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단이의 목에 난 상처에 화기가 빠지고 딱지가 생길 무렵.
다신당에선 여느 때처럼 보선 어멈의 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떡차는 그 표면이 기름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육리에 윤기가 도는 것이 상품이니, 황백과 청백에 구별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앞에서 단이는 조그마한 수첩에 열심히 보선 어멈의 가르침을 받아 적었다.
보선 어멈의 말이 워낙 빨라 이리 적지 않으면 나중에 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탓에 덕원이 구해다 준 세필 붓엔 먹물 마를 날이 없었다.
원래도 차를 배우는 데에 있어 열심이던 단이는 최근 더욱 지극정성이 되었다.
결에게 고약을 받은 후, 그에 대한 서운함이 일절 사라진 덕이었다.
하여 한 잔을 올리더라도 전보다 더 좋은 차를 올리고 싶었다.
차의 맛과 향을 넘어 효능까지 따지게 되었고, 결이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면 나리께 더 좋은 차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물을 보기만 하여도 발작을 일으키는 저주.
그것을 풀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독한 차에 의지하는 대신 몸을 정제하는 기호로서만 마실 수 있을 터.
보선 어멈을 따라 향차를 조합하던 단이가 문득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문제는 저주에 대해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인데…….’보선 어멈도, 덕원도, 이 집안 누구도 결의 저주를 입에 담지 않았다.
모두가 의식적으로 그 주제를 피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당사자인 결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아직까지는 차의 효능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저주에 대해 알아내서 꼭 풀어드리고 싶어.’나리께서 편안해지실 수 있도록.
고약 하나에 내 마음이 편해졌던 것처럼.
고약 생각에 무심코 목에 두른 천을 쓰다듬던 찰나.
“…….”
단이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달아올랐다.
상처에 약을 발라주던 결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 까닭이었다.
곳곳에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으로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주던 손길, 행여 스침에 아파할까 낮게 불어주던 숨결, 그리고 저를 바라보던 눈빛.
'아끼지 않는 게 아니다. 너무 가까이 두려 하지 않는 것일 뿐.' 거기에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의 진심이 느껴지던 말까지.
그날의 모든 잔상들이 단이의 마음속 깊이 번져 나갔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마치 옷에 물든 차의 흔적처럼.
“그럼 이때엔 떫은맛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
“으흠!”
“예? 아…… 유화! 유화를 거두어내야 합니다.”
멍하니 있던 단이가 화들짝 놀라 답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니,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보선 어멈도 다행히 나무라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단이는 여태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어보았다.
‘왜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이리도 심장이 뛸까.’왜 결이 준 고약 단지를 볼 때마다 그렇게 웃음이 날까.
도대체 왜, 결의 앞에만 서면 이전과 다른 느낌으로 몸이 굳으며 가슴이 간질거릴까.
수많은 질문 앞에서 단이는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나리를 향한 충성심이 이리도 깊어졌구나.’그저 이런 순진하고 엉뚱한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 감정이 훗날 가슴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릴지, 지금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이리 오너라!”
저녁 무렵, 때 아닌 요란한 부름이 결의 집 대문을 넘어섰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방에서 쉬고 있던 단이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단이는 문을 열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저 멀리 대문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말을 타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어, 새 다동!”
성조가 부채로 그녀를 가리키며 반갑다는 듯 웃었다.
단이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거늘.
저 양반이 어찌 또 이곳을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말에서 훌쩍 내린 성조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간 잘 지내었느냐? 내 약조를 지키러 다시 왔느니라.”
왜…….
“오셨습니까.”
차마 왜 왔냐고 대놓고 물을 수는 없어, 단이는 앞말은 혀 밑에 꼭꼭 감춰둔 채 억지로 인사를 올렸다.
척 보기에도 달가운 얼굴이 아니건만.
성조는 한없이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기분 좋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 하루라도 빨리 오고 싶었는데 그간 일이 바빠 오지 못하였다. 혹 너무 늦어져서 서운하였느냐?”
그럴 리가요…….
성조의 뻔뻔한 물음에 단이는 대꾸할 의지조차 잃고 말았다.
그 침묵을 멋대로 해석한 성조가 과장되게 표정을 꾸미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도 못할 만큼 서운했던 모양이구나. 내 다 이해한다. 약조를 하고도 서둘러 오지 않은 나의 잘못이니. 하아, 내가 이리 죄가 큰 사내야.”
아니…….
이곳에 다시 오신 것 자체가 잘못인데요, 이 양반아…….
단이는 어이가 없다 못해 남의 어이까지 가져와 증발시키는 작태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대로 있다간 끝이 없을 지경이라.
단이는 성조를 무시하고 이내 그의 뒤를 살폈다.
마땅히 함께 보여야 할 결이 보이지 않은 까닭이다.
성조는 제 뒤를 기웃거리는 그녀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다 모르는 척 물었다.
“뭘 그리 찾느냐? 설마 그 사이 마음이 바뀐 게냐? 내 오늘은 급히 오느라 네 선물을 사오지 아니 하였는데.”
“그런 것 아닙니다.”
단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불퉁하게 대꾸하였다.
그 시선을 쭉 따라가 보니 예상대로 아직 닫히지 않은 대문이라.
피식 입꼬리를 늘인 성조가 부채를 펴 입가를 가렸다.
“셋, 둘, 하나.”
입속에서 작게 숫자를 굴리니, 뒤이어 대문 안으로 결이 흑마로 타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밝아지는 단이의 표정.
‘이것 봐라.’저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단이의 표정에 성조가 눈썹을 까딱였다.
꼭 온종일 집에서 홀로 있던 새색시가 서방님 오신 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온 얼굴이다.
흥, 성조에게 새침하게 콧바람을 날린 단이가 얼른 결에게 다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나리.”
단이를 본 결이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약은.”
“조금 전에 약천을 갈았습니다.”
“잘했구나.”
단순한 칭찬 한마디에 단이가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결을 짧은 다리로 쫑쫑쫑 열심히 따라왔다.
‘새색시가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인가?’어쩐지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 같기도 하고.
연모인가 싶다가도 속없이 웃는 얼굴이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도저히 낭군을 보는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
그런 단이를 대하는 결의 눈빛도 연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래저래 묘한 두 사람의 조합에 성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이는 오로지 결에게만 집중하며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나리, 그럼 지금 바로 차를 올릴까요?”
“그리하거라.”
“예. 얼른 채비하여 오겠습니다.”
단이의 동그란 뒤통수가 중문 너머로 쏙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좇던 성조가 홱 고개를 돌려 결을 보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 달리 심히 들뜬 듯 보이는데. 같은 아이 맞나?”
“그런가.”
결은 무관심한 투로 성조의 말을 가벼이 넘겼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결의 눈매 역시 평소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꼭 단이를 귀엽게 느꼈다는 듯이.
“허어.”
천하의 서결이 여인을 두고 저런 표정을 짓다니.
남들은 곧 죽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변화였지만, 결을 오랫동안 봐왔던 성조는 단번에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눈치 빠른 직감이 그리 일러주고 있었다.
“나리, 차를 올리겠습니다.”
곧이어 단이가 찻상을 들고 사랑채 안으로 들어왔다.
성조는 기대라곤 일절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보나마나 어설프게 배운 솜씨겠지.’아무리 보선 어멈의 행다 실력이 뛰어난들, 그것을 전부 배우기엔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으니.
그런데 행다가 시작된 순간.
성조의 눈빛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차를 선별하는 눈이나 알맞게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는 감각, 찻잎에 어울리는 향료를 고르는 안목.
거기에 차제구를 다루는 손길까지 어설프기는커녕 퍽 능숙한 태가 났던 것이다.
‘다점에서 데려왔다더니……. 마냥 장사치 노릇만 하던 것이 아니었구나. 보선 어멈의 법대로 제법 연습한 티도 많이 나고.’마침내 차의 맛까지 살핀 단이가 그 잔을 결의 앞에 놓았다.
성조는 안쓰러운 낯으로 찻잔 속을 보았다.
‘무릇 먹빛은 검어야 하고 차 빛깔은 희어야 한다고 했거늘.’단이가 우린 차는 너무 오래 우려서 먹처럼 탁하게 변한 차였다.
다만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저리 독하게 우려냈는데도 다향이 코를 찌르기는커녕 오히려 향긋한 내음이 난다는 것이었다.
‘아까 섞은 향료 덕인가?’성조가 유심히 살피는 사이, 결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여연에 있을 땐 종종 사약 마시듯 억지로 잔을 비우던 그가 이번엔 음미하듯 차를 마셨다.
여느 때와 똑같은 석 잔의 차.
여느 때와 다른 그의 반응.
그만큼 단이의 차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성조는 결의 눈치를 살피다 은근슬쩍 단이의 입술이 닿았던 찻잔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차가 조금 남은 듯한데, 나도 한잔…….”
그러나 우연인지 고의인지, 결이 한발 앞서 그 잔을 직접 단이에게 건넸다.
감히 이 잔으로 마실 생각은 말라는 뜻이었다.
‘틈 없는 놈.’가늘게 뜬 눈으로 결을 보던 성조가 결국 원하는 것을 대놓고 밝혔다.
“이제 그만하고 나도 한잔 마셔볼 수 있게 해주게. 내 아까부터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자네도 알지 않은가.”
그 말에 단이가 얼른 결을 보았다.
‘싫습니다, 나리. 저런 얄미운 한량 나리께는 차를 내어드리기 싫어요!’부릅뜬 눈으로 간절히 애원했거늘.
눈빛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결은 고민도 없이 단이에게 물었다.
“괜찮겠느냐.”
내심 안 된다 말해주길 바랐던 단이는 소심한 반항으로 입술을 맞물었다.
다른 다동들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차를 올리게 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네 상전이 묻지 않느냐, 다동아.”
성조는 능글맞게 웃으며 결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것도 일부러 다동이라 부르면서.
단이가 잔뜩 심통이 났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눈치였다.
어쩜 저리 얄미우실까.
마음 같아선 알아서 드시라며 톡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결에게 무례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 터라.
“……네. 올리겠습니다.”
단이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조가 냉큼 주석으로 된 다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럼 나는 저 사약 같은 차 말고, 이 찻잎으로 해다오.”
결이 한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발품 팔아 겨우 구한 귀한 차였다.
다함을 받아든 단이가 입구에 덮인 대 껍질을 벗겨내었다.
안에는 눈처럼 곱게 갈린 가루차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한눈에 좋은 차임을 알아본 얼굴이라.
성조가 내심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명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용단승설차다. 송대의 맛을 전통으로 이어오는 곳인데, 예년보다 기후가 빨라 이르게 구할 수 있었지.”
단이는 얄미웠던 마음도 잊은 채 성조가 건넨 용단승설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곧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차가 새 찻잔에 담겼다.
성조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우선 향부터 맡아보았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향이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차를 한 모금 머금어본 성조가 의외라는 듯 단이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아도 무척이나 잘 우려낸 차 맛이었다.
“혹 이전에도 승설차를 다뤄본 적이 있느냐.”
“할아버지께서 제다(製茶)하시는 걸 어깨 너머로 본 적은 있습니다.”
“직접 배워본 적은 없고?”
“심 다점에 있을 땐 뭐든 그리 배웠습니다. 차를 제대로 배운 것은 이곳에서가 처음입니다.”
그 말에 성조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연경에서 만든 용단승설차는 까다롭기가 봉황단총 못지않았다.
물을 끓이는 시간과 온도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로 변하는 까닭이었다.
웬만큼 숙달된 사람이라 해도 연경에서의 맛을 되살리지 못했건만.
‘고작 어깨 너머로 배운 아이가 이토록 제대로 된 맛을 내다니…….’
차가 말라붙어버린 시대에 이토록 귀한 인재가 있나 싶었다.
그 생각들을 알 리 없는 단이는 난데없이 웃는 성조를 이상하게 볼 뿐이었다.
몇 번이고 실소를 흘리던 성조가 기분 좋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그러곤 이런 낯 뜨거운 말까지.
참으로 뜬금없기 그지없었다.
당혹감에 두 뺨이 발그레해진 단이는 괜히 눈에 힘을 주며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그런 가운데, 결만 홀로 말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왠지 언짢아 보이는 눈빛으로.
‘괜히 허락하였나. ……저놈, 내보내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