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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19화 (19/100)

19화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고삐를 살짝 잡아당겨 말을 세운 결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단이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운종가 장터에 웬 인파가 몰린 게 보였다.

밧줄로 묶인 사람들 앞에 인적 사항과 값이 적힌 팻말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노비 시장이 열린 듯하였다.

“이번 놈들은 또 뉘여?”

“국경을 넘어왔다가 사냥꾼들한테 잡혀온 도이놈들이라 하더군.”

“쯧쯧, 그러게 지들 땅에서 알아서 먹고 살 것이지. 뭣 하러 남의 땅에 기어들어 왔다가 저 꼴을 당한대?”

“훔쳐 먹는 짓밖에 못 하는 족속들이잖아. 저런 놈들은 호되게 가르쳐서 평생 빌어먹게 만들어야 돼.”

“옳아. 남의 땅에 함부로 넘어왔으면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왔어야지.”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결의 귀를 어지럽혔다.

사냥꾼. 그들에 대해선 결도 여연에 있을 때 들은 바 있었다.

그들은 국경을 몰래 넘어온 오랑캐를 포로로 잡아 노비 시장에 팔아버리는 이들이었다.

국가 간에 분란이 일어날 여지가 있어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군사들의 눈까지 피해가며 귀신처럼 다녀가는 놈들을 잡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심지어 군사가 사냥꾼과 결탁을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막고 있을 뿐. 실상은 잡히더라도 가벼운 형벌만 내리거나 훈방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차피 국경을 넘어온 범법자들이니, 혹 잡거든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개중엔 정말로 국경을 넘었는지 의심되는 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들도 함께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무리를 보던 결이 다시 단이를 보았다.

단이의 근처에서 들리는 말들 역시 다르지 않은 듯했다.

웅성거림이 더해질수록 저 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건 그저 착각일 뿐일까.

아니면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결이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렸다.

결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단이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잡혀온 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값을 매기는 사람들을 겁에 질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잔뜩 해어진 옷, 그리고 곳곳에 남은 상처들은 그들이 이곳으로 오는 동안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으앙, 무서워, 엄마. 집으로 가고 싶어! 으아앙!”

한 아이가 여진족의 언어로 울부짖으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심 다점의 단골이던 일란과 또래로 보이는,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될까 싶은 아이였다.

아이를 달래주던 엄마가 지친 눈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까맣게 죽어버린 눈동자 속, 단이를 향한 텅 빈 동공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왜 너만 거기에 있어?’너도, 오랑캐잖아.

“……!”

그때였다.

눈 위로 덮인 커다란 손에 단이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놀란 그녀의 귓가로 결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신경 쓰지 말거라.”

“…….”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지만 단이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감췄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결이 전부 눈치채버릴 것 같았다.

“송구하옵니다. 저런 건 처음 봐서,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황급히 뒤돌아선 단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였다.

두려운 만큼 입술이 잇새에 꾹 짓눌려졌다.

그러면서도 손은 저도 모르게 결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나를 저기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나를, 지켜달라고.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작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결이 천천히 단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

너를 절대로 저곳에 보내지 않겠다는 듯.

너를, 지켜주겠다는 듯.

“가자.”

결이 단이를 데리고 인파를 헤쳐 나왔다.

단이는 모녀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억지로 붙잡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양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는데.

지금은 어느 곳을 보아도 죄 끔찍하게만 보였다.

이곳은 본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짓으로만 들어올 수 있는 땅이기에.

언제든 저리 될 수 있는 땅이기에.

저를 바라보던 여인의 눈동자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내가 이방인이란 게 알려지면…… 나도 그 사람처럼 될까.’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으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답이었다.

질끈 눈을 감았던 단이는 고개를 들어 앞서가는 결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 태산 같은 등이 그나마 이 끔찍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겨주는 것 같았다.

마침내 흑마가 매인 곳에 도착하자 결이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까지 단이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놓아주었다.

“갈 수 있겠느냐.”

“……네. 이제 괜찮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나리.”

단이는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흐린 대답을 내어놓았다.

결은 그녀가 여전히 걱정됐지만, 언제까지고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아……!”

잠시 고민하던 그가 돌연 단이를 안아들었다.

그러곤 단숨에 그녀를 안장에 앉힌 뒤, 자신 또한 그 뒤에 올라탔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화등잔만큼 커다래져 이쪽을 향했다.

“넌 방금 발목을 다친 거다.”

“예?”

“걸을 수 없는 상태라고. 혼자서.”

“…….”

“꽉 잡거라.”

단이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결이 곧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앗!”

갑자기 빠르게 내달리는 말에 단이가 반사적으로 결의 양팔을 붙잡았다.

온몸이 휘청거리는 가운데, 등 뒤를 단단히 받친 결의 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문득 며칠 전 결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밑을 보니 어느새 결이 그녀의 손등과 고삐를 함께 감싸 쥐고 있었다.

그것을 본 단이의 눈빛이 차츰 허물어졌다.

혼자가 아니다.

이방인의 몸으로 이 땅을 밟았으나, 적어도 이 순간 나를 ‘나의 사람’이라 불러줄 이가 있다.

나를 지켜줄 이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단이는 불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벅찰 만큼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결이, 이 사내가, 나의 주인이.

나를 끝까지 지켜줄 것임을 믿고 있었기에.

***

“오셨습니까, 장군!”

또 한 번 우렁차게 터진 인사에 단이가 어깨를 흠칫거렸다.

훈련원 군사들이 결을 마주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댄 탓이었다.

그중엔 여연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군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단이를 본 반가움 때문인지 더욱 크게 인사를 하였더랬다.

덕분에 훈련원에 오자마자 귀부터 멀 것 같았다.

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갔다.

단이는 그런 결의 뒤에 숨다시피 하며 도망치듯 군사들로부터 멀어졌다.

“이곳이다.”

드디어 훈련원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별채에 도착했다.

소다옥이란 글자가 걸린 것으로 보아 이곳이 그녀가 있어야 할 다옥인 듯했다.

소다옥은 가로세로 스무 척은 되어 보이는 널찍한 공간이었는데, 결이 훈련원에 배치되고 난 후 바로 만든 모양인지 내부가 무척이나 깔끔하였다.

“장군. 오셨습니까.”

때마침 도착한 진위가 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양에 도착한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라. 나름 반가운 마음에 단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위 장군님. 그간 잘 지내시었어요?”

“그래.”

하지만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진위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퉁명스러운 건 여전하였다.

뚱하게 그를 보는 단이를 향해 결이 말하였다.

“한 시진 후에 다시 올 것이니, 그때까지 이곳에서 쉬고 있거라. 멀리만 가지 않는다면 이 근방은 네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좋다.”

결이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춰 말을 이었다.

“대신 동편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한 의정부 청사 근처로는 절대 가선 안 될 것이다.”

그곳에선 나리께서도 어찌 못 할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의정부가 이곳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말처럼 들려 단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장군. 이제 가셔야 합니다.”

결은 조금 더 걸음을 미루다가 결국 진위의 부름에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이 나가자 소다옥엔 단이 혼자만 남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사위가 잠잠해지니, 고요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심 다점 같다.”

조용한 공간도, 은은하게 풍겨오는 다향도 심 다점을 떠오르게 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을.

동그란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단이는 낮게 숨을 내쉬며 들고 온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소다옥 안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다신당을 축소시켜 놓은 듯 있어야 할 최소한의 다구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곳곳에는 여러 종류의 책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하는 단이를 위해 결이 특별히 구비해준 것 같았다.

한자와 언문이 뒤섞인 책장을 훑어보던 단이는 이내 흥미를 잃고 탁자 앞에 앉았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아까 보았던 모녀의 잔상이 눈앞을 스쳤다.

결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쉬이 떨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애초에 여진족이란 게 밝혀졌다면 자신 또한 같은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김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나마 제 손을 잡아주던 결의 온기가 절망으로 다다르려는 생각을 막아주고 있었다.

‘혼자 조용한 곳에 있으려니까 별 생각이 다 드네. 조선인처럼 살기로 했으면 마음까지 조선인이 되어야지.’

이대로 있다간 심란한 마음이 땅굴까지 팔 기세라.

애써 생각을 떨친 단이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소다옥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뭇 사내들의 함성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저 가운데 결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근처는 돌아다녀도 괜찮다 하셨으니, 잠깐 걷다 와야겠다.’

단이는 바람이라도 쐴 겸 훈련원 대문을 나섰다.

넓은 육조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듬직한 소 등에 한 짐 가득 싣고 가는 상인도 있었고, 제 몸만 한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도 있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종종 화려한 관복을 입은 관원들도 보였다.

단이는 여유롭게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저게 나리께서 말씀하신 의정부인가?’

멀리 보이는 경복궁의 오른편에 육조거리 중 가장 넓은 터의 청사가 보였다.

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저곳만큼은 근처로도 가지 말라 하신 걸까.

‘혹 죄인을 심판하는 곳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에서부터 오싹한 기운이 올라왔다.

이 땅에선 이방인 역시 죄인이라.

아까 보았던 여인의 눈빛이 다시금 제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단이는 의정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잠깐 서거라.”

“헉!”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단이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놀란 단이의 눈에 보인 건 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쓴 웬 여인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곱디고운, 아리따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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