어깨가 자꾸만 경직되었다.

이상하게 아랫배도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최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으니, 그저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거라 생각할 뿐이었다.

“곧 끝나가니 조금만 참거라.”

“예, 나리.”

단이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손의 온기 때문인지 상처가 점점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 위로 간간이 불어오는 결의 숨결.

분명 예민한 살갗을 잠재우기 위해 불어주는 것이건만.

오히려 그 숨결로 인해 가뜩이나 민감한 감각이 더욱 곤두서고 있었다.

그나마 상처가 목 옆쪽에 났기에 망정이지.

정면이었다면 시선 둘 곳도 찾지 못해 제 이상한 표정이 훤히 보였을 것이다.

뭐, 옆을 보고 있는 지금도 딱히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단이는 치맛자락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숨까지 조심조심 내쉬었다.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자꾸만 턱 아래에서 놀아났다.

이대로 있다간 숨이 꼴깍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

“공연히 이런 일을 겪게 하여…… 미안하다.”

살갗을 떠난 손길 대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단이가 작게 입을 벌렸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단이가 시선을 옮겨 결을 마주 보았다.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또한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면, 저는 기꺼이 감내할 것입니다.”

고작 한 뼘의 거리.

서로의 눈 속에 어떠한 생각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떠한 감정이 어려 있는지는 충분히 알 만한 거리였다.

“나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망만 하여 죄송했습니다.”

“…….”

“그리고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저를 구해주셔서.”

이런 저를 나리의 곁에 두어주셔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이채가 결의 검은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옭아매듯 단이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의 시선이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아래로 향했다.

마침내 떨어진 곳은 붉은 입술 위였다.

생명을 잃어가던 나에게 물을 흘려보내주던.

운명을 말하던, 그 입술.

단이의 입술 새로 얕게나마 드나들던 숨이 그 짙은 시선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던, 그 아슬아슬한 시간의 끝.

“아끼지 않는 게 아니다.”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단이의 귓가로 흘러들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들어 올린 시선 끝에 다시금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맺혔다.

“너무 가까이 두려 하지 않는 것일 뿐.”

나와 가까이 있으면, 결국 다치게 되는 건 너니까.

차마 잇지 못한 말은 혀끝에서 씁쓸하게 녹아 사라졌다.

그걸 알 리 없는 단이에겐 앞말이나 뒷말이나 같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결이 전한 말은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어쨌든, 저를 미워하시는 건 아니란 말씀이지요?”

“……그래.”

“그럼 됐습니다.”

단이가 입가를 늘였다.

말간 미소가 결의 마음속에 깊은 파동을 일으켰다.

“나리 곁에만 계속 있을 수 있게 해주시어요.”

정방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마치 물속에 담긴 차 주머니가 짙은 색을 뿜어내듯이.

“저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결,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감정을 일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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