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갑자기 나타난 여인에 단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쉬잇.”
단이가 비명이라도 지를 듯 숨을 집어삼키자, 여인이 검지를 세우며 조용히 하란 뜻을 보냈다.
나이는 이제 막 방년에 접어들었을까.
뒤집어쓴 치마 틈새로 희고 고운 피부에 뱁새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윤기 나는 살결부터 시작해 온몸을 두른 화려한 비단 옷까지, 누가 봐도 귀한 집 여식이건만.
‘어찌 이리 해괴하게 치마를 뒤집어쓰고 계신 거지?’설마 정신이 이상한……?
아이고, 어쩌다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니, 여인이 단이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였다.
“자연스럽게 앞을 보고 걷거라. 저어기, 운종가까지만 함께 가주면 된다.”
여인이 육조거리 끝에 있는 시장 입구를 가리키며 단이를 보았다.
눈동자가 또렷한 것을 보니 정신이 이상한 것 같지는 않고, 그럼에도 뒤가 급한 사람처럼 서두르는 모양새가 퍽 수상하고.
어찌해야 하나 멀뚱멀뚱 쳐다만 보니, 여인이 애원하는 얼굴로 단이를 재촉했다.
“어찌 안 가고 있느냐.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한단 말이다. 얼른, 응?”
“예? 아, 아니, 잠깐…….”
결국 참지 못한 여인이 단이에게 팔짱을 껴 앞으로 잡아끌었다.
겉보기엔 화초 같은 여인이 어찌 이리 힘이 센지.
단이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저 앞에 한 무리의 군졸들이 나타났다.
“옹주 아기씨께서 또…….”
군졸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뒤집어쓴 치마를 단단히 여민 여인이 단이의 팔을 세게 잡았다.
군졸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저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건가?’곤란한 눈으로 양쪽을 번갈아 보기를 잠시.
단이는 결심한 듯 여인을 감쌌다.
“아, 아씨. 얼른 가시어요. 이러다 늦겠어요.”
그러곤 어색한 투로 말하며 여인을 이끌었다.
그러자 의외라는 듯 단이를 본 여인이 싱긋 입가를 늘였다.
“그래. 얼른 가자꾸나.”
무사히 군졸 무리들을 지나친 두 여인은 인파 속으로 안전히 스며들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여인은 금방이라도 총총 뛰어갈 듯 가볍게 걸었다.
치마 밑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비단 꽃신이 꽤나 값비싸 보였다.
“내 그간 바깥 공기를 쐰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얼마나 좀이 쑤시던지. 천 상…… 아니. 내 몸종은 무척이나 깐깐하여서, 통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넉 달에 한 번씩은 나와도 좋다고 내 허락도 받았는데 말이다.”
여인은 묻지도 않은 말을 종달새처럼 종알종알 잘도 늘어 놓았다.
조금 당황스럽긴 해도 어쩐지 그런 그녀가 밉지는 않았다.
또 길을 걷다 보니, 드물지만 이 여인처럼 치마나 긴 옷을 뒤집어쓴 이들이 더러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여 단이는 재잘거리는 여인의 수다를 잠자코 들어주며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여인은 시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 속에서 여인이 단이를 마주 보았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가도 된다. 예까지 함께해주어 고맙구나.”
별이라도 박은 듯 반짝이는 눈이 호선을 그렸다.
이리 보니 같은 여자가 봐도 참으로 아리따운 여인이라.
단이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어요. 제가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려주면, 내 훗날 꼭 사례를 하마.”
“아니어요. 인사를 받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덕이라 배워왔다. 그러니 이름이라도 알려다오.”
이름을 말할 때까지 떠나지 않을 기세라.
머뭇거리던 단이는 결국 여인에게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단이라고 하옵니다.”
“단이……. 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이의 생김새와 차림새를 유심히 훑어보던 그녀가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이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물었다.
“혹 네가 그 아이더냐? 북방 귀신의 다비?”
“예? 그걸 어찌…….”
“어쩐지, 훈련원 근처에 웬 여인이 서성이고 있나 했더니!”
어리둥절해하는 단이를 보며 여인이 싱긋 웃었다.
“도성 안에 네 소문이 파다한 걸 너만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소문이요?”
“북귀의 다비에 대해 다들 관심이 많더구나. 나 또한 네가 궁금하였는데 이리 만나게 되다니, 내 오늘 나오길 잘한 듯싶구나.”
여인은 반가운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단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아 이리 가지만, 훗날에 꼭 다시 만나자꾸나. 그땐 사양치 말고 내게 와야 한다. 알겠느냐? 나와 약조한 것이다.”
“아니, 저…… 아씨? 아씨!”
마지막까지 화사한 미소를 보이던 여인이 곧 몸을 돌렸다.
잡을 새도 없이 멀어지는 여인을 보며 단이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누구신지 알려주셔야 후에 찾아뵙든 할 텐데…….”
해준 것이라곤 육조거리를 함께 걸은 것밖에 없는데, 겨우 그런 일로 사례를 한다니.
갸웃거리는 단이의 머리에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쁜 짓을 해서 도망 다니는 사람인가?!’군졸을 보고 피한 것도 그렇고, 몸종을 대동한 다른 여식들과 달리 혼자 다니고, 거기에 인파 속으로 숨어들기까지!
“지금이라도 잡아야 하나?”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렸으나 여인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단이가 석연찮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소문은 또 뭐람……. 한양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물어도 대답해 줄 이는 사라진 뒤라.
이마를 긁적이던 단이는 이만 훈련원으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렸다.
한데 여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왔더니, 이 길이 저 길이고 저 길이 그 길 같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려던 그때.
“영상 대감 납신다-! 길을 비켜라!”
멀리서부터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벽제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숨거나 바닥에 납작 엎드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단이가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는 사이.
썰물이 빠지듯 숨는 사람들 너머, 이윽고 화려한 가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널찍한 평교자를 멘 건장한 가마꾼들.
그 위에 붉은색 관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의정, 남준백이었다.
“영상 대감 납신다-! 썩 물렀거라!”
별배의 위협적인 벽제가 커질수록 준백과 단이의 거리도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단이가 준백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쿵, 쿵, 쿵.
알 수 없는 감정이 단이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려움. 그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기억조차 없는 어느 순간으로부터 비롯된 두려움.
손끝이 떨려와 단이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얼른 다른 이들처럼 바닥에 엎드리거나 몸을 피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아니, 아예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마치 거대한 호랑이를 마주한 것처럼.
마침내 준백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그때.
“……!”
골목 안에서 갑자기 나온 손이 순식간에 단이를 끌어당겼다.
“비켜라-! 영상 대감 납신다!”
준백은 텅 빈 거리 한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머물다 간 자리엔 작은 발자국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
오전 훈련을 마친 후.
결은 진위와 함께 소다옥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진위는 오후 일정과 조정의 소식에 대해 읊었다.
“오늘 오후에는 진법을 습독하고 사어(射御)를 익힐 예정입니다. 또한 듣기론 올해 실시되는 도시(都試)에서 특별히 판관을 시취에 부를 거란 소문이 있습니다. 장군께서도 미리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
“장군?”
“이미 들은 바다. 사념치 말아라.”
결은 곧 대수롭지 않게 답하였다.
하지만 실은 온 신경이 소다옥에 향해 있어 진위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많이 무료하진 않았을까.
낯선 곳에 홀로 남겨져 겁을 먹진 않았을까.
그러잖아도 처음 훈련원에 데려온 날이라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 않아도 될 생각들이 공연히 밀려와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장군, 다비가 없습니다.”
결이 뒤따라 소다옥 안을 살펴보았다.
진위의 말대로 안에 있어야 할 단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 주변을 구경하러 나간 걸까.
결은 발길을 돌려 단이가 갈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훈련원 안은 물론이고 육조거리와 시전 근방까지 전부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단이는 보이지 않았다.
한양에 온 뒤로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어 길도 잘 모를 터인데.
‘……설마.’섬뜩한 생각에 피가 빠르게 역류하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턱에 꾹 힘을 준 결이 진위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이 근방을 더 찾아볼 터이니, 병서 습독이 끝날 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체탐자 둘을 골라 함께 단이를 찾거라.”
“차라리 저희를 바로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팎으로 시끄럽게 해봤자 좋을 것 없다.”
사적인 일로 군사를 움직여 봤자 논란거리만 던져주는 꼴이었다.
혹 저들이 노리는 게 빌미를 만드는 것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했다.
아직은 단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 신중히 움직이는 게 좋았다.
지금으로선 밖에 나섰다가 단순히 길을 잃은 것이길 바랄 수밖에.
“우선 내가 먼저 찾아볼 터이니, 너는 내색 말고 훈련을 진행하거라.”
“예, 장군.”
고개를 숙이는 진위를 뒤로하고 결은 조용히 훈련원을 나섰다.
차라리 혼자 두지 말 것을.
호위라도 하나 붙여둘 것을.
가뜩이나 자객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 얼마 전이라.
뒤늦은 후회가 그의 가슴을 더욱 짓눌렀다.
‘제발, 무사히만 있거라.’결은 닿지 않을 청을 간절히 빌며 발길이 닿는 대로 단이를 찾아 나섰다.
***
“…….”
단이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얕게 내쉬는 숨에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그 위에 얹어진 손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야를 가득히 채운 청포 관복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옅게 흔들렸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올리니…….
“이제 가신 것 같구나.”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성조의 얼굴이었다.
골목 밖을 살피던 성조가 시선을 내려 단이를 마주 보았다.
“맹랑한 다동인 줄은 알았지만, 간까지 배 밖으로 빼놓고 다니는 줄은 몰랐구나. 영상 대감께서 지나가시는데 감히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고 말이야.”
그는 손끝으로 단이의 이마를 가볍게 톡 건드리며 말했다.
말만 들어선 나무라는 것 같은데, 그의 낯은 싱긋 웃고 있었다.
단이는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
“저,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그랬습니다.”
“왜. 대감께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느냐?”
“그런 것 아니어요.”
“그럼 어찌 그리 뻣뻣하게 굳어 있었느냐.”
성조의 물음에 단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준백을 마주한 순간 느꼈던 감정은 그녀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어찌하여 두려움을 느꼈는지, 무엇 때문에 몸이 굳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리 높으신 분을 처음 뵈어서 그랬나 봅니다.”
하여 두루뭉술한 대답만 성의 없이 할 뿐이었다.
그런 단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성조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북귀도 무서워 않는 녀석이 품계를 무서워한다라. 고관대작이 대단키는 하구나.”
“제가 이곳에서 안 무서워하는 사람은 나리뿐입니다.”
단이는 새치름히 쏘아주고는 먼저 골목을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지?’벌써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단이가 심각한 얼굴로 성조에게 물었다.
“혹 오찬을 드셨습니까?”
“에이, 은혜는 다른 것으로 갚아도 된다. 내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다동 코 묻은 돈을 뺏을라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여쭙는 겁니다.”
성조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이며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오찬 먹을 시간은 이미 지났지. 나야 관원들 얼굴 마주보면 입맛이 떨어져서 따로 해결하였지만.”
“아, 망했다!”
단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정오시에 세 번째 차를 우려야 하거늘.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 끌려 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훈련원, 훈련원으로 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나리께서 저를 찾으실 것이어요!”
“길은 알고 가려는 것이냐?”
허둥거리며 아무 곳으로나 향하려던 발이 다시 멈춰 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단이의 얼굴에 성조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갯짓을 하였다.
“따라오너라. 지름길로 훈련원까지 데려다줄 터이니.”
“정말이시어요?”
“그럼 이 상황에 농을 할까.”
성조는 저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믿을 사람이 성조밖에 없었다.
혼자 나섰다간 또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그럼…… 최대한 빠른 길로 부탁드리어요.”
단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