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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18화 (18/100)

18화

며칠 후.

단이는 보선 어멈을 따라 다신당 뒤뜰로 향했다.

보선 어멈은 뒤뜰에 쌓인 눈을 차관에 가득 담았다.

“마땅한 샘물이 없을 때엔 한영(눈꽃)으로 찻물을 끓일 수 있다.”

“눈을 녹여서 차를 만든다고요?”

“그래. 깨끗한 한영은 오히려 통정이나 미천의 샘물보다 더 차 맛을 좋게 하지.”

단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뒤뜰에 가득한 눈을 보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얗고 깨끗한 눈이 햇살을 받아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심 다점에 살 때에도 지천에 깔린 게 눈이었지만, 눈으로 차를 끓인다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여 눈으로 차를 끓이는 보선 어멈을 단이는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선 아주머니께서는 어찌 이리 차를 잘 아시어요?”

“그건 알아서 무엇 하게.”

물을 유심히 살피는 보선 어멈에게서 고저 없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단이는 기죽지 않고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저도 보선 아주머니처럼 되고 싶어서요.”

“…….”

“아주머니는 차에 대해서 모르는 게 하나도 없으시잖아요. 차로는 보선 아주머니가 조선에서 제일가시는 것 같아요.”

보선 어멈의 눈동자가 잠시 단이에게 향했다가 다시 차관으로 옮겨졌다.

한참을 말없이 물만 끓이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처음 차를 드시게 되었을 때……. 그분의 첫 다비를 맡으셨던 분이, 바로 내 어머니였다.”

보선 어멈은 오래된 이야기를 느릿하게 꺼내었다.

“어머니는 노쇠하셨으나 행다에 있어선 늘 진심이셨지. 한평생을 이 집의 가노로 살면서 눈 감을 날만 기다리시던 분이었는데…….”

조금씩 끓어오르는 물을 보며 보선 어멈의 눈동자가 사뭇 짙어졌다.

“차를 우리면서,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하시더구나.”

그런 어머니 덕에 보선 어멈은 자연스럽게 차를 접하게 되었다.

비록 신묘년 생이 아니어서 결에게 직접 차를 올릴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운 좋게도 어머니와 함께 차를 배울 수 있었다.

텁텁하면서도 뒷맛은 깔끔하고, 또 향기로운 향까지 풍기는 차가 몹시도 신이하였더라.

보선 어멈은 저도 모르는 새에 차에 푹 빠지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숙명처럼 새 다비나 다동을 교육시켜 여연으로 보내곤 하였다.

“그때 어머니와 내게 차를 가르쳐주시던 분이 바로 박 노인이란 분이었다.”

“박 노인이요?”

“그래. 한때 사온서에서 임금께 술을 빚어 올리시던 분이었는데, 후에 궐을 나와 직접 술도가를 차리셨지. 술뿐만 아니라 향과 차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게 명으로 다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었으니, 벌써 5년이 지난 일이었다.

지금은 술도가 일꾼들에게 이따금 잘 계신다는 말만 얻어들을 뿐이었다.

“임금님께 술을 올리셨을 정도면 엄청 대단하신 분일 것 같아요.”

“뭐……. 여러모로 대단하시긴 했지.”

단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언젠가 보선 아주머니께 차를 다 배우고 나면, 저도 그분께 꼭 배워볼래요!”

“워낙에 괴팍한 영감이시라, 네가 잘 버텨낼지 모르겠다.”

그녀의 깐깐한 성격 역시 박 노인이 갈고 닦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보선 어멈까지 괴팍하다 칭할 정도면 정말 보통이 아니리라.

그러나 단이가 누군가.

“괜찮아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한 괴팍하시었는걸요!”

불같은 왕 노인의 손에서 평생을 자라오지 않았는가.

웬만한 호통은 이제 다정한 타이름으로 받아들일 만큼 내공이 단단히 쌓인 그녀였다.

“혹 박 노인께서 돌아오시면 저도 데려가주시어요. 더욱 배워서 나리께 더 좋은 차를 올리고 싶어요.”

그 마음이 퍽 당차고 어여쁜지라.

해맑게 청을 하는 단이를 기특하게 보길 잠시.

“그전에 내 가르침부터 제대로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보선 어멈이 다시 엄한 표정으로 단이의 손을 가리켰다.

“이래 갖고 어디 박 노인께 인사나 올릴 수 있겠느냐.”

“예? ……헉! 소, 송구하옵니다!”

단이는 눈 사이에 섞여 들어온 마른 풀들을 얼른 골라내었다.

그런 단이를 바라보는 보선 어멈의 시선이 어쩐지 전보다 따스해져 있었다.

***

따스하게 불을 켠 사랑채 안에 쪼르르 차 따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퍼졌다.

석 잔의 차를 따르고 그가 다 마시길 기다리는 사이.

단이는 오늘도 결의 반응을 세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나리께선 백단향의 향이 짙은 것을 더 좋아하시는구나.’눈빛, 미간의 움직임, 시선과 손짓.

결에게서 나오는 무엇 하나도 단이는 허투루 보지 않았다.

꼼꼼하게 그의 반응을 살피어 밤마다 수첩에 적어 놓았다.

보선 어멈의 가르침과 결의 반응이 차곡차곡 쌓인 수첩은 단이에겐 보물과도 같았다.

하지만 결의 앞에서 대놓고 수첩에 적을 수는 없는 터라.

지금은 결의 반응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최대한 머릿속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차 맛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냐.”

간혹 너무 과하게 쳐다본 탓에 결을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단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나리께서 표정으로 다 알려주셨거든요.

단이는 뒷말을 삼키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결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닷새 후부터는 나와 함께 등청을 할 것이다.”

“등청……이요?”

“그래. 달포가 지났으니, 이제 정식 다비로서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동행해야지.”

그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날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단이는 새삼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차 우리는 것이야 늘 하던 일이니 횟수가 늘어나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기에 여러 생각이 밀려들었다.

낯선 곳에서 실수를 하진 않을지, 나리께 폐를 끼치진 않을지.

벌써부터 여러 걱정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과는 별개로 묘한 떨림이 이 순간 가슴을 두드렸다.

긴장과는 조금 다른.

‘나리를…… 지금보다 더 자주 뵐 수 있어.’어쩐지 그날을 기대하게 하는 감정이었다.

“궐 앞 육조거리는 그 어떤 곳보다 고요하고 안전한 곳이나, 동시에 그 어떤 곳보다 말이 많고 위험한 곳이다.”

낮은 목소리에 부유하던 공기마저 일순 무거워졌다.

“보아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 그곳에선 그리 행동하거라.”

“…….”

“너의 발걸음 하나조차 흠이 될 수 있는 곳이 조정이니.”

가보지 않아도 벌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순간 설렘을 잊은 단이는 짐짓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리께 흠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단이의 말에 결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진심은 오늘도 그만을 위하고 있었다.

보선 어멈에게 듣기론 단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차 연구에 힘쓰고 있다 하였다.

차를 마실 때마다 제 반응을 세세히 살피고 있다는 걸 결 또한 모르지 않는 바였다.

그간의 일로 많이 서운하였을 텐데.

고약 단지 하나에 말간 웃음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괜스레 기특하였다.

안쓰러우리만치, 어여쁜 아이.

“혹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든…….”

가만히 단이를 눈에 담던 결이 진심 한 자락을 무심히 내비쳤다.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 말에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대문 밖에서는 이 아이로 비롯된 모든 일들이 다 저의 책임이 되는 터라.

하여 감당 못 할 일이 생기거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예. 나리.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닌데.

저 일렁이는 눈망울을 보니 사뭇 기분이 이상해졌다.

꼭 낯간지러운 말을 한 것처럼.

“……이만 나가보거라.”

결은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고 이만 단이를 내보냈다.

뜻 모를 감정이 다시금 가슴에 번진 까닭이었다.

“예, 나리. 안녕히 주무시어요.”

꾸벅 허리를 숙인 단이가 찻상을 들고 사랑채를 나왔다.

섬돌을 딛고 내려서자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단이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차로 속 숯불처럼 홧홧하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나리의 사람.’마치 일전의 일을 속죄하는 듯한 말이었다.

스스로 살아남지 않더라도 내가 너를 지키겠다는 것처럼.

네가, 나를 흔들 수 있다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뛰었다.

언제나 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결이 처음으로 그 벽을 넘어 다가와 준 것만 같았다.

언제 다시 멀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 기분만 간직하고 싶었다.

미소 띤 눈동자가 하늘에 두둥실 뜬 달로 향하였다.

밝은 달무리가 꼭 그녀의 앞날을 응원하는 듯했다.

“잘 해내야지. 나는 나리의 사람이니까.”

단이는 달을 보며 다짐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듣는 이 하나 없는 마당 위로 늦겨울의 마지막 눈이 둥실둥실 내려 쌓여갔다.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단이는 달빛에 의지해 면경 속 제 목을 살폈다.

딱지가 크게 앉은 상처는 더 이상 약을 바르지 않아도 될 만큼 아물어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목에 이리 큰 상처가 나 있는 것은 남들 보기에 흉이라.

단이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새 광목천으로 다시 목을 둘렀다.

한 겹 두 겹 겹쳐지는 천에 상처가 흔적 없이 가려졌다.

매듭까지 야무지게 지은 단이는 바닥까지 동난 고약 단지를 농 안에 고이 넣어놓았다.

결이 자신을 위해 손수 구해다 준 약이라, 한낱 작은 단지마저도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결이 마당에서 말을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외자상투를 올려 갓을 쓰고 융복(戎服)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융복이 그를 위해 지어진 것처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흩날리는 철릭 자락이 바람 그 자체인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를 틀어 올린 덕에 그의 잘생긴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갓 그림자가 드리운 어둠도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를 전부 감추진 못하였다.

푸르르- 푸.

순간 흑마의 투레질에 결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넋을 놓고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단이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 채비하였느냐.”

“예, 나리.”

결의 시선이 단이의 손에 들린 보따리 짐으로 내려갔다.

떡차를 꿴 꾸러미와 휴대용 다구들이 든 보따리였다.

그는 말없이 단이의 손에서 그 짐을 가져갔다.

제 손에도 이리 무게가 느껴지는데, 저 작은 손에는 얼마나 더 무거울까.

“제가 들고 갈 수 있는데…….”

“가는 길이 멀다.”

결은 짧은 한마디만 남기곤 짐을 든 채 훌쩍 말에 올라탔다.

마음 같아선 여연에서처럼 단이도 함께 태우고 싶었으나, 괜한 소문이 퍼지면 눈총을 받는 건 단이 혼자였다.

“가자.”

결은 단이의 짚신으로 향하는 눈길을 애써 돌리며 흑마를 몰았다.

다만 평소보다 그 속도를 천천히 하니, 뒤에서 따라오는 단이는 숨 한 번 차지 않고 편안히 걸을 수 있었다.

슬슬 걷다 보니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했다.

낯선 곳으로 간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기도 잠시.

봄기운이 조금씩 묻어 나오는 햇살에 단이는 추운 줄도 모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양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대문 밖을 나선 적이 없던 터라.

따스한 햇살에 공연히 마음까지 들떴다.

“와, 동백꽃이다.”

담벼락 위로 핀 붉은 동백꽃을 따라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심 다점이었다면 여전히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추웠을 텐데.

벌써부터 공기 중에 스며드는 봄기운과 일찍이 활기가 돋는 한양 풍경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였다.

하여 단이는 처음으로 나들이를 가는 어린아이처럼 이곳저곳 구경하기에 바빴다.

이따금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단이를 살피는 결의 입가엔 아무도 모르게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통통 튀듯 가볍게 걷던 단이의 발걸음이 일순 멈춰 섰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점점 황망함으로 떨려왔다.

“저게…… 뭐하는 거지?”

우르르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높이 들린 팻말.

-도이, 50필부터

단 두 단어만으로 명백하게 정의된 저곳은 분명 사람을 사고파는 장소였다.

바로, 단이와 같은 여진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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